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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쉼표가 있는 인생을 위하여 (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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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가 있는 인생을 위하여(창 2:1-3)

최근에 읽은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행동심리학자인 짐 로허(Jim Loehr)박사는 재미있는 관찰을 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톱 랭킹의 프로테니스 선수그룹과 하위그룹의 선수들에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관찰 연구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세계적인 프로선수들의 경기장면이 담긴 테이프와 또 일반선수들의 경기장면을 자세히 그리고 여러 번 보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경기 중에는 선수들에게 보여주는 별다른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게임과 게임 사이에 두 그룹의 선수들은 뚜렷하게 보여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대개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최고의 프로선수들은 게임과 다음 게임 사이에 독특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개나 어깨를 추수르거나, 눈을 지그시 뜨고 어느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고르거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반면에 성적이 낮은 선수들에게는 전혀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짐 로허 박사는 최고의 프로선수들에게 원격 심전도 측정 장치를 달게 하고 실험했을 때에 그들의 심박수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즉 경기 중 포인트와 포인트 사이 즉 16-20초에 해당하는 그 시간에 심박수가 분당 20회 정도로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탁월하게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성적이 낮은 선수들은 별다른 습관도 없고, 심박수도 경기 내내 높은 수치를 나타내었습니다. 최고 프로선수들은 더 효과적으로 휴식하고 다음 포인트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비결을 갖고 있었습니다.

잘 쉬지 못한 선수는 피곤이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나 화 실망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심장박동수가 늘어나고 근육의 긴장도 더해지면서 경직됩니다. 자연스럽게 정신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없게 됩니다. 잘 쉰다는 것은 회복의 시간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며, 좋은 미래를 준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함으로 우리에게 안식에 대한 것을 보여주셨고, 이것은 인간에게 안식일을 만들어주셔서 온전한 쉼이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쉰다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의 일일뿐 먹고살기 바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의미를 말씀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안식이 필요 없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노동의 의미를 말씀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1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고 되어있고, 2절에는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 째 날이 이를때에 마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룬다’는 의미의 단어 ‘칼라’ 라는 단어는 ‘성취하다 마치다’ 라는 의미로 어떤 일을 완전히 마친것을 의미합니다. 3절에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는 일이 다하므로.. 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안식하면 피곤하니까 쉰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어 칼라라는 단어는 피곤하고 지치다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안식은 노동을 마친 사람에게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안식의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그 쉼의 달콤함과 축복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 하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다 마치시고 이루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노동의 의미를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노동은 안식과의 관계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일을 하시고 난 후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다’ 라는 의미의 ‘라아’ 는 단순히 보여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감찰하다, 진찰하다, 방문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보신 것을 말하고, ‘좋다’라는 ‘토브’ 라는 단어는 감정적으로 ‘좋다’라는 의미에서 선하다 충실하다 아름답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과 목적과 의도가 충분히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만족하셨고 기뻐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삶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목적이 이루어졌는지를 매일 살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루를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노동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개념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일이 싫습니다. 노는 것이 좋습니다. 땀 흘리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나 시대에 향락사업과 도박에 대한문제는 바로 인간의 타락한 노동에 대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노동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스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성화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 가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5:27에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10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속에 내가 얼마나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을 이루었는지를 돌아보며 노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참된 안식의 기쁨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 ‘하루를 잘보낸 사람이 평안한 침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평안한 일생을 보낸 사람만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한 자에게 주시는 이 안식의 축복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회복해야 할 마음이 있다면 이 노동의 기쁨과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의 확인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주께서 주신 노동 후에 안식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의 본질과 안식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어 나오는 구조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노동과 안식의 의미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3:22에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고 말씀 합니다. 즐겁게 일하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일들을 이루어나가는지를 살펴보며 주님이 주신 참된 안식의 기쁨과 선물을 누리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안식의 축복됨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3절 말씀 전반부에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하시면서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복되게 하는 날이며 구별된 날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의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축복을 축복되게 여기고 또 그것을 통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의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복이 복되게 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말씀 하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복은 ‘바라크’ 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즉 성공 번영 다산과 관련되어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 복은 다섯 째 날에 복을 주셨는데 창세기 1:22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복의 구체적인 것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즉 ‘번성하라’ 라는 의미는 ‘넘치다 풍성하다’라는 것으로 광주리에 과일이 넘치듯 수확이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충만하다’ 라는 말은 ‘살지다 풍부하다 편만하다’ 라는 것으로 온 땅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생육하다라’는 말은 ‘창대하다’라는 것으로 기름진 땅에서 햇빛을 충분히 받아 잘 자란 과목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상태를 뜻합니다.

‘거룩하다’라는 카다쉬는 ‘깨끗케 하다 구별하다 드리다 ’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의미는 흠과 티가 없이 깨끗하며 다른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는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것이 복이 되게 만드는 날이며 또한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날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안식이라는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탐욕이 타락한 인간 속에 자리잡음으로 인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더 만족한 것을 얻으려고 쉬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눅 12:13-21에 형과 재산문제로 다투며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한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탐심이 주장하게 될 때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진정한 축복의 사람들 즉 가족과 이웃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도 깨닫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합니다. 노예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일과 일 사이에서 자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안식일을 명하셨습니다. 출애굽이 외적자유의 상징이었다면 안식은 내적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하라고 하실 때에 이스라엘백성이 매일 먹는 만나가 이틀 치를 거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쉼을 저들에게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이것을 제정하셔서 쉬지 못하는 노예근성이 박힌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축복이 축복되게 하기위해서 완전한 안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종이나 나그네 육축 들짐승 토지까지 모두 쉬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안식을 통해서 생태계와 공동체의 사회윤리의 문제까지도 참 쉼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얽매임에서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위해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삶의 원리를 지킬 때에 우리의 삶은 진정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되게 주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누리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족이 무너져 내립니다. 건강이 상합니다. 우리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웃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의과대학 연구팀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웃음에 대해 연구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20번으로 감소된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자기의 탐욕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정말 축복 되는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연구기관에서 인간이 걱정하는 일에 대한 것을 분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결국 인간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날이 더욱더 복된 날이 되게 하기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을 주저앉게 만드는 죄의 짐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안식을 만드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이 ‘우리 영혼이 당신의 품안에 돌아가 쉴 때까지 나에게 결코 평안이 없었나이다’ 참된 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 안에서 지낼 때에 주어지는 참된 축복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은 쉴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쉰다고 하더라도 참된 안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바쁜 삶을 내려놓고 참된 안식을 취할 때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구별된 삶의 모습 속에 참된 기쁨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이라는 책속에 공지영씨는 자기가 옳다고 그리고 맞다고 달려온 인생의 길을 멈추어 서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수도사들의 삶을 돌아보고 난 뒤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신께서 나를 위해 날을 개게 해주시고 바람을 잠자게 해주시며 결국 이 모든 하늘과 땅, 우주만물을 지어주셨음을, 나 공지영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나를 위해서... 나는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시고 동물까지도 창조하시고 당신 스스로 하나님보기에 참 좋으셨다 해 놓고 이 골치덩어리 인간을 만들었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왜 아이를 낳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듯, 그렇게 알 것 같았다. 하나님은 나를 기다려 주신 것이다. 18년 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서 당신이 가진 전지전능의 능력을 오직 기다리는데 사용하신 것이다. 왜 사람을 지으셨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미워하며 오래도록 헤매어 다니던 한 사춘기 소녀의 영혼에게 하나님은 이제야 대답을 주신다. 이렇게 오래도록 헤매어 다닌 후에야. 이제 마흔이 다 된 이 늙은 소녀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하나님 저를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여러분 우리가 멈추어 서서 진정한 주님 안에서 안식의 의미를 찾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탐욕과 욕심으로 뭉쳐져서 고상함과 정당함으로 포장된 그것이 아닌 진정한 우리를 축복하시기위해서 주신 귀한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 자연, 그리고 바람을 느끼는 감각, 흐르는 땀의 의미, 그리고 웃음, 때로는 눈물, 사랑, 이별, 아픔까지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생활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안식을 통해 새 힘을 주심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은 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본문의 마지막인 창세기 2:3절에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라고 마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사역을 열어 가시는 것을 봅니다. 세상을 섭리해가시고, 구속해 가시는 놀라운 일들은 바로 안식 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출애굽기 31:17에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안식일에 대한 의미와 교훈을 주시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이 표현을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그가 숨을 돌리셨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쉬어 숨을 돌렸으니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을 영어성경에는  but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was refreshed 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쉬셨다 그리고 새롭게 되었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피곤하셔서 쉬심으로 회복이 되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것과 쉼에 대한 것을 표현할 때에 쉼은 새로운 일을 위한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력은 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원리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문화신학자는 인류문화의 발전은 밝고 맑은 날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가오고 번개와 천둥이 쳐서 일을 하지 못하는 날에 인간은 동굴 속에 머무르며 일을 쉬었습니다. 그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저들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바로 창조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식자체가 아니라 안식에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내가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안식을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한 놀이는 우리를 다시 회복시킵니다. 볼링의 역사를 아십니까 ?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여유를 갖기 위해서 하던 공놀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건강한 놀이는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지만 잘못된 쉼은 우리를 더 피곤하게 만듭니다. 어떤 분은 하루종일 TV만 시청하면서 휴일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시편 23편을 이렇게 바꾸어서 노래한다고 합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편안한 자세로 앉게 하시고, 푹신한 소파에 눕게 하시는 도다. 내 육신을 기름지게 하시며 그의 이름을 위하여 아무 할 일이 없게 하시는 도다. 내가 비록 여가의 시간을 보낼지라도 무엇을 할까 염려하지 말 것은 그가 나로 하여금 해야 할 모든 일들을 잊게 하시고, 모든 재미거리로 인도 하시는 도다. 세상의 잡다한 것을 무수히 알게 하시고, 모든 자극으로부터 무디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게 하시며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가시니 내 잔이 텅텅 비어가나이다. 그런대로 재미있고 흥미 있는 일들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TV옆에 영원토록 거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하게 하는 도다.

이렇게 쉰다면 이것은 다음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피곤으로 다음 일까지 어렵게 되는 것을 봅니다. 활동과 휴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개념은 인류최초로 운동선수 훈련 매뉴얼을 쓴 그리스의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투스(Flavius Philostratus, A.D. 170-245)인데 러시아 스포츠 과학자들이 1960대에 이 개념을 올림픽 대표선수들에게 적용시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신체가 특정한 활동을 하고 나면 반드시 생화학적인 에너지를 보충해주어야 하는데 이때 소비된 에너지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몸과 영혼의 에너지발전소에서 저자는 ‘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잘 관리해야 새로운 삶에 효과적이며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영적인 것을 충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저를 돌아보고 살피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골고루 에너지를 회복하지 않으면 새로운 일에 창조적으로 임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발견 했습니다.

너무 집중하고 신경을 과도하게 쓰게 되면 목회 속에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예민해지고 민감해집니다. 분노가 자주 쌓이게 되어서 작은 일에도 표현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 마음속에는 끓어오를 때가 많습니다. 생각이 중단 되는 것 같습니다.

해외유학생들을 위한 집회 즉 코스타를 참석하는 것 중에 그 분들을 위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 격려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사역의 현장을 떠나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나누는 기회를 통해서 저 자신이 많이 충전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훨씬 여유 있게 되고 어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효율성 있게 모든 것을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면 쉼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저도 워크홀릭에 걸린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역을 하였습니다. 영혼이 달린 일입니다. 생명이 걸린 사역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효율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번 정도 입원을 하고 회복을 경험하면서 쉰다는 것은 더 이상 죄악이나 불성실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의 기간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제사장들 850명과 영적 싸움을 벌이고, 또 비가오기를 탈진하리만큼 간절히 기도하고, 비가 올 때에 아합왕보다 더 빨리 달려 이스르엘까지 간 이 엘리야는 몹시 지쳤습니다. 이때 이세벨왕후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에 그는 이 협박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쉽게 무너졌습니다. 음식을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떡과 물을 먹이고 어루만져 주시면서 호렙산 동굴에서 쉬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육체적으로, 마음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었을 때에 새로운 사명을 맡기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 나름대로 진정한 회복을 위한 안식이 무엇인지 찾으십시오. 미래를 준비하는 그 안식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균형 있게 쉬고 회복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더 멀리, 더 복되게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시작할 때 촛불을 밝히고 촛불 앞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촛불 앞에서 저들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불어 주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가족끼리 돌아보며 축복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가족끼리 삶을 나눕니다. 모든 일로부터 쉬게 됩니다. 그리고 촛불을 끄는 것으로 안식일을 종료합니다. 그런데 촛불을 끄기 전에 침묵기도를 합니다. 다시 하루를 돌이켜보고 또 잠시 밝아올 내일을 생각하면서 조용한 침묵기도를 합니다. 촛불을 끈 다음에도 그들은 잠시 안식 속에 그대로 앉아있습니다. 그날 하나님이 주신 쉼과 나눔을 육체로 영혼으로 다시 음미하며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 예배가 일이 아니라 진정 축제가 되고 쉼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주일이 바로 육체의 삶으로 분주해서 영혼과 거리가 멀어졌다면 다시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는 참된 평안과 샬롬의 축복이 되도록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 주일의 삶속에서 성실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안식의 축복을 음미하며 축복으로 주신 모든 것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공동체의 지체와 사역을 돌아보며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기쁨이 넘치는 그런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안식하심으로 안식의 의미를 주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돌아보며 진정 축복이 축복으로 고백되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린 너무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최선을 다했지요. 주님! 그런데 우리가 찾고 목적하는 것은 혹 이루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월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시간을 너무 잃어버렸습니다. 건강도 탈진하고 잃어버렸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도 내 주위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 풍성하기 위해서 살았는데 왜 이렇게 초라하게 되었는지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주님 앞에 안식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또 다시 시작될 다음 시간을 위하여 오늘 새롭게 채워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풍성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고 주님 우리 육체가 쉬며 우리가 정서적으로 서로가 격려하며 우리의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가 참 바른 지식과 진리를 우리 마음에 새기며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주의 임재하심을 요청하는 균형 잡힌 믿음의 자녀들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찬양하며 주의 은총 앞에 살아가는 주의 자녀의 즐거움이 우리가운데 넘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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