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명령과 허용 (마 19:1-15)

  • 잡초 잡초
  • 184
  • 0

첨부 1


19-23장은 마태복음의 다섯 번째 이야기 단락입니다.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여행하는 길에 생긴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과 계속 충돌하시면서, 제자들에게는 세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쪽 베뢰아 지역을 통해 유대로 여행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고,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무리들 속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모두 영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혼의 조건으로 명시된 신명기 24:1절의 ‘수치 되는 일’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랍비 샴마이(Shammai)의 추종자들은 수치 되는 일을 ‘간음’으로 한정하여 해석했습니다. 반면 랍비 힐렐(Hillel)의 추종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여자가 요리를 못하는 등의 일까지도 수치 되는 일로 확대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 중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견해 중에서 좀 더 나은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기준 원리로 제시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4-6).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최초의 부부는 원래 한 몸이었던 관계가 다시 짝을 맞추어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혼은 단순히 결혼서약 파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하신 창조원리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혼불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7)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고 대답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모세가 어떤 조건 하에서는 이혼하도록 ‘명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했을 뿐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무나 이혼이 성행하는 그 시대 상황에서 버림받은 여인들이 보호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원칙은 모세가 ‘허용’한 것을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뜻을 중심으로 세워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뜻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뜻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뜻을 어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서 보면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타락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보면 타락조차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뜻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는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명령’하신 뜻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허용’해 두심으로 십자가를 통한 구속 역사가 완성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를 훌륭한 악역 배우로 평가해서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 가운데 있었지만, 결코 ‘명령’하신 뜻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관련해서는 다윗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다윗은 성경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인물로 평가했던 사람입니다만,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 일로 다윗이 책망 받거나 회개를 촉구 당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해 두셨다고 해서,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다윗에게 ‘허용’되었으니 일부다처제가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욕망을 감추면서 성경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일부일처는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명령’하신 뜻임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과 ‘명령하신 뜻’이 있음을 알고,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말씀할 때는, 그 분의 ‘허용’하신 뜻이 아니라 ‘명령’하신 뜻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 행동에 합당한 결과를 거두게 됨을 보여줍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땀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다윗은 배다른 자녀들 사이에서 간음과 살인이 자행되는 것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한 뜻 안에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명령하신 뜻을 위반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당장은 심판이 없어보였지만 그 뿌려진 행위의 열매는 결국 스스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범죄들이 하나님의 보다 넓은 경륜 속에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조차 세상 사람들처럼 성경이 금하고 있는 죄악들을 먹고 마시도록 허용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허용되어지고 있다고 해서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본래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노력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답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자 하는 자세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하나님 백성답지 못함에 대해 회개하고 있어야 하며, 실패하여 넘어지더라도 그 시선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향하고 있어야 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의 소망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끝내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유혹의 길로 가도록 허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고, 죄의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창조원리에 근거해서 이혼의 불가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고 정죄하셨습니다. 이혼불가의 말씀과 예외조항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음행은 다른 사람과 한 몸이 됨으로써 배우자와의 한 몸 관계를 파기하는 행위입니다(고전 6:16). 음행의 경우에 이미 한 몸은 찢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이혼은 이미 실제적으로 나누어진 것을 확정하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충격을 받고 말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 아마도 그 시대는 이혼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합당한 배우자를 만나서 일평생 해로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대구도 하루에 37쌍이 결혼하고 21쌍이 이혼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찢어지지 않고 끝까지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기적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결코 이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 시대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1-12)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혼불가’를 말씀하셨지만 ‘독신불가’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신님께서 독신이셨고, 사도 바울도 독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일평생 한 몸으로 해로하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속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혼관계가 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독신서약도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냐 독신이냐의 결정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단체의 규율을 따라서 정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천국을 위하여” 결정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결혼 적령기의 처녀총각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모두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일평생 한 몸으로 해로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독신으로 살 수도 있는 마음도 주시도록 기도할 필요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도 ‘독신은 불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제쳐두고 일단 결혼부터 하고보자는 생각, 결혼도 독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잊고 자기 노력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생각, 하나님 나라를 위하려는 마음보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위하려는 생각에 가득 차 있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도에 위배됩니다. 결혼 문제를 사람들의 의견들 중에 더 나은 의견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15절은 어린아이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가 얼마나 세상 가치관에 깊이 젖어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수기도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13). 예수님의 충격적인 결혼관 말씀으로 마음이 심란한데, 아이들이 오니까 몹시 신경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셨습니다(14-15).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가치관들이 우리의 성품 속에 깃들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