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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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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마가복음 5:39)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호수 서편 가버나움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12살 난 어린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가버나움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기 위하여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가던 중 그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장례가 준비되고 있었고 유대인의 장례 풍속대로 피리를 불며 헌화하는 무리가 고용되어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왜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내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소녀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으로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성서 말씀 중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극히 현실적이되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헌화하며 울고 떠드는 무리들입니다. 소녀가 죽었다는 현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어떤 희망이나 다른 기대할 만한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장례의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죽은 소녀를 위해 어떤 책임이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장례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소득을 위하여 헌화하며 울뿐인 것입니다. 이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냉소적으로 비웃는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어린소녀의 아버지 ‘야이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딸이 죽어가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딸을 살리려는 가능성을 찾으며 그것을 위해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찾았고, 찾아와 엎드려 간청하는 겸손과 열심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는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가능성을 보고 가능한 일을 만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능력적인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도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면서, 가능하다는 희망과 함께 용기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슬픔의 분위기를 기쁨과 감사와 영광의 역사로 바꾸신 분이셨습니다. 초상집을 잔치 집으로,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이러한 세 부류의 삶이 있음을 봅니다. 부정적인 삶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삶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있지만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오직 능력적인 삶에서만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삶의 태도에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능력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능력의 삶을 소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12살 난 어린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능력의 삶을 위해서 가져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께서 늦게 도착하심으로 이미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해 하는 야이로를 보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며 엄청난 표현을 하심으로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능력은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능력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믿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소녀를 살려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소녀의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면서 소녀를 살리시는 그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때 능력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던 중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그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면서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킬 때, 그 앉은뱅이 걸인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는 믿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에 대한 놀라운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 좋으신 계획대로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때 능력적이고 창조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큰 관심사중 하나는 건강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생활 여건이 발전되고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건강공포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초조하고, 영혼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각종 문명의 이기로 인해 살기 좋은 문명의 생활을 누리는데도 왜 만족하지 못하고 초조하며, 우리의 영혼은 공허하며 불안해해야 합니까?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던 어떤 젊은이가 하루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과 의사는 “프로이드의 쾌락의 원칙대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쾌락을 즐겨 보십시오. 그러면 만족과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사의 말대로 그 청년은 사창가에 들어가서 향락에 만취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겠다던 그 젊은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갈리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각종 병든 자를 고치시며,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과거에 계셔서 그렇게 하셨던 예수님으로만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죽은 아이를 “죽은 것이 아니라 진다”면서 그 아이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창조적 삶을 이룰 것입니다.

  능력의 삶을 위해서는 “믿음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의 습성을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서 헌화하며 우는 무리들, 죽은 소녀를 자는 자를 깨우듯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을 비웃는 무리들을 내어 보내셨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의 습성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감정에 항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적극적인 감정을 따라가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따라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10%가 사실이고 나머지 90%는 그 사실에 대한 반응인데, 그 90%의 반응이 긍정적인 반응이면 그 사람의 삶은 긍정적이 되고, 부정적이면 부정적인 인생의 결과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에 항복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꾸는데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습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사용하며,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생활태도가 부정적인 생각과 습성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불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배격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을 부정적인 생각만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공연구가 ‘폴 마이어’는 금붕어를 가지고 연구했습니다. 커다란 어항중앙에 유리벽을 만들고 한쪽에는 금붕어를 넣고 다른 한쪽에는 굶주린 메기를 넣었습니다. 굶주린 메기는 금붕어를 잡아먹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가다가는 유리벽에 부딪쳐 아픔을 겪게 됩니다. 계속 몇 번을 시도하다가는 ‘아 나는 금붕어를 먹을 수 없는 것이구나’ 라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의식화 시킵니다. 그 때 어항 중안에 있는 유리벽을 제거합니다. 이제는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메기는 쏜살같이 메기를 향하여 달리다가 가운데에서는 휙 돌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잡아먹지 못한다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부정적인 습관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씀하심으로 불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배격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습성을 고치는데서 능력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의 삶을 위하여 “믿음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이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는 적극적인 말과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달리다굼”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는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로 어린아이를 살리시는 새 창조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적극적인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난쟁이 삭개오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행복한 삶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적극적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할 수 없다’의 생각을 ‘할 수 있다’의 생각으로 바꿔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불가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여러 가지 생각을 한 생각으로 바꿔라. 

  셋째, 작은 생각을 큰 생각으로 바꿔라. 넷째, 절망적인 생각을 소망적인 생각으로 바꿔라.

  다섯째, 약한 생각을 강한 생각으로 바꿔라.

  예수님의 적극적인 태도는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심으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는 능력적이고 창조적인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의욕과 용기를 빼앗아가는 시대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주역은 무능하고 지혜롭지 못한, 현 정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환경이 주는 분위기와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어렵더라도 우리는 적극적인 태도로 창조적 역사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생활의 과제나 문제를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의 사건을 만들게 하는 축복의 조건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인생을 바로 고쳐주십니다. 먼저 과거를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1:9) 우리의 과거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자백의 나’와 ‘용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고쳐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요14:1-3)
  미래에 언젠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거처로 데리고 가실 우리의 미래를 온전하게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과거와 미래뿐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도 고쳐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을 고치셔서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 가정의 슬픔을 더 큰 기쁨과 행복의 생활로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죽음의 삶을 생명의 삶으로 만드셨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을 믿음과 가능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절망과 불안을 희망과 평화로 창조하셨습니다. 
  야이로의 긍정적인 자세에 예수님의 능력은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능력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의 습성을 고치시길 바랍니다.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능력의 사람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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