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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의 이유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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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 필리핀의 국민 소득이 170달러 태국 220달러일 때 한국은 76달러였습니다.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는 인도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후진 국가였던 것입니다. 국가 경제를 재건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지만 한국에 돈을 빌려주려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고 일억 사천만 마르크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서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6,000명이나 몰렸습니다. 자격요건은 고졸 출신이었으나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습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 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일부러 거친 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억 만리타국 땅 서독에 도착한 광부들은 지하 1000m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열 시간이 넘는 고된 작업을 했습니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 또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딴 지역 병원들에 뿔뿔이 흩어 진채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국내 사정은 더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들은 서울 간 자식들의 학비를 보태 주려 아끼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여공들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가발과 공작품을 만들었고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으로 거두어들인 쥐 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라는 제품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했습니다. 1965년 우리나라는 수출 일 억 달러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세계가 놀랐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세대가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 목숨을 담보로 월남에서 싸운 용사들과 뜨거운 중동지역에서 수고한 산업 역군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과거의 고통을 즐거이 참고 견디어온 앞선 세대들,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삶의 전 영역에서 풍요를 누리고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과거가 없었다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우리에겐 현재도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디딤돌 삼아 미래를 향해 나가는 열린 자세 선배를 존경하고 따르며 후배를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세대 간에 아름다운 동역으로 이제 새 역사를 창조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셨던 영상은  불과 삼사십년 전에 우리 땅에 보편화 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과거는 오늘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머무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비극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과거의 선택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며 동시에 오늘의 선택은 내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운명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와 과거 속에 끊임없는 대화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결단하며 선택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선택이 나옵니다. 앞길이 창창하며 미래가 보장 된 젊은이들이 죽음을 선택합니다. 저들이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요? 이들이 걸어온 여정을 살펴보면 저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더욱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패망하여 희망이 없는 나라에서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중앙관리로 등용되기 까지 저들은 너무나 힘든 고역의 삶을 살았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부귀영화를 즐길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된 삶이었는데 그들은 왜 죽음을 선택하였을까요?

오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비참하게 멸망한 나라의 젊은이들로 많은 사람들 중에 뽑혀서 바벨론의 책임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총명함과 성실함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당대의 영웅이었던 느부갓네살 왕도 이들을 총애하며 중앙 부서에 저들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시기한 동료들과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을 섬기는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절하게 했습니다. 절하지 않는 사람은 법으로 사형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 사람이 결코 절하지 않을 것을 알았던 그들에게 있어서 이들을 곧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저들의 예상대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은 결국 절하지 않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저들을 사랑하는 느부갓네살 왕이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 신상에 절을 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그때 저들은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쉽게 죽음을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느부갓네살 왕과의 인간관계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식민지의 청년을 데려다가 총애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합니다. 귀하게 여깁니다. 이 세 청년도 왕의 배려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랑의 은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국정원 간부를 지냈던 호남지역의 한 대학총장이 자기가 섬겼던 국정원장의 결정적인 범법행위를 진술하고 자신의 어려운 심정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해 버린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인간관계의 배신은 그토록 우리에게 부담과 어려움을 주는 일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적국의 왕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는 문학가요 건축가요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대국을 다스리는 영웅으로서의 그 권위와 품위 그리고 존경할 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들을 오늘 이 모습으로 만들어준 느부갓네살 왕과의 관계를 깨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왕이 이 세사람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집어넣겠다고 한 이유가 뭘까요?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기에 증오도 더욱더 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간관계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저들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할 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바벨론에 와서 지금까지 너무나 고생하며 얻은 지위와 삶의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프리카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사법시험 합격해서 검사나 판사가 되어서 안락하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입니다. 아직 젊습니다. 미래가 넓게 열려있습니다. 앞으로 자기들에게 열려지는 미래는 장밋빛처럼 밝고 아름답습니다. 포로에서 고위관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진급을 하게 되었습니까? 요즘 고위공무원들의 삶을 보면 너무 안쓰럽습니다. 자기 삶을 얼마나 절제하는지 모릅니다. 사생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절하는 것과 바꾸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죽음을 선택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미래가 자신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벨론에 잡혀온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 왕궁에서 이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이지만 행정적인 도움과 법적인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민족과 이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신 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됩니다. 제대로 교육받고, 경험과 경륜을 쌓은 사람이 없으면 나라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몸은 자기 자신의 몸뿐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인하여 시작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선택할 것입니다. 수없는 선택의 연속 속에 이루어진 삶, 오늘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이 젊은이들의 정말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기나라의 과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비극역사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패망의 원인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역사와 정치와 철학과 수학 등 학문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분석력과 이해력이 탁월합니다. 자기 동기들보다도 무려 십 배나 지혜롭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 학문에도 능통합니다. 아마 왕궁에 비밀문서를 통해서 각 나라가 멸망에 대한 이유에 대한 정보 당국의 분석들을 그들은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벨론의 절대적인 군사력도 있지만 패망한 많은 이유 중에 몇 가지를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패망원인을 외교의 실패에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패망의 표면적인 이유는 애굽과 바벨론과의 외교상의 착각과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들이 하나 되지 못하여 내분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조정에는 바벨론파와 애굽파 그리고 앗수르파가 서로 나누어져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러한 분열과 다툼의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단합해야 하는데 서로 흩어져서 싸우고 나누어지는 그 모습은 바로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패망의 원인을 거기서만 찾지는 않았습니다. 또 하나 패망의 원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숭배 한 것에 있었습니다.

다니엘 9장 5절부터 6절 까지 보면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11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음 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것, 하나 되지 못한 것도 중요하지만 주께 범죄 한 것이 패망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망하고 민족이 망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잃어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들 나라의 패망원인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버리라고 하는 요구 앞에 또 다른 멸망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패망의 원인을 알기에 그것을 피해 가려 합니다. 피해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죽음이라도 그들은 선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역사의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이 민족의 비극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학문적으로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주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반역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이 바로 패망과 멸망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주의 계명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 자신과 우리 민족이 비극을 겪었던 사실을 바로 인식한다면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멸망을 위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비록 죽음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그 말씀에 근거해서 이민족과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다시 멸망의 역사를 써가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의 원인을 모르는 사람만큼 무지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임의로 해석하는 사람만큼 무식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바른 선택의 기준은 지난 날 우리 삶의 희망에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하였습니다.

역사의 섭리 자가 하나님인 것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자신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회복 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절대 신뢰가 저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 왕의 입술의 한 마디에 의해서 자신의 목숨이 없어질 것을 저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 자신들의 모습과 이 나라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16절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합니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지 인간에게, 권력에, 느부갓네살 왕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의 미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미래는 무엇에 의해서 결정됩니까? 오늘 여러분의 미래는 돈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지식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의사와 약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인간관계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죽고 사는 것은 바로 나와 내가 처해 있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이 믿음의 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오늘 내 삶과 미래는 하나님께 있다는 그 고백을 우리 입술로 드릴 때 더 이상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그 미래를 열어 가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저들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직장 등 삶의 현장에서 어려운 일들을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만이 내 삶을 계속해서 몰아쳐 올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 나의 미래는 당신에게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환경 속에 있지 않습니다.” 라고 미래에 대한 절대 주권을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에게 팔려서 이방의 나라로 갑니다. 이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실하고 진실했던 삶의 결과는 모함으로 인해서 감옥에 가게 되는 절망적이 상황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좌절이 요셉의 주변을 맴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삶이 당당하고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요?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미래는 나의 노력이나 형들 ,바로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나의 미래는 하나님에 달려있음을 알았기에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어 주셨고 팔려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의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주인입니다. 주님은 주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함께 드리며 믿음으로 담대히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6월 14일부터 17일 전남 광주에서 열린 남과 북이 함께 참여한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전해지는 소식들을 들으면서 저는 적지 않게 절망했습니다. 저들만의 잔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화합의 축제가 아니라 분열의 축제라는 것, 그 중에서도 저로 하여금 가장 절망케 하는 것은 남측의 참가 단체 중에 하나였던 남한 대학생들 모임에서 발표한 성명이었습니다.  ‘6.15공동선언의 탄생은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여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철의신념과 비범한 예지, 뛰어난 영도력이 낳은 빛나는 결실이며 그 고귀한 결정체이다. 미국의 횡포한 간섭과 방해책동을 저지 파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화해와 단합, 통일은 고사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없다.’

북한에서 만든 성명이 아니며 남한의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이 만든 겁니다. 비록 소수의 의견과 관점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분명한 현실을 보면서 이런 성명을 발표한 이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보고 있는 정부도 걱정을 합니다. 우리 미래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도 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고백을 우리는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북한에도, 일본에도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이 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에 우리의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실 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뿐이지  젊고 배웠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민족의 역사를 잘못된 핸들을 붙들고 걸어가는 저들에게 맞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이 민족이 함께 열방을 향하여 뻗어나갈 수 있는 그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지금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다.’하며 한동안 깊은 묵상에서 위 고백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젊은 세 청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마저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절망시키고 낙담시키는 크고 작은 일 가운데서도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삶의 선택과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셋째,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현재에 대한 믿음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였습니다. 17절 18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건지실 것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저들 속에 있었습니다. 먼저 많은 우상숭배자들 사이에서 건져 내실 때 하나님의 위상이 분명히 세워집니다. 또 하나는 느브갓네살 왕이 “너희를 내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라고 도전합니다. 하지만 그 도전을 한꺼번에 침묵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유로 세 친구를 구출해 주실 것을 그 자신들은 확신했습니다. 마치 갈멜산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울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태우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내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신앙입니다.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 결과에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내 뜻대로 내 예상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삶에 주인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저가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에게 유일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할 때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것을 히브리서에는 그가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이 이삭을 죽인다 할지라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분명히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그 확신, 그것이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기 위한 칼을 드는 자리에 까지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이 얼마나 조건 적입니까? 이렇게 축복하시면 갚겠습니다. 이렇게 들어주신다면 나도 이렇게 응답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을 ‘그러므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모습은 뭘까요?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결단하며 내 삶의 선택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삶속에 어떠한 어려움과 손해가 온다할지라도 사람이 이것이 아니라고 얘기 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의 결단이 내게 세워 졌을 때에 우리의 선택은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한 바른 진단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며 내 삶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더나가서 그 고백의 결단이 믿음으로 이어질 때 오늘 우리의 선택은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6.25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굶주림의 역사를 경험했다면 오늘 우리 민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내 삶을 돌아보며, 이 민족을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나갈지를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생활 속에 신앙고백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후에 무엇을 할 것입니까? 반드시 선택하여서 결정하였거나 이제 선택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선택하여야 합니다. 이 삶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그 선택대로 우리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부터 한참 떨어진 한적한 곳에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 묘지 입구에 다음의 글귀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누군지도 모를 나라의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려 싸우다가 전사한 젊은이들이 묻혀 있다”

누구를 위해서 죽는지 어디에 그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며 단지 자유가 필요한 그들을 위해서 싸우다가 죽어간 그 사람들의 생명이 여기에 묻혀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자유, 복음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자유들을 우리가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내가 노력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6.25 전쟁 시 미국을 위시한 21개 나라에서 사람들과 물자를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자유를 잃어버린 채 김일성 부자 그 체제에 개인적인 도구로 전락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죽음과 고통 가운데 있는 저 이북의 동포들과 우리의 삶이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느냐고 우리는 반문해 보지 않겠어요?

미국을 두둔하는 것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 자유는 더욱더 소중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신중해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 역사의 주인 되시며 내 삶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 고백을 우리가 분명히 드릴 수 만 있다면 오늘 우리의 선택은 분명히 달라 질 것입니다. 나가서 그 믿음을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결단하며 나갈 때 저와 여러분의 선택은 다시금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역사에 붙잡힌바 된 주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과거를 돌아보세요.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의 장소로 옮기기 까지 에서라는 벽을 반드시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된 자리에 두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거에 행했던 잘못된 일들을 해결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역사를 잊어버리지 말고 교훈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하고 분별할 줄 아는 그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삶은 주님께 있다는 그 고백이 있기에 오늘 우리 삶이 절망스럽다 할지라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갈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이신 포기치 않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결단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선택의 결과도 여러분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끊임없는 선택 속에 살아가는 저희들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하시며, 기쁨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하시며, 진정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믿음의 분별력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이 민족위에 전쟁의 비극과 아픔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분열과 다툼의 모습으로 또다시 멸망과 죽음의 역사를 써가는 저희들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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