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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헌신으로 (단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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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예배는 헌신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헌신예배에는 당연히 헌신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야지 엉뚱하게 회개라든지 찬양이라든지 다른 말씀을 드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헌신에 대해서 말씀을 준비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이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헌신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보를 보니까 말씀의 제목이 '어떤 헌신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헌신예배를 많이 드려봐서 아시겠지만 말씀의 요지는 한결 같습니다. '헌신하자' 입니다. 말씀의 내용을 들어보지 않고 제목만 들어봐도 마음문이 닫혀 버립니다. 헌신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헌신해서 피곤한 삶을 살기보다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에게도 헌신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이제는 말씀을 전하는 자도 헌신에 대해서 언급하기가 부담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헌신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밤 10시에서 11시에 방영되는 드라마 시청에 헌신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TV 시청에 헌신된 분들입니다. 공부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일컬어서 우리는 책벌레라는 명칭을 수여함과 함께 공부함에 헌신되었다고 말합니다. 살을 빼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일컬어서 우리는 다이어트에 헌신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자녀를 돌보는 일에 헌신된 분들도 있고, 오직 돈 버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딘가에는 분명히 헌신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금은 덜 부담스럽지 않으십니까? 헌신하라고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무엇엔가 헌신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에 헌신되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헌신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요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 시대에 강요한다고 해서 헌신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면 이 시대가 변했을 것입니다. 단지, 소망하기는 이 시간을 통해서 헌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헌신되어 있는 사람 다니엘이 나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헌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는 무엇엔가 헌신되어 있기에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에 헌신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그는 무엇에 헌신된 사람이었습니까? 다니엘은 TV 시청에 헌신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돌보는 일에 헌신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에 헌신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나라의 총리로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헌신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그리스도교에서 소명에 응하여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명에 응하여 몸을 바치는 것. 다니엘의 소명은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환관장 아스부사스에게 명령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중에서 쓸만한 인재를 뽑아서 훈련시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통해 다니엘이 포로되기 전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는 귀족의 자제였을테고 성경학자들은 그가 유다 왕족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니엘은 포로되지 않았더라면 유다에서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니엘을 향한 소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가 유다에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나라의 포로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나라에 포로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응해서 몸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헌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처음을 보니까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2절 하반절을 보니까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리오왕의 소원은 바벨론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을 120개로 분할해서 방백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120명의 방백들 위에 3명의 총리를 두었습니다. 120명의 방백들은 3명의 총리들에게 자신들의 직무를 보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리오왕은 그러한 통치방식으로 바벨론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일에 다니엘이 사용되어졌습니다.

  느부갓네살왕 때부터 바벨론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투자했었고, 이제는 투자한 본전을 거둬들이도록 그 투자한 대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일에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헌신되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직무를 다하는 일에 헌신된 사람입니까?

  저는 헌신예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좋아하고 싫어하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한국교회에서 소위 헌신예배라고 하는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제 자신은 탐탁치 못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헌신의 뜻을 살려서 진정한 헌신으로 나아가며 감사로 드리는 헌신감사예배라면 어찌 싫어한다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우리가 드리는 헌신예배의 의미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 시절에 중고등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헌신예배 인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는 헌신예배의 전부는 이러했습니다.

  헌신예배로 드리는 그 날이 특별히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일단은 글자를 써붙입니다. 어느 기관 헌신예배라고 쓰고 날짜도 새겨서 게시합니다. 그리고 회장이 꼭 예배 인도를 합니다. 그리고, 임원들이 순서를 맡아서 중보기도와 봉헌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임원들이 나와서 특송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차렷, 경례라고 하면서 회중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특송이 끝나면 박수를 쳐줍니다. 특송을 잘 했으면 노래자랑대회에서 좋은 기량을 보여준 팀들에게 박수를 쳐주듯이 뜨겁게 박수를 쳐줍니다. 그리고, 평소의 주일 저녁 예배에는 헌금을 드리지 않는데,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면 꼭 헌금바구니를 돌립니다. 헌신예배인지도 모르고 참석했던 분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면서 천원짜리 한 장 꺼내서 헌금바구니에 넣습니다. 그날 헌금이 얼마나 드려졌는지 헌금계수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임원들이 목사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거나 강사 목사님께 대접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예배를 마칩니다.

  예배 어느 곳에도 헌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있다면, 말씀 전하실 때 헌신하라고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만 있을 따름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마친 후, 어느 때에도 헌신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헌신예배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헌신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헌신예배를 저는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헌신예배라고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보시며 말씀하실 것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이사야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3년 3개월쯤 전에 이 강단에 처음으로 섰던 기억이 납니다. 기억하지는 못하시겠지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아름다운 꽃향기가 아니라 땀냄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역겨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헌신예배로 드린다고 화장도 하고 고운 옷도 입고 향수도 뿌리고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그런 향기가 아니라 우리 맡은 사명의 자리에서 우리의 직무를 다하느라 땀흘리는 그 땀냄새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화제로 드리는 향기보다 우리의 직무를 다하며 흘리는 헌신의 땀냄새를 아름다운 향기로 흠향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직무를 다하느라 흘리는 땀방울이 있습니까? 오늘 이 헌신예배를 드리기 전에 우리의 직무를 다함으로 헌신하였습니까? 이 헌신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 헌신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헌신하셨습니까? 헌신 예배로 드리는 이 시간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헌신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마친 후에는 무엇에 헌신하려고 하십니까? TV 시청하는 일에 헌신하시렵니까? 헌신예배를 드린다면 그래도 뭔가 헌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작은 일에나마 헌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신예배를 준비함에 있어서 기도로 준비하는 과정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에 헌신에 대한 다짐과 고백과 헌신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신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면, 예배를 드린 후에 헌신의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성전 곳곳에 빗자루질 한 번 걸레질 한 번이라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내게 맡겨주신 사명과 다짐한 헌신에 대해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절 전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라는 구절을 보게됩니다. 민첩하다는 말은 탁월한, 현저한, 뛰어난, 특심한, 비상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한 마디로 아주 잘했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다함에 있어서 현저하게 탁월하도록 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요한복음 맨 마지막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의 말씀이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요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말씀도 그렇습니다. '뛰어나므로'라는 결과를 나타내주는 다섯 글자만 있습니다. 뛰어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요약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생략된 과정을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다니엘의 상황을 시대와 장소를 바꾸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소년이 살던 나라가 망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말을 합니다. 대통령의 명령으로 3년 동안 영어와 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배우는 과정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3년 후에 왕의 앞에 섰습니다. 그 지혜와 총명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장관들보다 열 배나 나았습니다. 장관들 중에는 하버드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법학과 경제학과 모든 분야에서 정상을 달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보다 10배나 더 나은 줄로 여김받기까지 어떠한 과정들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지혜를 주셨으니까 그랬지 뭐.'라고 덮어놓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의 삶에 대해서 '바울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뭐.'라고 덮어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놀라운 지혜와 총명을 소유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능력이었다고 덮어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흘렸던 땀과 피를 묵상하면 부담스럽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볼 때에 그냥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덮어놓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이 아무에게나 임합니까? 수능시험을 보기까지 공부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이 임해서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까지 다니엘은 열심히 공부하였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처음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언어도 잘 알지 못하는데 서투른 언어로 바벨론의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바벨론 학문을 연마하며 그들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남들과 같은 시간에 잠 잘 수도 없었습니다. 코피도 쏟았을 것입니다.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는 탁월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헌신자의 모습입니다. 한 해 동안 한 기관의 임원으로 헌신하기로 하셨습니까? 맡은 직무에 민첩하셨으면 합니다. 다른 일로 인해 분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직무로 인해, 그 직무에 헌신함에 민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탁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한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그 모습을 분명히 눈여겨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마침내 탁월하게 하실 것입니다.

  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다니엘의 헌신은 왕이 보기에 흡족한 헌신이었습니다. 왕은 다니엘을 세워서 자신의 제국 전체를 다스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사위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아들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한낱 약소국의 포로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헌신이 얼마나 마음에 흡족하였는지 이방 나라 제국의 통치자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흡족함을 주는 헌신이었습니다.

  앞선 말씀에서 헌신자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는 헌신자의 결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그 직무를 다함에 있어서 탁월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으로 임하는 헌신자 다니엘의 헌신의 자세. 그 헌신의 자세를 통해 그가 헌신되어졌을 때 헌신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 결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만족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결과가 맺어졌습니다. 헌신자는 결과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헌신자로 등장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퇴장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헌신할 수 없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헌신의 결과를 생각할 줄 안다면, 반드시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의 헌신으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나의 헌신을 통해서 내가 속한 기관이, 내가 속한 교회가, 내가 속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어린 아이의 헌신으로 장정 5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의 역사가 있었지 않습니까? 한 수녀님의 숭고한 헌신의 삶이 인도 땅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한 흑인 목사님의 희생으로 미국땅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시대의 역사는 헌신자를 통해 역사의 지평이 새로와져 왔습니다. 그 분들이니까 할 수 있었다고 또 덮어놓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헌신되어 졌을 때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헌신의 위력입니다.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헌신이라고 한다면,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드려졌다면 천하가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헌신으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헌신으로 내가 속한 기관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헌신이 어떤 선한 결과로 후대에 어떤 영향력으로 남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4절입니다.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최고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서 최고의 학문을 거쳐 그 자리에 오른 그들을 제쳐 두고 굴러온 포로 하나가 자기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소할 틈을 얻고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틈과 허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가 충성되어서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헌신자 다니엘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산 삶이었습니다. 충성되게 점도 흠도 없이 일했던 그 충성의 대상은 다리오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여기에서 헌신의 방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신함에 있어서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헌신은 무엇을, 누구를 위함인가?'하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방향이 하나님이라고 덮어두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전에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은 하나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지팡이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분석해 봤을 때, 우리의 기도가 그러하다면 인식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정말 우리의 헌신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맞습니까? 맞다면, 왜 사람 때문에 낙망합니까? 왜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를 내팽개칩니까? 우리의 헌신의 방향이 진정 하나님을 향한 것이 맞다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도, 남이 나를 공격해 오는 것도, 인간적인 상처도, 그 어떤 것도 문제됨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이 그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면 거기에 만족과 족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헌신의 방향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헌신의 방향은 분명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는 헌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직무를 다함에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탁월하기까지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헌신자였습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과 사람에게도 기쁨과 흡족함을 주는 선한 열매가 있는 헌신이었습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었기에 흠과 점도 없는 순수한 헌신이었습니다. 각 기관 연합헌신예배로 드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헌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헌신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직무를 다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직무를 감당함에 최선의 노력으로 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헌신으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헌신은 무엇을,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줄로 압니다. 지금까지 쉰 두 개의 물음표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쉰 두 번에 걸쳐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마련된 답은 없습니다. 정답도 없습니다. 헌신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면서 찍을 마침표만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을 더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주셨던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어떤 헌신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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