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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꾸는 자 (창 3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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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요셉이 꿈을 꾸고서 그것을 형들에게 말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형들은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나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어요."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성싶으냐 ?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었다. "네가 꾼 그 꿈이 무엇이냐 ? 그래, 나하고 너의 어머니하고 너의 형들이 함께 너에게로 가서 땅에 엎드려서 너에게 절을 할 것이란 말이냐 ?"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창 37:5-11)

어떤 청년이 온 세상의 관심과 주목을 크게 받고자 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청년은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났습니다. 시샘과 싸움으로 뒤범벅이 된 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서 거절과 소외의 아픔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어머니조차 소년을 무시하고 방치하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갔으나 친구들과 싸움을 하고 고등학교 3학년때 자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동료들과 싸움의 나날을 보내고 상관에게까지 대들다가 명령 불복종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고 군대에서 쫓겨났습니다. 수없이 결심을 하지만 번번히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거절의 상처를 받고 떠 돌아다니다가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는데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조롱과 경멸을 받았습니다.

어느날 집에 놀러온 친구들앞에서 아내는 모욕과 경멸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큰 일을 저지를 결심을 합니다. 1963년 11월 22일 창고에 숨겨두웠던 총을 꺼내들고 서적 보관 창고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를 지나가던 한 인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 결과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총의 의해 최후를 맞게 되고 전 세계는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이유였다는 그의 저격동기를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바로 디 하버 오스왈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오스왈드와 너무나 비슷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도 복잡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네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들에게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들은 지나치게 시기와 질투를 하며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린 요셉에게 미움은 집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찾아간 요셉은 바로 형들에 의해 제거됩니다. 목숨을 잃을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한 형의 제안으로 노예로 팔리게 되어 겨우 목숨만은 무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린 동생 베냐민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낯선 외국땅에서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스왈드처럼 불행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불운한 사건을 여러번 만났으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시련에 굴복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큰 나라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흉년의 위기에서 살려내고 나라의 살림을 부강하게 올려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 된 것입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두 젊은이 오스왈드와 요셉을 하늘과 땅처럼 전혀 다른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준 것은 무엇일까요? 똑같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1.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가장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가장 지능이 우수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이유와 살아남아서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가 강한 의욕과 원동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유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포기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살 수 있는 방법은 더이상 없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위기에서 버틸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낙심케하고 좌절하게 하는 포기는 죽음의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지 않을 때도 매일 매일 찾아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학생에게 찾아와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하거나 운동을 결심한 사람에게 찾아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종용합니다. 영적 성장과 존귀하게 쓰임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께 헌신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와 이제 그만 중단하고 포기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다짐한 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날 때 사람들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포기보다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꿈입니다. 꿈이 분명하다면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세력과 맞설 수 있습니다. 꿈을 확신한다면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쉽게 굴복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로 맞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꿈을 갖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이 없는채 무언가를 도전하니까 몇번의 시도 끝에 중도에 포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늘 꿈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꿈을 붙들어야 합니다. 포기의 유혹이 강할 때 다시한번 더 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꿈을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밭에서 형들과 함께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자신이 묶고 있는 곡식단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들의 곡식단이 일제히 자신을 둘러서서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을 하는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다음날 형들에게 지난 밤 꾼 꿈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형들이 화를 버럭 내며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하고 말하며 요셉을 전보다 더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하 그 꿈의 뜻이 내가 형들보다 높아져서 존귀한 지위를 얻고 형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 요셉은 또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았더니 하늘에서 해와 달과 열 한개의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신이나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또 꿈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를 꾸짖습니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네게 엎드려 절한다는 말이냐?" 요셉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상한 꿈을 반복하여 꾸었는데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큰 인물로 쓰시려나 보다. 형들은 물론 부모님들까지도 내게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높은 사람이 되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 꿈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겼습니다.

그리고 틈틈히 그 꿈을 생각하고 행복해했습니다. 어려운 순간이 올 때도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만날 때도, 현실이 꿈과 정반대로 갈 때도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시기해도, 노예로 팔려갈 때도, 누명을 썻을 때도, 감옥에 갇혀 오랜 세월 잊혀진 사람으로 지낼 때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꿈을 포기했다면 막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범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반듯하게 살았습니다. 꿈을 품고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막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이 왜 형들에게 그 꿈을 자랑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꿈을 말하므로 형들에게 더 미움을 삽니다. 그리고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갑니다. 철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말해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꿈은 자랑해야 마음속에 깊이 각인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꿈을 말하지 않으면 꿈은 쉽게 잊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봄에 침미준 임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회장이 미리 이메일을 통해 서로 인사하는 시간에 자기의 목회철학과 교회의 비전 등을 나누도록 준비를 해 오라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울 것이 많겠다고 생각하고 나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를 철학으로 삼았다는 것과 우리 교회의 백 천만 비전과 D12비전을 정리해서 프린트해 가지고 30여장 복사를 해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누는 시간이 되어 돌아가며 말하는데 처음 사람이 자기는 특별한 목회 철학이 없다며 어떤 구체적인 비전도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 비슷하게 간단한 자기 소개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들중에는 대부분 대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그중에 수 천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고민하였습니다. 갈등하였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작은 중소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교회 사이즈도 작은데 만약 준비해 간 것을 내 놓으며 꿈을 자랑한다면 속으로 비웃겠지?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나만 처음에 와서 튀면 눈총을 받겠지?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만 준비해 간 유인물을 배포하지도 못하고 저도 비슷하게 교회와 이름정도만 말하고 말았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꿈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미움을 사고 시기를 받으며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하고 꿈을 자랑해야 합니다. 꿈을 자랑함으로 인해 망신을 당하면 꿈은 더 깊이 각인될 것입니다. 꿈을 표현함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면 당장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꿈은 완전히 내것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큰 꿈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을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꿈을 자랑하다가 비웃음거리가 되고 시기를 받고 비싼 대가를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꿈을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새기고 아무도 지우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꿈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꿈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형들에 의해 팔려갈 때도, 억울하게 누명을 스고 감옥에 갈 때도 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시키는 과정임을 믿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1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 특별한 일도 없이 지나갈 때도 하나님은 그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청지기로 있으면서 인사관리, 재정관리, 창고관리 등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도 크게 쓰임받는 사람은 윤리적으로도 실수하지 않고 흠이 없어야 함을 깨닫고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요셉의 준비는 게속되었습니다. 죄수들 뿐 아니라 간수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힘쓰며 많은 사람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섬기는 훈련을 통해 지도력을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요셉은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의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충만한 상태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간수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어 애굽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그런 요셉의 믿음이 그로하여금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창41장에 보면 애굽왕 바로가 요셉을 만나보고는 신하들앞에서 이렇게 인물평을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있으리요.' 그리고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헤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넢은 것은 왕좌뿐이니라." 그래서 요셉은 실질적으로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권자가 되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요셉은 불신자의 눈에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즉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을 사는데 얼마나 힘썼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가장 그의 믿음을 절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그를 죽이려했던 그의 형들이 살아남기 위해 양식을 구걸하려고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에 찾아왔을 때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소년시절에 꾼 꿈 그대로 요셉앞에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눈을 들어 자신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바로 그들에 의해 노예로 팔아 넘겼던 당신의 아우 요셉이라고 자신을 밝힙니다. 그순간 형들은 반가웠을까요?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하나도 반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 꼼작없이 죽었구나! 우리가 얼마나 요셉을 미워하고 괴롭혔으며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아넘기기 까지 했는데 우리의 모든 악행을 지금 절대 권력을 한 손에 쥔 요셉이 복수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잇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얼마나 멋진 신앙고백입니까? 얼마나 그의 안에 담긴 훌륭한 믿음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까? '나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해 유학을 온 것입니다. 나에게 큰 꿈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완벽하게 준비시키려고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 곳까지 인도하셨고 특히 지금과 같은 흉년의 위기속에서 수 많은 생명을 구하려고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보내셔서 다 예비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있는 믿음을 여러분도 이처럼 멋있게 표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없는 사람과 믿음있는 사람은 주변에 힘들게 하는 사람, 괴롭히는 사람을 만날 때 구분이 됩니다. 믿음없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누구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늘 원망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자신의 실패, 자신의 범죄, 자신의 방황이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합리화하고 사람을 미워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있는 사람은 그 너머에서 역사와 환경, 사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사람탓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직접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자신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힘씁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여기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불신의 사람보다 위대한 점이 바로 이런 것에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꿈은 없고 믿음만 있는 것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꿈은 있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꿈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큰 꿈을 소유하였으되 믿음의 그릇도 큰 사람입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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