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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확신과 나 (눅 4: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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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방황은 주님을 만남으로써 끝이 난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주님을 만나면 방황은 왜 끝이 나는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나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1) 눅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2) 눅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코자
3) 요일3:8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면 삶이 구원을 얻고 새로워진다. 방황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
이 땅에 예수님이 보냄을 받으사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본문이 하나있다. 바로 눅4:16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61장 이하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말씀인데 신약 시대에 주님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공개하는데 인용하신 말씀이다. 이 본문을 보면 주님은 확신하신다.

첫째,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확신하고 있다. (눅4:18)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어졌다는 인식이었다.
눅4:18中 "나를 보내사"란 표현이 있다. '보내사'란 말은 파송하시는 분에 의해 이 세상에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도 말씀을 근거하여 성취된 예언에 근거하여 믿고 계신다. 이사야의 예언, 800년전 말씀에 비추어 보내심 받은 것을 확신하고 계신다. 이것이 주님의 삶의 확신의 뿌리이다.
말씀의 예언에 근거한 확신! 우리도 이 확신을 사모하자. 이 땅에서 내가 부모로부터 버려졌다고 하면 방황하고 혼돈된다. 만약 인생 존재 자체가 우연이라면 방황은 계속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졌다는 정체성이 없는 인생은 부모가 없는 경우보다도 더 큰 방황 속에 살게 된다.
"나는 이 땅에 누구에 의해 보내어졌는가? 우연인가? 아닌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나도 확신을 갖자. 그 동안 사람은 우연히 생겨진 생명체에 불과하다고 믿도록 진화론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똑해진 것 같은데 갈수록 방황하고 어리석은 행동만 하며 살아간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과학의 쾌거를 부르면 무엇하고 100층 빌딩을 세우면 무엇하는가?
예수님은 삶의 정체성을 확신했다.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어진 삶을 위해 이 땅에 파송되어 온 것을 말씀대로 확신하였다. 우리도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내가 왜 여기에 보내어졌는가? 오늘 여기 오목천교회 예배당에 앉아서 왜 예배하고 있는가? 말씀에 근거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주님은 자신의 역할을 확신하고 있다. (눅4:19)
주님의 역할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눅4:19에 언급한다. 주님의 '은혜의 해'란 무엇인가? '은혜의 해'란 모든 것을 원위치 시키는 희년을 의미한다. 남에게 노예로 가 있던 사람, 남에게 토지를 빼앗겼던 사람, 이 사람들은 고달프게 살아간다. 그런데 희년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맨처음 상태로 원위치 된다. 주님이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는 것은 곧 회복을 위해 일하신다는 주님의 역할 선언이다. 즉 사람들이 빼앗긴 에덴 동산을 되찾아주고 사람들이 빼앗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아주어 모든 것을 원위치 시키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하실 일은 인간의 회복이다.

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 하신다. - 육적인 삶의 회복

처음 상태의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금 우리들은 자유인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에 포로가 되어 있다. 죄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미신과 우상으로부터 포로가 되어 있고 거짓된 사상과 허무주의에 포로가 되어 있다. 도박과 놀음, 술과 마약에 포로가 되어 사람들은 그것을 쾌락으로 즐기며 인생의 낙이라고 살고 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 땅에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 더욱 짜릿한 쾌락을 위해 폭력 영화, 피 흘리는 격투기, 죽을 때까지 싸우는 투우, 투견, 투계에 열을 올리고 인생을 건다.
우리나라는 도박 공화국이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도박, 알콜, 담배, 쇼핑 중독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고통과 괴롬 속에서 지낸다. 요사히 바다이야기란 성인 오락 프로그램 때문에 총리가 사과를 하고 오락 기계를 다 압수하고 문화 상품권을 압수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를 정도다. 눈에 보이는 삶이 죄의 포로가 되어 있기에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주님은 바로 그 다양한 것들에 의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려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2)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신다. - 영적인 삶의 회복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살던 사람들은 죄로 인해 육체가 되어 보이는 것만 최고인줄 안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소경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은혜와 사랑과 영광의 기업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보는 눈이 되었기에 사람은 길을 잃고 멸망의 길, 불행의 길로만 들어간다. 눈이 열려야 한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려고 일하시는 것이다.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 - 마음의 회복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으면 속이 상한다. 자꾸 누르게 되면 병이 들고 압사하고 만다.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든 불안은 자꾸만 적대감과 경쟁심으로 자신의 빈 허무를 대신하려고 한다. 그래서 남을 군림하고 남에게 군림 당하게 되는데 사실은 억압자나 피억압자나 모두 눌린 자들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내가 내 속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시커멓게 멍들었으리라고, 아예 검정색으로 나올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그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돈과 말, 감정과 권력, 차별과 학대, 업신여김에 눌려 모든 자들이 상하고 병들고 압사 직전인 것이 인생의 형편이다. 겉으로는 웃는다. 그러나 내면의 마음은 울고 있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이 얼마나 마음이 눌려 있음을 보여주는 책인가? 오늘날 마음의 상처를 싸매고자 하는 내면 치료의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상처난 감정의 치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내 마음의 벽, 위장된 분노의 치유 등. 그런데도 눌린 마음들이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의사와 상담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신음하며 고통하는 사람들,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죽이고 죽는 이들을 살려내어 전인적인 인간을 육체와 영혼과 마음까지 회복하러 오신 것이다. 주님은 그 일을 자기 역할로 확신하고 계신다. 그래서 십자로를 지고 죽을 수 있었다.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를 살려 놓으셨다. 우리도 살리는 역할을 위해 산다는 확신을 갖자.

레나벨(L. B. Robinson)은 61세에 의사 생활을 접고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다. 나이가 많다고 동료들이 얘기했지만 간질병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 병을 뿌리뽑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을 다니면 7, 80세가 되었어도 일을 했다. 장미회를 전국 전역에 세워 치료 공동체가 되었다. 그는 90세에 선교 활동을 중지했으나 살려내야 하는 인생의 목적에 확신을 가졌다. 그는 100세가 되었음에도 살려내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7∼8cm 두께의 기도 목록 노트 속에는 선교사 700명을 위한 기도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확신의 사람은 삶을 소중하게 드린다.

셋째, 주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확신하고 있다. (눅4:18上)

눅4:18上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였다. 주님은 자신이 해야할 회복의 사역, 분명한 일의 목적을 잘하는 준비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일이었다. 성령 충만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나의 힘으로 인생을 회복시킨다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함께 일하시는 것을 방법으로 아신다. 정말 주님은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하는 방법은 성령과 함께라는 것을 여기서 알게 해 주신다.

주님은 성령이 임하였음을 이미 확신하고 자기 역할을 선포한 셈이다. 주님도 성령 충만을 받으시고 성령님과 함께 일해야 되는 확신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어떻해야 되는가? 마땅히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삶의 맡겨진 역할과 목적을 성취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기름 부음은 사명자에게 주시는 도전이다. 망설이는 자에게 주시는 도전이다. 갈망하자. 성령 충만을 갈망하자.

이사야 61장에 나타난 기름 부음의 목적으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사61:1∼3은 개인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눅4:18∼19과 같다. 그런데 사61:4∼7은 부흥을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집들이 다시 재건되고 이방인들이 시온의 농장에서 머물며 일하는 부흥의 비젼이 기록되어 있다. 개인의 회복이 민족의 부흥을 가져오는 비젼!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신다. 주님은 비젼을 시온의 부흥만이 아니고 창조의 동산으로 들어가는 비젼이셨다. 성령이 주님께 임하셨을 때 이 일이 시작되고 응하였다고 주님은 눅4:21에서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다. 우리도 확신의 사람이 되자. 인생의 물질 문제에 대하여 머뭇거림과 방황하는 인생이 아니다. 언제까지 '믿을까, 말까?' 하여야 하는가? 흔들리면 허송 세월을 보낸다.
확신이란 어떤 상태인가? 내홀이란 성서학자가 바닷가를 거닐었다. 해변가에 파도가 밀려오는데 모래 위에 놓여진 바윗덩어리가 물에 잠겨 밀물 속에 사라졌다. 그들이 떠내려간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바위는 요동함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홀은 저것이 바로 확신이다. 파도와 같은 유혹들이 밀려와도 결코 요동하지 않는 바위같은 모습, 이것이 확신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다. 제자는 배우는 자요 따라가는 자다. 주님을 닮는 자요 흉내내는 자다. 주님의 확신이 나의 확신으로 고백되자.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세 가지의 확신을 갖자.
1)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자.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2) 자신의 역할, 즉 인생의 하여야 할 일에 대한 확신을 갖자.
  사람을 살려내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3) 무엇을 가지고 일하는 가에 대한 확신을 갖자.
  성령을 받아 일한다는 확신이 나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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