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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조주 하나님(2) (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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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도에 석가모니의 뼈가 인도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해서 인도는 물론이고 불교 국가나 모든 불교도들이 굉장히 흥분했던 때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뼈를 진열해서 시가행진을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 뼈가 지나갈 때에 엎드려 부복을 하고 경배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떤 선교사님이 곁에 있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일 저 사람들이 예수님의 뼈 한 토막이라도 발견했다고 하면 아마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땅에서 뼈를 찾는 그런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그러나 뼈를 찾을 수가 없고 그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신경 첫 부분을 내가 믿는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그분은 나와 상관이 있는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의 3가지 속성을 바로 파악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옵나이다>
이것이 사도신경의 제 일조입니다.

히브리 11:6절 말씀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앙의 기초가 되는 신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살아계신다는 것은 자명의 진리입니다.
또 성경이 쓰일 그 때는 혹 예외도 있겠습니다 만은 거의 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때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를 향하여 시편 14:1절을 읽어 볼 것 같으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 말세올시다. 말세는 이런 어리석은 자가 많아졌습니다. 무신론자도 많아졌습니다. 소위 사신론이라고 참람된 말을 하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악이 팽창한 시대입니다. 사탄이 남은 날이 많지 못한 것을 알고 극단으로 난동을 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하는 점을 종종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 존재를 믿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달리, 특별히 소유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이성입니다. 둘째는 양심입니다. 셋째는 우리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견지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명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이성이 있기에 무엇을 사색합니다. 연구합니다. 그래서 발명도 하고 발견도 합니다.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됩니다. 문화가 창조됩니다. 무도 이성을 통한 활동입니다.
이런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우주를 바라보세요.
①해는 매일 아침 동편에서 솟아 올라와서 매일 저녁 서쪽으로 넘어갑니다. 아침에는 언제나 날이 밝아지고 저녁에는 날이 어두워집니다.
달은 언제나 음력 보름이면 만월이 됩니다. 음력 초순에는 초승달로서 작은 달이 됩니다. 조수에는 언제나 간조와 만조가 있습니다.

②지금은 뜨거운 여름입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서늘한 가을이 올 것입니다. 그 후에는 추운 겨울이 올 것입니다. 다음에는 따스한 봄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다시 뜨거운 여름이 올 것입니다. 춘화추동 사계가 변치 않고 순환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천문학자의 말을 듣지 않고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우주에는 이와 같이 <질서와 고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팔레이라고 하는 분이 시계에 대하여 이런 예기를 했습니다. 어떤 분이! 들에 등산을 갔습니다. 길가에서 무엇이 발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회중시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계를 처음 보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둥글둥글합니다. 장침 단 침이 뱅뱅 돌아갑니다. 그는 곳을 뜯어보았습니다. 바퀴가 있어서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때 이 사람이 처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어떻게 생겨났을 까?>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것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하고 말했습니다.

시계와 같이 질서와 고안이 있는 물건을 보며 이것을 만든 이가 있음을 즉각적으로 압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우주는 한 큰 시계와 같습니다. 지구는 돌아갑니다. 유성이 항성을 싸고 돌아갑니다. 이 우주에 큰 시계를 만든 이가 없겠습니까?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와 같은 우주를 만드시고 운행하시고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있지 않겠어요?
성경은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시계를 만드신 분은 필연코 권능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올 여름에 장맛비로 홍역을 치렀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곡식이나 과일이 도무지 익지 않습니다.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햇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햇빛이 비취지 않으면 온갖 삼라만상이 죽은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신 태양에너지를 먹고사는 것입니다.
태양이 비취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습니다. 식물에 태양이 비취면 녹색 물질인 엽록소가 태양에너지를 걸러서 그것을 포도당 형태로 저장합니다.
그 포도당 에너지 속에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등 모든 영양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먹는 것은 태양열입니다.

누가 태양을 만들었습니까? 누가 날마다 식지 않는 엄청난 빛과 열을 공급하는 것입니까? 누가 태풍을 만들었으며 왜 하필 그 태풍이 한반도를 지나가는 것입니까? 누가 태풍을 막을 수 있으며 그 태풍의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우리 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엄청난 세포들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 하나의 크기가 250,000분의 1인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세포 속에 온갖 생명이 살아 움직입니다.
최근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연구한 학자에 의하면 한 사람의 세포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 정보가 성경책 800권 크기의 분량이랍니다.
작은 세포 하나가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그 세포들이 우리 몸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또 얼마나 열심히 뛰고 있습니까?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일합니다. 심장은 하루에 약 10만 번 수축하고 8,000리터 이상의 피를 뽑아준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 심장이 우리가 잘 때 갑자가 멈춰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것입니다. 심장은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 합니다.
누가 그 심장을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 심장을 쉬지 않고 움직여 갑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신기합니다.

로마서 1: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느니라>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이런 우주를 만드신 이가 없다고, 혹은 모르겠다고, 핑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2. 둘째로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인간의 가슴속에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을 꼭해야 한다. 무엇을 꼭 안 해야 한다. 이렇게 지시하는 칸트의 말대로 지상명령인 무엇이 있습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이 양심이 후천적 원인으로서, 혹은 사회적 문화적 용인으로서, 혹은 환경 교양 같은 것으로서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실패했습니다. 다소 후천적인 요소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양심은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스토익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날 때에 선천적으로 음악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가지고 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도덕적 의식은 다 가지고 난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 양심이 어디서 왔습니까?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내 속에는 도덕적인 율법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고 양심은 하나님이 주셔서 그 양심이 하나님 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양심은 우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말입니다. 
이 양심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배후에 있는 대 양심이올시다. 하나님은 우주의 도덕적인 대주재자 이십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도덕적인 주재자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양심이! 창조의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 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이 세계는 자연히 우연히 만들어졌고 고등한 동물은 하등동물로 인하여 진화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결코 인간은 하등동물이 진화해서 고등동물인 인간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변홍길 박사가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야! 내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신학교 채플 시간에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던 독일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변 박사가 귀국한다고 하니, 편지 한 장을 주면서 이 편지를 태평양 위를 날라 넘어갈 때 지루하거든 읽어보라고 그러면서 편지 한 장을 주더랍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뜯어보았는데 편지의 내용인 즉은!

미시간 호수 옆에 긴 -숲속에 세계 원숭이 유엔 총회가 모였는데,
남미에서 온 원숭이, 아프리카에서 온 원숭이, 캐나다에서 온 원숭이, 구라파에서 온 원숭이, 꼬리 긴 원숭이, 짧은 원숭이, 앞다리 긴 원숭이, 뒷다리 긴 원숭이, 풍채 좋은 원숭이, 고양이 같은 원숭이, 각양각색의 원숭이가 숲속에 잔뜩- 모였는데,
풍채 좋은 점잔은 원숭이가 하나 나오더니 만 높은 가지에 척- 올라앉더니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불원천리 남미에서 여기 까지 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저 아프리카에서 오신 우리 친애하는 동포, 그곳에 우리 동포들 다 평안하십니까?>. 모조리 안부를 묻고, 좋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인데,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오늘 총회를 모인 까닭은 여러분 더러 아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만 <다윈>이라고 하는 괴상한 동물이(진화론자 다윈을 말합니다) 말을 하기를 우리가 진화하여서 자기 내가 됐다> 그럽니다.
이거 원숭이 말입니다. <우리가(원숭이) 진화해 가지고 자기 내가 됐다 그럽니다>. 이 말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시렵니까?
자 한번 냉정히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진화해서 자기네들이 됐다고 말하는 소위 인간이라고 하는 그 동물들이 얼마나 더럽고 흉악합니까?
우리 신성한 원숭이 사회에 골육상잔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신성한 원숭이 사회에 노동자 파업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신성한 원숭이 사회에 뺑소니 운전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신성한 원숭이 사이에 어린이 유괴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이 원숭이가 사회악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이 더러운 인간들이 말하기를 우리 원숭이가 진화해서 자기들(인간)이 됐다고 하니, 신성한 우리 원숭이 사회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모독이 될 수 없소!
이런 모독을 받고 여러분! 그냥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일전 불사의 각오는 없느냐고 고함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 얘기를 변 박사가 채풀 시간에 이 예기를 한 것을 지금도 기억을 합니다.

옳습니다. 인간이 기계를 쓰는 데는 사람이 동물보다 앞서지마는, 인간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동물 보다 더 악한게 인간입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악합니다. 그러나 어떤 호랑이나, 사자가 사람 잡아 먹으려고 일년 이년을 계획하던가요, 순간적인 충동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는 있어도, 사람 잡아 먹으려고 계획을 세우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일년, 이년을 얼마나 계획합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까?
칼로 목을 쿡- 찌르는 것만 죽이는 것입니까?
음식으로 죽이려고 그럽니다.
의복으로 죽이려고 그럽니다.
약으로 죽이려고 그럽니다.
내 주머니 채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이 인간!
원숭이에게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이런 악을 행치 않습니다. 왜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해 줍니다.

3. 셋째는 인간에게는 짐승과 아주 다른 영혼이 있습니다.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 서커스단을 구경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짐승들도 재주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짐승들이 자기네끼리 어디서 예배당 짓는다고 하는 말 들어 보았습니까? 물론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야만이라고 해도, 아무리 미개한 아프리카나, 남양의 어떤 오지의 미개한 사회라고 해도 그들이 살집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신전을 세웠습니다. 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이 다른 점입니다.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인간이란 그 속에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종교적 동물, 종교성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에 믿지 않던 어떤 분과 이야기하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하나님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몰래 넘어오다 공산군을 만날 때는 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흔히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 종교성이 있어서 급할 때는 <아이고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 속에는 하나님을 찾는 본능은 속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귀소본능이라는 것 있지요. 남쪽에서 온 나무는 봄이 되어 꽃이 피면 남쪽 가지에서부터 꽃이 핍니다. 북쪽에서 온 말은 밤에 잘 때에도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잔다고. 구소본능이라는게 있습니다.
사람의 귀소본능은 사람의 근본에 대한 그 동경하는 본능이라는게 있습니다. 그 본능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증거 하게 됩니다.

전에 어떤 분이 봄날에 산에 가서 꿩알을 주어다가 닭이 지금 계란을 품고 앉아 놓은 곳에다가 넣어 놓았습니다. 닭 알이 병아리가 되어 나오는 날 꿩알도 꿩 병아리가 되어 나왔습니다. 꿩 병아리하고 닭 병아리하고 한 우리 안에서 같이 모이를 먹고 같이 물을 마시며 같이 어울려 왔다 갔다 하지만은, 이 꿩 병아리의 마음에는 허구헌날 푸른 산천 내 고향 바라보면서 늘 동경하고 그리워합니다.
이 꿩 새끼가 언제 푸른 산천을 가 보았습니까? 언제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언제 배웠습니까? 전혀 배우지도, 들어보지도, 가본 경험도 들은 예기도 없건마는 그 새끼 꿩 핏속에 꿩은 산천에서 낳기에 그 산천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 핏속에 이 본능이 있습니다. 인간의 세포 속에 이 본능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 속에 인간의 맘속에 귀소본능 그 근본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는데 그 근본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이 인생의 근본임을 인간 본능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 아무도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이 귀소 본능 일언이하 뭐라고 그러든 간에 그것이야 뭐 옥황상제라 그러든지, 뭐 염라대왕이라 그러든지, 하나님이라 그러든지, 뭐라 이름을 붙이든 간에 인간 이상의 어떤 실재에 대하여 그리워하고 또 의지하고 뭔가 동경하는 그 본능이 있단 말입니다. 그 본능이 하나님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거북이를 보십시오. 우리가 볼 때에 별것 아닌 것 같은 거북이 한 마리도 자세히 보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거북이는 알을 낳을 때에 반드시 바닷가 백사장에서 얼굴을 파묻고 낳습니다. 그런데 그 거북이 알에서 나온 새끼 거북이는 비틀거리며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또 바다에서 거북이는 아무거나 먹지 않습니다. 오직 해파리만 먹는 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 자기를 해치려고 달려드는 상어를 보면 얼른 목을 안으로 집어넣고 죽은 듯 서있습니다.
상어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오직 백상어만 거북이는 해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용케도 백상어를 알아봅니다. 백상어만 보면 고개를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알을 낳을 때는 그 어미가 그랬듯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알을 낳습니다.
누가 거북이를 만들었습니까? 누가 거북이에게 알을 낳을 때는 반드시 바닷가 백사장으로 올라가라고 일렀습니까?
누가 알에서 막 태어난 거북이에게 너는 육지로 가지말고 바다로 가라고 가르쳤습니까?
누가 거북이에게 해파리만 먹고살라고 가르쳤습니까?
누가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백상어를 피하라고 가르쳤습니까?
거북이 한 마리 속에 우주의 온갖 신비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 그런 본능이 있음으로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만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고프면 먹고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린애에게 젖을 빠는 본능이 있기에 어머니의 젖꼭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혼자살기 싫어합니다. 여러 사람과 사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점점 자라서 십 칠 팔세 쯤 되면 전에 없던 번민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적 본능입니다. 그 성적 본능도 만족시킬만한 이성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능이 있으면 그 본능을 만족 시킬만한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종교적 본능이 있는데 이 종교적 본능에 대해서만 만족시킬 대상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굽니까? 그 대상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니까 우리 인간에게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햇빛이 위에 있으니까 풀과 나무가 위로 향하고 자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에 영적 기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짐승은 먹을 것이나 잘 먹고, 편안히 누울 자리만 있으면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픈 때 먹을 것 찾고, 집 없을 때에 집을 찾지만, 의식주가 아무리 넉넉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 인간의 심령이 참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시편 저자와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만족을 느끼더라도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참 만족은 없고, 마음 한구석 허무감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릅니다.
왜 이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은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영혼의 부르짖음이 곧 하나님께서 계심을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전에 헬라의 유명한 철인 플라톤은 <무신론자는 영적 환자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태양이 밝아도 눈먼 소경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주를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성도들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까? 그것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우리의 관념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부정적 관념과 긍정적 관념>입니다.
가령 맑다는 것은 긍정적 관념이고, 어둡다는 것은 부정적관념입니다.
그러면 부정적 관념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긍정적 관념이 있기 때문에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즉 부정적 관념이란 긍정적 관념의 부산물입니다.
빛이 있기에 어두운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무신론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 동양 성현도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무시하고 옳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지어서 살지만 모든 죄 가운데 불신의 죄, 즉 하나님 믿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왜요? 아무리 죄가 많을 지라도 하나님 믿고 그 죄를 회개하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누가 죄가 적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으면 그 죄를 용서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때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릿속에 관념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쓸 때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안하고 그 명령을 지키지도 않는 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이게는 진노가 있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라고 했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정말 압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도우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시오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워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공포심이 살라졌습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지한다고 하면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던지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와 같이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의존합니까? 그러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용감히 살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를 극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승리적 생활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의지합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니>, 정말 내가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까?
우리 가운데 이 문제에 관해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분은 없으십니까? 이 시간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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