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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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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 첫날입니다. 9월이 복된 달 되기 바랍니다.

요즘 「수학의 정석」이라는 참고서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참고서는 1966년 8월 31일에 처음 발간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난 목요일, 2006년 8월 31일로  발간 40년을 맞았는데 그동안 모두 3,700만 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지난 주간에 거의 모든 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에 거의 빠짐없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언제나 제일 많이 팔리니까 성경은 제쳐놓고 그 다음에 많이 팔린 책부터 계산합니다.’ 이런 말씀을 한두 번 드린 일이 있는데 그 말은 이렇게 사실입니다.
어떤 신문은 이 책의 별명이 ‘수학의 바이블’이라고 보도했더군요.

수학참고서로는 「수학의 정석」이 유명하다면 영어 참고서로는 「영어실력기초」가 유명합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이 책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삼위일체」, 「구문론」, 이런 책들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영어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아닙니다. 문법, 해석, 작문입니다.
「영어실력기초」 이 책이 유명해지는 데는 이 책의 제목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기초가 중요한데 「영어실력기초」라는 제목은 참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최근 ‘신앙실력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생각했고, 기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실력기초가 되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육이다, 전도이다. 섬김과 나눔, 예전 말로 하면 봉사와 구제이다, 봉헌이다, 여러 가지를 말씀하실 것입니다. 
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오늘은 찬양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받기 원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이어 찬양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연세가 좀 드신 분들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흐름은 쉬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우선 신학이 그렇습니다.

1960년대에는 성서신학과 이론신학이 권위 있고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때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택하는데 자기는 다른 것을 택하고 싶었는데 지도교수가 ‘뭐 그런 것을 공부하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성서신학이나 이론신학을 공부한 분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960년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실천신학이나 역사신학의 비중이 아주 커졌습니다.
1960년대에는 아주 생소한 말이었던 선교신학이 지금은 대단히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육의 일선에서 이런 것을 잘 체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에서 찬양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커질 것입니다. 21세기는 ‘느끼는 시대’ ‘감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런 흐름의 변화에 너무 민감하면 좀 경망스러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의 변화를 무시하면 부흥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19절은  찬양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 가운데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것과 거의 같은 말씀이 골로새서 3장 16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쌍둥이 서신’이라고 하지요.
골로새서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람표 대사전」이라는 책이 있는데 성경 각 권의 3장 16절에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하면서 ‘3장 16절 일람표’라는 항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는 이렇게 찬양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또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고 찬양에 대한 말씀은 찬양대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찬양에 대한 말씀은 찬양대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말씀은 성서학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지난 주일의 설교와 연결해서 하나 살핍니다.
지난 주일에 성서가, 특히 역대하가 말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보 5면 ‘지난 주일 설교 요약’ 앞부분에 그 정의들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그 가운데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기도, 나가서는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것은 누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 드린 기도였습니까?
이것은 역대하 20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인 데요, 여러분, 역대하 20장을 여시기 바랍니다(680쪽).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것은 유다 왕 여호사밧이 드린 기도입니다.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이 연합해서 쳐들어 올 때 여호사밧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기도하고 야하시엘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다음의 일을 20장 18절과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기도, 설교, 그리고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의, 예배의 삼 요소, 또는 세 기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예배에서 설교는 밥, 기도는 국, 찬양은 반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맛있게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유다 군대와 모압․암몬 연합군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호사밧 왕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나 합니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일까요?
역대하 20장 21절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싸우는데 군악대를 앞세웠습니다. 그것도 예복을 입고 앞서게 했습니다.
전투를 하려면 전투복을 입고 무장을 한 보병이 앞서는 것이 상식인데 예복을 입은 군악대가 앞을 섰습니다.
저희 교회에 해병대 군악대장을 역임하신 장로님이 계신데 그런 법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그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역대하 20장 22절입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 죽였더라

유다 백성은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줄로 믿고 미리 드린 감사 찬양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드린 찬양은 믿음으로 드린 찬양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복병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만큼 두었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는 찬양은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이기게 합니다.
유혹을 이기게 합니다. 타락을 이기게 합니다.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이기게 합니다. 악한 세력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 찬양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는 19절의 말씀을 그 앞의 18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 다음에 19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은 그가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들은 날마다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해 주신 주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술 취함의 결과는, 말을 좀 바꾸면 술 충만의 결과는 방탕입니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찬양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신앙을 지켜줍니다.

조창호라는 젊은이가 6․25 때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탈출을 하려다가 잡혀 교화소(교도소) 생활을 12년 6개월이나 했습니다. 
북한의 교화소 생활은 1천 명 가운데 한 명이나 살아남을까 할 정도로 힘이 든다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나온 다음에는 탄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43년을 북한에서 이렇게 지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도 없고, 성경도 없고, 예배도 드릴 수 없는 환경에서 조창호는 찬송을 부르며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그 일을 그가 쓴「돌아온 사자(死者)」라는 책에서 직접 읽어 드립니다. 

교화소뿐만 아니라 북한의 어디에도 신앙의 자유란 없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거나 예배를 볼 수 없어도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간구했다. 물론 찬송도 부를 수 없었지만 입 속으로 늘 불렀다.  나 혼자 이겨 내지 못할 괴로움을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은 내게 늘 편안함과 새로운 의욕을 주셨다. 또 내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주님을 수없이 원망하더라도 종국에는 평안함을 가져다 주셨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얼마나 오래 시간을 기도하실까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만은 어머니와 나는 함께 있다고 믿어졌다.
늘 어머니께서 잘 부르시던 찬송을 생각했다. 그 찬송은 지금도 찬송가를 보지 않고도 혼자 부를 수 있다. 43년의 질곡도 내게서 신앙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찬송가 93장이지요.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한상균 목사님이 무슨 영감이 통했는지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은 믿음을 유지하게 하고, 믿음은 소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조창호는 소망을 잃지 않고 지니다가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수지의 상현동에 살며 새문안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습니다.
작년인가 저희 교회 남선교회 대회에 이 분이 왔었는데 그 때 성대에 이상이 있어 인사말씀을 아주 간단하게 했습니다.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대목에 이르러 조창호 집사에게 안부전화를 했더니 건강 문제는 끊임없이 생기고 있지만 목소리가 많이 밝아졌습니다.
그 때 남선교회 대회에 오셨을 때 서예가인 저희 교회 현상각 권사님이 “예수는 나의 힘이요” 이 찬송을 붓글씨로 써서 선물로 드렸습니다.
여러분, 찬송을 부르며 믿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 찬양해야합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찬양해야합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탄식 대신에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부르는 찬양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찬양에 대한 감동적인 기록으로 빠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의 찬양입니다.
빌립보 성에서 전도하다가 고소를 당해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많이 맞았습니다.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워져 있습니다.
한밤중, 바울과 실라는 찬양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부르는 찬송은 힘을 주어 원하는 일을 이루게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할 때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384장) 이 찬송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루터에게는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라는 동지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둘이서 시편 46편을 소리 내어 같이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로 시작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11절)로 끝나는 시편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해서 힘을 얻으며 종교개혁운동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수험생들, 그 부모님들,  피난처가 되시고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을 얻어 수험생 생활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저희 교회는 용인의 서쪽 끝에 있는데요, 용인의 동쪽 끝에 가까운 원삼면 사암리라는 곳에 새빛 요한의 집이 준공되어 지난 화요일에 개원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빛 요한의 집은  나이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양로원입니다.
개원예배의 축도 순서를 맡아서 참석했습니다.

당진감리교회 찬양대가 찬양을 했습니다.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당진에서 용인까지 와서 찬양을 하는 것을 보고 고맙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새빛 맹인 교회 성도들이 나와서 찬양을 했습니다. 모두 시각장애인들입니다.
안요한 목사님도 사회를 보다가 성도들 가운데 함께 서서 찬양을 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지휘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보지 못하니까 앞에서 지휘할 필요가 없지요.
세 곡인가를 불렀는데 시작과 끝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무릅쓰고 정성을 다해서 찬양할 때, 이제 자기들의 노후를 의탁할 안식처가 생긴 것을 감사하며 찬양할 때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들었습니다.
찬양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무엇하라고 했습니까?) 찬송할지니라

이사야서 3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속량함을 받은 성도 여러분, 구원 받은 성도 여러분, 교회에 오실 때 찬송하며 오시기 바랍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슬픔과 탄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탐험을 떠났다가 오지에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구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힘썼지만 노예상인들이 그것을 방해했습니다. 평소에 리빙스턴이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식량과 구호물품이 도착했습니다. 
스텐리라는 미국의 신문기자가 리빙스턴의 소재지를 알고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의 그 날 일기에는 시편 103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시편 103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1-2)

리빙스턴 선교사는 어려움에서 큰 도움을 받은 기쁨을 이와 같이 찬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도 찬송하고 기쁠 때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헤럴드 볼켈(Harold Voelkel 1898-?)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이름은 옥호열(玉鎬烈)입니다. 한국을 위해서 여러모로 수고한 분입니다.
특히 6․25 때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6․25 때 이 분은 군목의 신분으로 기독교인들이 제주도에 피난하는 것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를 도와주었습니다.

숭실대 제1공학관이 이 분을 기념해서 호열관(鎬烈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인천에도 이 분을 기념하는 중학교가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볼켈 선교사는 포로들을 상대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별명이 ‘반공포로의 아버지’입니다.
반공포로 출신 가운데 볼켈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 목사가 된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볼켈 선교사가 남긴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저녁에 포로들이 있는 막사 옆을 지나는데 한 포로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가 364장이지요.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 다음 가사가 이상했습니다.
그 담에 몰라도 살고는 싶구나 하나님 아버지 날 살려주시오

볼켈 선교사는 그 포로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북한에 있을 때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싫어서 심하게 핍박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교회에 다녀오기만 하면 때렸다고 합니다.
아내는 맞으면서도 찬송을 불었다고 합니다.
인민군이 되어 싸움터에 나와 치열한 전투 중에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투는 계속 일진일퇴하고, 많은 포로를 다 후송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미군이 포로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이 사람은 앞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미군이 ‘당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찬송을 불러보라.’ 하더랍니다. 
아내가 맞으면서도 부르던 찬송가가 생각나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여기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다음은 곡조는 생각나도 가사는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작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담에 몰라도 살고는 싶구나 하나님 아버지 날 살려주시오

미군은 이 사람을 먼저 후송해서 포로수용소에 안전하게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고맙고, 그런 아내를 핍박한 것이 미안하고, 아내가 보고 싶고, 찬송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이 감사하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아내가 늘 부른 찬송은 남편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찬송하세요.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청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찬송을 하고 싶어도 장애 때문에 소리 내어 찬송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매우 기쁜 얼굴을 하면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청각장애인은 수화로 자기의 의사를 밝히는 수밖에 없지요.
이 청각장애인은 열심히 수화를 했습니다.
수화를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의 말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 기쁩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도 장애 때문에 소리내어 찬양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나의 장애가 풀리겠지요. 이사야 35장 6절에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대로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겠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도, 지금도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무명 시인의 찬양에 대한 기도시를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귀로 오로지 주님의 음성만을 들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발로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감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간증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시편 67편은 구약 가운데서 세계선교를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은 “시 곧 노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데요, 세계가 복음화 되는 것을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 2절과 3절입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지금 이 세계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 테러, 나라간의 갈등…,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할 때 그런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여기 “화답하며”는 교제를 말합니다.

나와 하나님의 교제, 나와 이웃과의 교제, 그리고 민족과 민족간의 교제, 나라와 나라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이런 교제가 이뤄지면 분쟁과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시편 67편은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 3절의 말씀입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 것이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찬송 없는 신앙생활을 새의 울음소리 없는 숲과 같습니다.
찬송 없는 신앙생활을 냇물 가운데 돌 없는 시내와 같습니다.
냇물 가운데 돌이 없으면 그 시내는 졸졸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찬송 없는 신앙생활은 이렇게 적막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19절의 말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성경 주석들이 19절을 주석하면서 시는 무엇을 말하느냐, 찬송은 무엇을 말하느냐, 신령한 노래는 무엇을 말하느냐, 이런 것을 설명하는데 힘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의 말씀에서, 찬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입니다.
‘마음으로 주께!’ 이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마음으로 하는 찬양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찬송이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찬송할 지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은 정성을 다해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은 경배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주께”입니다.
이것은 방향을 바로 하고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을 보면서 가르쳐야합니다.
군대에서 장교는 병사들을 향해 구령을 외쳐야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주님을 향해,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어느 종교음악가는 찬송에 대해서 ‘찬송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한 가지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것은 주께 드리는 노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드리는 노래는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는 가운데 승리하고, 믿음을 지키고, 지킬 뿐만 아니라 자라고, 어려움을 이기고, 목표를 이루고, 기쁜 일이 더 많아지고 이 땅을 평화롭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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