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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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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헬라철학에서는 말씀 이외에 이성, 논리, 계시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헬라어 표기는 로고스( )입니다. 로고스에 병행하는 히브리적 개념은 다바르( )입니다.
다바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창 1:1). 하나님은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3).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도모하시고자 할 때는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것을 진행시키시고 성취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행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항상 함께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생명과 창조입니다. 그 말씀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로고스( )는 기독론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주제는 공관복음의 주제와는 상이 합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The Kingdom of heaven)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입니다. 그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영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Ⅰ. 그 말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 )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화육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때 결코 인간의 한계를 넘지 아니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육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인간들이 가지는 감정과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말입니다.

Ⅱ. 그 말씀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 주신 예수님입니다.

본문 1장 14절에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는 말은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 )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이 무엇입니까?
구약적인 의미의 영광은 쉐키나(Shechinah)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의 영광은 독사(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기임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시편 90편 16절에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출애굽기 16장 10절에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봉헌되던 때 열왕기상 8장 11절에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그 자체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지 아니하시고 신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Ⅲ.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입니다.

본문 1장 14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1) 충만한 은혜입니다.
여기 "은혜"( )는 그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속에는 충만한 은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여기 은혜와 진리는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사무엘하 2장 6절에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은 동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동일합니다. 충만한 은혜가 가져오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1)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2) 믿음과 구원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5절에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7절에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3)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4)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5) 성령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충만한 은혜가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에게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은혜를 주심에 모자람이나 부족함이나 인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2) 충만한 진리입니다.
여기 "진리"( )는 거짓과 반대되는 참을 말합니다. 이 진리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 진리가 은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은 가득 차서 넘쳐흐른다는 말입니다.
'충만하다'는 형용사 플레레스( )는 은혜와 진리가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넘쳐흘러 나와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여 역사(work)한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가 곧 충만한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2) 성경이 곧 충만한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학문을 가리켜 초등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초등학문은 항상 배우나 진리지식에 이를 수 없는 학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7절에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과학지식은 언제나 초등학문입니다. 특별한 지식 곧 성경은 진리 지식입니다. 전자는 일반계시의 지식이고 후자는 특별계시의 지식입니다. 따라서 일반계시(과학)의 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고상한 지식 특별계시(성경)의 지식이라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9절에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솟아나는 샘에다 비유했습니다.
본문 1장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은혜위에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곧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 은혜는 넘쳐흐르는 충만한 은혜로 충만하거나 거부될 수 없는 일방적으로 임하는 수직적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어린 아이들을 깨우치는 몽학선생의 기능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고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이 주어진 것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온 것이라'에서 '온'은 발생한다는 뜻의 헬라어 에게네토( )입니다. 이 단어가 기노마이( )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임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임하여 준 것입니다. 율법은 돌에 새겼으나 은혜와 진리는 마음에 새겼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율법은 복종을 강조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순종의 능력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자신의 피로 청산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결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이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대면했으나 하나님의 본체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 본질이라는 표현의 최고의 수사가 품(the bosom)입니다. 예컨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간다(Carry a baby in one s bosom)는 말은 모든 교제와 행동의 일체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말씀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지금까지 사탄의 제 1의 공격 목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입니다. 사탄의 이른바 기독론에 대한 공격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 강도가 더해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견(異見)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복입니다.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시에 카타콤(지하예배당)에 살던 성도들 사이에서 암호로 그려진 물고기에는 잌듀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구주라는 말입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 )
예수 신앙고백만큼은 바르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주의 사자들을 자기백성에게 보내시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의 종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병행해서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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