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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바꾸는 공식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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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저자인 <입센>은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크리스챤을 빗대어[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나 태양을 잃은 사람들 ]이라고 고발합니다.이 말은 예수를 믿지만 삶 속에 예수를 나타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장 잘 나타내 준 말씀이 바로『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즉 신앙에 반영되지 아니한다면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 이전에 무엇이 되라고 합니다.Doing 이전에 Being이 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은 절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삶을 살아가는 내일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오늘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할까요?1.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합니다. 왜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합니까?(13절)이 말은 먼저 이 세상은 소금이 필요하고 빛이 필요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부패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 두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은둔주의이고 하나는 세속주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를 똑 같이 배격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하고 어둡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피해서도 안 되고 동화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을뿐더러 이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두움을 물리쳐야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어둡다는 것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2>아담 이후 인간사는 타락의 길에서 이제는 구조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간 형편입니다.창6: 노아시대 때로부터 사람들이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하니깐 사람들이 육체가 되어간다고 합니다. 먹고 살만하니 하나님 등지고 육체적 쾌락으로 흐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거역하는 인간사는 항상 우상숭배 즉 물질만능주의와 성적인 타락 나아가 권력지향주의 이 세 가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배후에는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2:2에 세상 사람들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계략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하듯이 그들은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예나 지금이나 사탄이 여전히 사용하는 방법이 ,Mammonism즉 돈입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사람은 돈 때문에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돈 때문에 때 묻고, 돈 때문에 양심을 속이고 결국 부패하고 맙니다. 교회 밖에 이야기만 아니지요. 그리고 문화라는 것입니다. 유행이라는 것이지요. 현대 문화의 특징이 되고 있는 것만 살펴봐도 사탄이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현대문화를 포스트 모든니즘 문화라고 합니다.포스트 모든니즘이란 과거와 단절로서 특징은 뉴에이지 문화입니다. 뉴에이지 문화는 퓨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혼합주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만이 유일신이 아니라 세상의 초월적인 모든 것은 다 신적 존재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기독교가 점점 혼합주의 종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빌2:15절 [어거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 라고 합니다. 삐뚤어 저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대라는 말입니다.그러나 너희는 삐뚤어 저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 동화되어 거기서 부자 되고 출세하려고 하지 말고그러나 빌2:16절에삐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라고 합니다.문제는 이 세상이 삐뚤어져 있다는 것보다 삐뚠 세상을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삐뚤게 보지 않고 동경한다는 것입니다.17,8세기 영국 시인 <우인열전>의 저자 <알렉산더 포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악덕은 너무도 무서운 모습을 한 괴물, 그렇지만 미워하기 위해서라도 볼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너무 자주 보면 그 얼굴도 익숙해져서 처음에는 참아야 하지만다음엔 동정하고 마침내 끌어안는다.저러면 안 되는데, 저건 아니야, 라고 거절하면서도자꾸 보고 자꾸 들으면 점차 무감각해진다.좀 더 있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감각조차 마비된다.그러다가 마침내 옳은 것도 그 중심축을 잃고 만다 ”고 합니다.물론 당시 영국 왕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만 오늘 교회도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솔로몬 애시>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사회적 동조성’에 대해 실험했습니다.실험 대상자 7명에게 카드 1장을 보여주고책상 위에 있는 다른 4장의 카드에서 같은 모양의 카드를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이때 7명 중 6명에게는 미리 틀린 답을 말하기로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했습니다.6명이 서로 일치해서 틀린 답을 말하자 나머지 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카드가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고 당황한 기색으로 결국 잘못된 카드를 선택했습니다.흥미로운 사실은 6명 중 1명이라도 정답에 동조했다면 그는 자기 생각대로 정답을 고수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일지라도개개인이 분명한 목소리로 진리를 말하고 행할 때서로에게 힘이 되고 함께 진리의 편에 서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점차 진리를 좇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초대교회는 소수였지만 성령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금되고 빛이 될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아시아와 로마를 복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적 가치관으로 온 세상을 감염시켰습니다. 바른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을 짜게 했던 것입니다.나 한 사람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공식인 것입니다.오늘 예수님은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합니다.2.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리고 하는데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13절)그런데 소금이라 말하니지금은 누구나 별로 귀하지도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합니다.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당시의 소금은 지금 소금이 아닙니다.소금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귀하게 취급 되었는가?옛날에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며소금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 대개 고대 국가들이 건설되었습니다.(주몽-소금)그것은 소금을 지배하는 것이 곧 백성을 지배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월급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Salary라는 말은 원래 소금이라는 단어 Salt에서 나온 말입니다.옛날 로마 군인들이 월급을 소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소금은 바로 현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물로 비유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을 버쩍 뜨게 하는 비유입니다.그럼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1. 첫째로 소극적으로는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실 때는아무리 부패한 사회와 문화와 역사 속에서 너희는 같이 부패하는 자가 아니라 그 부패를 막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부패를 막지 못하면 그 부패 속에 교회가 잠식되고 만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맛 잃은 소금이 밖에 버리워 밟혀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14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는세례를 베풀기 위해 떠놓은 성수에 파리가 빠지자 물이 오염되었으니 버려야 된다는 측과 파리가 성화되었으니 그냥 그 물로 세례를 베풀어야 된다는 측이 싸우다가 회교도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1910년 러시아가 공산화되던 때 러시아정교회는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설 수 있느냐를 다투다가 교회의 문을 닫는 비극을 맞았습니다.중요한 것은 교회가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지 누가 잘 믿느냐? 논쟁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 둘째 적극적으로는 맛을 냅니다.그리스도인의 맛이 무엇입니까? 구별된 삶입니다.그것은 바로 거룩이고 사랑입니다.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이기에 구별되어 사랑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예수만이 소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그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칭찬을 받든지 박해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패에 동화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싫어하든지 아니면 바르고 정직하며 섬기는 삶을 통해 칭찬을 받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소금의 역할에 대해 한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윌로우 크리닉 교회 <빌 하우벨스> 목사는 소금은 우리의 인체에 갈증을 유발시키듯이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령으로 조율될 때반드시 그들 주변 사람들에게 영적인 목마름을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아주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매력적이고 본받고 싶은 삶이 되어야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옆 사람과 이웃에게영적인 목마름을 유발시키는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3.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13절)그럼 어떻게 하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그들 가운데 맛을 내며 나아가 영적인 목마름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까?두 가지입니다.1) 순도 100%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맛 잃은 소금이 종종 나옵니다.지금도 사해 바닷가에 가면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히며 굴러다닙니다.소금이 왜 맛을 잃어버리는가?불순물과 결합되거나 햇빛에 노출될 때 맛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그리스도인이 언제 맛을 잃어버립니까?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맛을 잃어버립니다.세상이 마음에 들어오면 결국 믿음에 파선하고 맙니다.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세상이 들어오면 맛이 변하여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자로 변하고 맙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짝 없는 존재가 되고 나중엔 사람들로부터도 외면당합니다.우리는 순도 100%의 소금 같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먼저 8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워져야 합니다.2) 소금은 자체로서는 별로 사용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고 영적인 목마름을 유발시키려면 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접촉을 해야 합니다.만약 소금 그릇이 쏟아지지 아니하면 단지 식탁 장식용에 불과할 뿐입니다.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영향을 필요로 하는 데에 찾아가 접촉을 해야 진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찾아가 그 속에 스며드는 소금 같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세상 속에서 맛을 나타내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습니다.교회 안에서만 교인이 아니라 직장에서 모임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그런데 만일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13절 [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어떻게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될까?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금을 생각하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소금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바닷물을 통하여 얻는 천일제염이나 물을 끓여 얻는 재제염이 있는가 하면암염(巖鹽)이라는 소금을 함유하는 바위에서 채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바닷물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소금을 얻는데 반하여이스라엘 지방에는 사해 근처에서 나는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얻게 됩니다.암염 속에 들어 있는 소금 성분을 식용으로 하기 위해서는순수한 소금을 추출해야만 하는데 암염 덩어리를 물에 담그면 그 물에 소금 성분이 추출되어 나오고 그것을 반복하고 농축하여 식용으로 사용하게 됩니다.이 때 처음 암염에서 소금 성분을 추출하고남은 찌꺼기에는 점토와 석회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바닥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이것이 맛 잃은 소금입니다.거룩과 사랑이 빠진 신앙은 마치 맛 잃은 소금 같은 신자가 되고 맙니다.염전을 하시던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어느 날, 염전 일을 하다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렸습니다금세 건졌는데, 커다란 가마니 속 소금이 모두 녹아버렸습니다.소금이 물에 잘 녹는 건 알았지만,김장때 배추를 절이기 위해 소금을 물에 녹일 때면힘껏 휘젓고도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었기에 장로님은 매우 의아해졌습니다.그러나 의아함도 잠시,소금은 애초에 바다로부터 취한 것이기 때문에 담수에서와 달리 금세 녹아버린 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그렇습니다.바다로부터 취한 소금은 순전하게 구별되었다가도 바다를 만나면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취한 존재입니다.따라서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 깊음이 필요합니다.항상 세상의 유혹들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자신의 구별됨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4.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왜 빛이 되어야 합니까?(14-15절)세상의 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세상의 빛이란 말은 어두움을 전제하는 말입니다.세상은 어둡습니다.전기가 들어와 밤에도 대낮 같은 세상인데현대의 문화와 정보와 지식이 얼마나 발달되었는데 세상이 어둡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어둡습니다.전례 없이 도덕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이 만연한 세상입니다.왜? 어둡습니까?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4: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복음의 빛이 비취지 아니하는 곳에는 어둡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 주라는 말입니다.아프리카에서 일생을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님 돌아가셨습니다.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된 주민들이 선교사의 묘지에 이렇게 비문을 새겨놓았읍니다.[ 당신이 올 때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이니이다 ]이 세상은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를 원하고 있습니다.삶을 통해 복음을 나타내며 예수님을 보여줄 그리스도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애굽이 요셉을 원했듯이 페르시아가 에스더를 원했듯이 바벨론이 다니엘을 요구했듯이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원하고 있습니다.대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를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이 세상의 빛이 되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구의 희망이 되는 내일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빛이 되더라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듯이 동네를 비취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말 아래 둔다는 것은 등불을 켜서 곡식의 양을 재는 말로 덮어놓으면 사용 기간이 오래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멀리 비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등경은 바로 등불 바침대로서 빛이 멀리 까지 비췬다는 것입니다.여기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자기에게만 아니라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하기 위함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이상을 높은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수준 높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그렇기 때문에 신32: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며 지켜주시고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훈련시켰다고 합니다.왜? 13절 말씀에[ 땅의 더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기 위해서 ] 라고 합니다.뭐가 차원이 높은 삶이고 수준이 높은 삶입니까?바로 남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아무리 최신 유행의 패션을 두르고 호화 빌라에 살면서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지성인이라 해도 남이야 어떻게 되던, 나라야 어떻게 되던, 교회야 어떻게 되던, 자기와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은 졸속 인간입니다.가로등이란 글이 있습니다.가로등, 밝은 대낮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어두워지면 밝게 살아나 밤거리를 밝혀줍니다.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자기 곁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친구처럼, 연인처럼, 희망처럼 빛이 되어줍니다.가로등 같은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가로등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노인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소오 엘리저는 1990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이탈리아 여인입니다.엘리저는 중국에서 선교하던 중에 폐병이 걸려 본국으로 소환되었습니다.그녀는 하나님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이라고 원망하지 않고“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이후 그녀는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중국 선교를 도왔습니다.그런데 추수를 하다 그만 탈곡기에 손이 들어가 오른손을 잃었습니다.이때도 엘리저는“주님, 오른손이 없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기도의 응답으로 엘리저는 양로원을 세웠고 버려진 수천 명의 노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엘리저는 불행한 환경을 극복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을 보냈습니다.이제 우리의 기도도 “왜 나에게?”가 아니라 “주여, 무엇을 원하십니까?”로 바뀌어야 합니다.“주여, 무엇을 원하십니까?”이 기도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라.”진정 우리가 빛의 삶을 살 때이 세상이 밝고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그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5.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16절)16절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발모랄 왕궁에 거하고 있을 때.여왕은 변장을 하고 마을을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어느 날 여왕이 신복 한 사람만 데리고 평복차림으로 궁궐을 빠져나와 길을 걸어서 가게 되었습니다.평복차림의 여왕이 걸어가고 있는 길 앞에마침 한 목동이 양떼를 몰면서 오고 있었습니다.목동 소년은 여왕을 향해서 소리 쳤습니다.“얼른 길을 비켜요. 에잇 바보 같은 할머니 같으니라구!”이 말을 들은 여왕은 그냥 웃음을 지었습니다.깜짝 놀란 신복이 목동에게 달려가서 작은 목소리로저분이 여왕 페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여왕님처럼 차리고 다니야지요 ” 하더랍니다.여왕으로서의 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목동이 실수를 했다는 이야기인데오늘 우리 성도들은 누가 보더라도성도라고 인정할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성도는 성도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성도가 성도답지 않을 때 본인도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왜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그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습니다.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평판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나아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바로 예수를 전염시키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빌 하이벨스> 목사의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들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의 번쩍이는 물결 너머로 보이는 언덕에서 제자들에게 <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공식 >을 가르쳐 주셨다. 그 공식은 바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저들 역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예수 앞으로 나아와 우리와 같이 변화를 받을 것이다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두 농부가 한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한 농부는 교회 집사님이고 다른 농부는 불신자였습니다.그런데 집사님인의 논은 지형상 항상 물이 고여 있도록 된 논이고,불신자의 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불신자는 밤중에 몰래 집사님의 논에서 논뚝을 삽으로 헤치고 물을 논에 채웠습니다.아침에 논에 나갔다가 자기 논의 물이 다 빠지고 옆의 논에 물이 차있는 것을 본 집사님 그 불신자에게 따졌습니다.그러나 불신자는 자기가 물을 끌어간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흘러 들어온 거라고 잡아뗐습니다.집사님은 화가 나서 불신자의 논에서 물을 퍼 밤새 자기 논에 다시 채웠습니다.그런데 그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제가 당연히 취할 권리를 취했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는 왜 정당한 것만 주장하느냐? 왜 네 논의 물이 필요한 이웃에게 스스로 물을 대주지 못하느냐?`집사님은 회개를 했습니다.그날 저녁에 집사님은 자진해서 자기 논의 물을 불신자의 논에 대주었습니다.밤에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나왔던 불신자는 이미 물이 찬 것을 보고 금방 영문을 알아차렸습니다.다음날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롬12:20절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면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즉 사랑과 친절로 얼굴을 뜨겁게 하라는 것입니다.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구원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공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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