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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아들 된 자의 행복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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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어느 날 교회를 갔다 오더니 저에게“아빠! 어떤 집사님이 왜 저보고<국화빵>이라고 하고<복사기>라고 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러는 겁니다. 아마 그 집사님이 보시기에 저희 아들이 저하고 똑같이 닮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저하고 닮지 않은 것 같은데 남들은 닮았다고 하나봅니다. 정말 제가 그렇게 멋있나요? 이렇게 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던데...그런데 여러분,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보는 사람들이 똑같다고 하는 데는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생김새도 그러려니와 걸음걸이, 말투...닮은 구석이 참 많은 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더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또 다른 분신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모방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한평생 터득한 기술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만들고 장사하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더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닮는 것입니다. 생각도 닮고, 행동도 닮는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것은 정말 보통의 관계가 아닙니다. 또한 아무렇게나 맺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남들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해도 정작 그 아버지가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어느 구석을 보아도 아버지와 닮은 데라고는 없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데는 또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살면서 남들이 뭐라고 불러줄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까? 사장님이라는 말 어떻습니까? 아니면 선생님, 사모님, 여사님.... 싫지 않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이 말들보다 우리들이 정말 좋아해야 하는 말은<성도>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불리지 말았으면 하는<교인>이라는 말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만나 누가 교인이라고 소개하면 어떻습니까? 부끄럽습니까? 자랑스럽습니까? 아마 대부분이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어떤 분은 남들 앞에 교인이라고 소개하면 경기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괜찮은데 집사님들이 8~90%가 그렇답니다. 안수집사님들이나 권사님, 장로님들은 대부분이 자기 직분을 떳떳이 밝히는 편이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초 신자도 아니고, 중직자도 아닌 애매한 서리집사님들이 대부분 세상에 한쪽 다리 걸치고 교회에 한 발 들여놓고 그렇게 산다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성도, 혹은 교인이라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누구에 의해 일컬음을 받느냐는 문제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든지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정체를 내가 인정하고 잊지 말면 될 일입니다. 세상의 호칭에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일컬음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내가 왜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희미한 그림자만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에 민감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행위가 아버지를 닮으라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닮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자녀 된 것만 가지고 허세를 부리며 살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찾을 것 다 찾으려고 하고 받을 것 다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가 갖추어야할 자격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곧 예수 믿는 자가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자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사람>이란 다른 말로<평회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몇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낮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둘째는, 온유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셋째는, 관용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넷째는, 인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선은 우리에게 이러한 성품이 있어야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관용하며 인내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화해자의 반대는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람의 죄목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근 수근 하는 것, 비방하는 것, 교만 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해자의 반대인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성품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자는 정말 복된 자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좋은 중재자의 모습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가 그 좋은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32장에 모세의 유명한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잠깐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이 백성은 진멸하고 너(모세)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이 되게 해서 가나안 땅에 가게 하겠다.”이스라엘 백성은 멸하되 모세는 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어찌하여 구원하신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하며 간절히 매달리다가 32절 마지막에 가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께“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자기 백성이 망하는데 혼자 살아남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백성을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진노의 채찍을 거두십니다. 모세야말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peace maker입니다. 죄송한 상상입니다만 만일에 모세가“하나님, 잘 됐습니다. 이 백성은 도대체 목이 곧아 희망이 없사오니 그저 저만이라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백성을 멸하시려거든 나를 먼저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로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본문에서 주님께서“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이 화평케 하는 자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고로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어느 부분은 같아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엡2:13-14에 보면“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신 것입니다. 친히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다는 중요한 교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케 하기 위해 희생하며 죽음에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화해 자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아도 부끄럽지 아니할 만큼 화평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가는 곳마다 분쟁이 일어나고 고요하던 곳도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면 분명 나는 잘 못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끊임없이 문제가 있고 다툼이 있던 곳도 내가 가기만 하면 고요해지는 평안이 있고, 다투며 으르렁거리던 사이가 내가 중간에 서기만 하면 화해가 이루어지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행복한 사람의 삶일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희생자로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손해는 내가 봅니다. 그러나 그 손해가 내 행복을 가져오는 손해라면 기꺼이 감수합니다. 비록 내 희생이 있고, 내 손해가 있다지만 화해를 이루고 화평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즐거워하며 감당하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는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입니다. 내 입장에서의 고집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며 배려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자와 소가 만났는데 서로 마음에 들어 함께 살게 됐습니다. 허니문 기간에 그들은 서로에게 잘 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자는 살코기를 잔뜩 갖다가 소에게 줍니다. 풀만 먹고 살던 소는 싫어도 먹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 소는 풀을 가져다가 사자에게 줍니다. 매일 고기만 먹고 살던 사자는 싫었지만 먹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고 둘은 다투기 시작합니다.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다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나는 할 만큼 했다!”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입장은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던 게 불행의 원인입니다.

가끔씩은 나를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한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내 고집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화목이 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당신의 아들로 일컬어 부르셔야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은“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듣기 좋은 소리로 허세나 부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로 일컫는 그런 복을 받는 자로 살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의 믿음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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