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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하는 갈대 (약 5: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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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과학자요 철학자인 동시에 위대한 크리스천이었던 빠스칼(Blaise Pascal)의 『빵세』(Pensées)를 보면 그 첫 머리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와 같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갈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청거리고 꺾이는 아주 연약한 식물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존재를 표현할 때 비유로 사용되곤 합니다. 인간은 정말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해지고 병이 듭니다. 인체의 작은 부분이 고장 나도 중병에 걸리고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됩니다. 나쁜 말 한 마디만 들어도 낙심이 되고,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연약한 인간이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영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통로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속성입니다. 여러분 원숭이가 기도하는 것 보셨습니까? 나무가 기도하는 것 보셨습니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빠스칼의 글을 빌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와 같다. 그러나 기도하는 갈대이다!”
  오늘 본문 성경은 우리가 연약하지만 기도하는 갈대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기도로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 말씀대로 저와 여러분도 연약하지만 ‘상한  갈대’가 아니라 ‘기도하는 갈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럴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1] 인간의 연약함 :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인간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적 중에 이런 이상한 기적(?)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멀쩡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까지도 보살펴주시며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특별은총은 백한 백성에게만 허락하시지만, 일반 은총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도 일반은총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45 “ ...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얻고 싶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 것과 같습니다. 전원에 연결될 때 전기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것 자체를 축복이 아니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연약함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후12:10 “ ...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인간적으로 조금 잘 나간다고, 형통한다고 안일해지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게 축복입니다. 여러분, 잘 되고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계속 잘 될 것입니다. 더 잘 될 것입니다. 혹시 잘 안되고 있습니까? 더욱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잘 될 겁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대단해도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저 삽질하는 수준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포크레인 같은 능력의 역사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우리 혼자서 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다만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신다.”

  그러므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능력의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불가능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사람’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기도하는 가정이 강한 가정입니다. 재산이 많고 세상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인 가정이 강한 가정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가정이 가장 강한 가정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기사 내용입니다. 아시아계로서는 처음으로 예일대 총학생회장이 된 최재훈 군의 기사가 났었습니다. 기자가 그 어머니에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재훈이에게 해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열심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우리 가정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 가정은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무기가 있기에 가장 강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연약함을 탓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일어나 하나님의 승리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구약의 대표적 인물 엘리야 : 기도하는 갈대 

  야고보는 본문에서 기도에 관한 권면을 하면서 엘리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 하면 어떤 이미지가 얼른 떠오릅니까? 아주 강한 사람이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둘을 꼽으라면 모세와 엘리야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놀라운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엘리야도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말씀도 전파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이하를 읽어보면 많은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가루와 기름을 가뭄 내내 넘치도록 공급해 준 기적이 나와 있고, 갑자기 죽은 그 집 아들을 살려낸 기적도 나와 있습니다. 18장에는 유명한 갈멜산 사건이 있죠.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등 우상신 선지자들과 결투하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온 종일 주문을 외우고 난리를 쳤지만 감감 무소식입니다. 죽은 신이요 거짓 신이란 증거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에 흥건한 물도 핥듯이 말려버리고 제물을 몽땅 태웁니다. 그 여세를 몰아 거짓 선지자들을 다 처치합니다. 그리고 가뭄이 수년간 지속됐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함으로 비가 쏟아지는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만 보면 엘리야는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전혀 다른 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9장을 보면 전혀 뜻밖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갈멜산 사건 이후 분노한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 체포령을 내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도망자가 됩니다. 한참 도망가다 로뎀 나무 아래서 낙심천만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합니다. 왕상19:4 “ ...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그 당당하던 모습, 기적을 행하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참 이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게 엘리야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다 이렇습니다. 엘리야의 위대함은 오직 기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는 동안 위대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못하는 즉시 본래대로 연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위대하지 않습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17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 엘리야가 놀라운 기적을 행한 것 맞습니다. 삼년 육 개월 동안의 가뭄, 그리고 그 후의 비 모두가 엘리야가 행한 기적입니다. 성정이 같다는 것은 엘리야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기도 때문입니다. 17절~18절. “ ( ... )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지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지만 기도함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관점에 따라 이런 저런 인물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저로서는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을 꼽고 싶습니다.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분입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둘러싸고 조선의 기독교회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교묘한 회유로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교단마다 총회에서 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로 결의합니다. 전국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가 단체로 신사참배를 하는 등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두고두고 한국교회가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끝까지 반대했고 거듭 투옥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진 고문에도 버티다 결국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오랜 전 나왔던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 순교 직전 고문당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대못을 거꾸로 박은 발판을 강제로 지나가게 하는데, 거기서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갑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그 강인함은 본래 그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역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먹고 다시 생각이 안 나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습니다.” “주님! 저 이러다 순교 못 할 것 같습니다 순교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정말 연약한 모습입니다. 우리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위대한 모습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이야기입니다. 에든버러(Edinburgh)에 가면 당시 여왕 메어리(Mary)의 궁전이 있고, 그 맞은편에 존 낙스의 작은 집이 대조적으로 나란히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여왕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학살 명령을 내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존 낙스는 그 날 밤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그 후 놀랍게도 그 명령이 철회되었고, 오히려 여왕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마지막 고통 중에 여왕이 남긴 말입니다. “아,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백만 명의 대군보다 무섭구나!” 존 낙스는 연약한 일개인에 불과합니다. 전제 군주인 여왕에 비교 상대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위대한 사람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 주변에 대단해 보이는 인물들 ...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들입니다. 다 연약합니다. 초인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의 이름도, 본문에 나온 엘리야의 이름도 ‘기도하는 갈대’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그런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도법 :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 간절한 기도

  ① 믿음의 기도 :
  15절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시리니 ... ” 그랬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능력이 있어 병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비단 질병 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정말 기도부터 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이도 저도 안 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또 작은 문제는 그냥 내 힘으로 세상 방법으로 가능하다 싶으니까 자기가 해버립니다. 너무 커서 자기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기도합니다. 이것도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크든 작든 어느 문제이든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대하면 기도하는 게 진정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조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병이 들었을 때 약을 쓰면 안 되나요? 병원에 가는 것은 불신앙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학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의 영역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임을 믿고 먼저 기도하고 나서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믿음입니다. 혹은 결단하고 의학의 도움도 사양한 가운데 기도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본문 14절에 장로들(요즘으로 말하면 장로만 아니라 교역자 등 교회 지도자들)이 방문해서 기도할 때 기름을 바르라고 했는데, 그 기름은 감람유(올리브유)로 민간요법으로 치료효과도 있었지만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을 써도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라는 겁니다. 결국 약을 쓰느냐 안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속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의 집 아이가 기숙사 학교에 가 있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전화를 하니까 1주일 넘게 설사로 고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갈 수도 없고 오라고 할 수도 없어서 얼마나 답답한지 몰랐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약을 먹었는데도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밥도 못 먹고 약을 먹으면 어지럽기만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말해서 병원에 가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얼마나 심란한지 ... 그런데 가만히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뭐하고 있나 한심했습니다. 물론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아이와 통화하면서 기도 이야기는 쏙 빼고 약 먹었냐, 병원 가라 이런 이야기만 잔뜩 하고 전화를 끊었으니 ... !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믿음 없는 소리만 했다고 고백하고 전화로라도 기도하자고 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전화했습니다. 목소리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기도 그만 하세요. 변비 됐어.” 기쁘기도 하고 다시 한번 믿음 없었음을 회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 제일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큰 역사를 이뤄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의인의 기도 :
  16절 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그랬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믿음의 의인, 다시 말해서 법적인 의인일 뿐입니다. 실제 삶에서 얼마나 많은 허물과 실수와 범죄가 있습니까? 물론 그럴 때마다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으면 되는데, 죄를 품은 채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기도가 하나님 보좌로 상달되지 않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 ”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고백함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의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큰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③ 간절한 기도 : 17절 보면, 엘리야의 기도에 있어 중요한 특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 ...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 ”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엘리야라고 해서 한두 번 기도하면 척척 이뤄진 게 아닙니다. 간절히 부르짖고, 또 부르짖다가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지난번 인도단기선교 갔을 때 사석에서 로수길(인도 사람), 변상이 선교사님 가정의 간증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로수길 목사님이 신학교 학장으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될 형편이어서 수년 전 사역 십수 년 만에 안식년을 2년으로 하면서 버지니아의 리버티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 과정을 밟았습니다. 2년 후 인도로 귀국해서 논문을 썼고 금년 5월에 드디어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인가 귀국할 때의 일입니다. 자녀들이 4명인데, 큰 아이 둘이 미국에 남고 싶어 했습니다. 부모 마음으로도, 또 선교 사역을 위해서도(큰 아들은 목사 지망생, 큰 딸은 의료선교사 지망생)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입니다. 생활비로는 턱도 없고, 그냥 데려가자니 아이들이 크게 실망하겠고 ... 그렇다고 선교 후원금에서 쓰는 것은 마음속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고 ... 고민이었습니다. 하루하루 귀국날짜는 다가오고 ...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막판에는 금식하면서 ... 그런데 하루 전인가 이틀 전인가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그 소식을 들은 어느 미국인 가정에서 연락이 온 겁니다. 자기 집에 홈 스테이를 시키라는 겁니다. 비용은 무료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지난 5월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 과정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어 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큰 어려움 없이 이번 9월부터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약합니다. 갈대와 같이 상하고 꺾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는 갈대’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굳게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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