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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은혜되게 하라 (롬 1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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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혜가 은혜되게 하라
본문- 로마서 11: 6- 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날마다 간구하시는 줄 믿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정서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에게 가깝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요즘 우리에게 나오는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서 레바논을 침공한다거나 혹은 다른 나라와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는 혹은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연약한 나라를 굉장히 억압하는 그러한 강대국처럼 이미지가 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정서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렇게 가까운 마음이 없지만 우리가 성경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복음이 성취되는 그 날,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신다고 하셨고, 그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그 약속이 게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유다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당시에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까지 전파가 되고, 로마로 중심해서 이제 유럽으로, 영국으로,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이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 대륙으로, 남미 대륙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복음이 계속 서진해서 태평양을 건너서 중국으로, 일본으로, 한국으로, 필리핀으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계속해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건너서, 서남아시아를 건너서, 그리고 아시아의 끝이기도 한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도 교회는 몇몇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중심으로한 성경이고, 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그러한 종교적 신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예수를 믿는 기독교를 그들은 심각하게 핍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교회 밖에 십자가를 걸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의 종교적 핍박은 심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예루살렘에 우리가 말하는 복음의 깃발이 꽂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온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보편적으로 선포되는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께서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선교의 완성지인 예루살렘에 예수의 깃발을 꽂는 그 날, 그 날을 위해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선교가 완성되는 그 날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원은 은혜로 된 것인 줄로 믿습니다. 6절에 보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행위나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교회가 커지고 나면 점점 교회의 시스템이 율법화 되어져 갑니다. 점점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교만해 집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점점 오래될 수록, 점점 오래 믿을수록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본받아 나아가야 될 터인데, 점점 그리스도께서 요구하는 성도의 성품과 마음과는 먼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이 고착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끔씩 그런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평안의교회 정착하는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러사람들에게서 그런 고백을 들을 때 담임목사로서는 굉장히 미안하고, 죄송하고,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보면 평안의교회는 흔히 하는 말로 터줏대감이 있어서 교인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들어가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아도 조금씩 새로운 성도들이 그 속회나 선교회에 편입하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들이 편입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디딤돌 역할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거침돌 역할을 하셨습니까? 편입하기가 어려웠다고 하는 고백이 있는 것은 거침돌 역할을 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순수함보다는 우리의 신앙의 경력이 쌓여져 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습들이 점점 자리매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흔히 기득권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온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쳐다보는 눈길이 달라요. 그럴 때 새로 온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해요? 어머, 내가 얼마 온 지 안 되서 이야기하니까 지가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나? 그런 눈치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움찔거리고, 위축되고, 분명 아무래도 참여하는 참여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인데, 행위나 율법으로 된 것처럼 그렇게 분위기가 되어져 간다고 하면 그것은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건강하고, 부흥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부흥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숫자상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니키 켐벨이라고 하는 분은 부흥이라고 하는 부분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결한 예배로, 그 거룩한 삶의 에너지가 사회적 의를 이루고, 그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점점 끼쳐갈 때에 그 교회를 가르켜서 부흥하고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몇 명에서 몇 명으로 그것이 숫자적으로 증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선한 영향력들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우리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우리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영향력이 전달 되어질 때 비로소 교회가 부흥되어 있고, 교회가 건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까? 교회의 부흥이 목사에게서만 여러분이 목 매달고, 목사님으로만 부흥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부흥은 언제나 거룩한 목마름이 된 곳으로부터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1904년 웨일즈에 17명의 젊은이로부터 시작된 교회 부흥의 영적대각성 운동이, 1905년에 인도로, 1906년에는 미국 아주사의 작은 마을에서, 그리고 1907년에는 평양의 장대현교회 1월 사경회 집회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Again1907년으로 돌아가자, 한 번 그 때에 영적대각성 부흥운동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고 하는 것이 일 백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백년 전에 영적대각성의 부흥운동을 기념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1907년 이후의 영적대각성의 삶을 우리가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이가 교회 부흥을 위해서 목사님 앞에 와서 질문합니다. 어떻게 해야 부흥할 수 있습니까? 그 때 그 분은 이렇게 권면을 드렸습니다.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당신의 집에 돌아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기도합시다.

당신이 기도하면서 당신이 무릎 꿇은 자리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이 동그랗게 원을 그린 이 자리부터 이것부터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부흥의 목적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속회가 왜 이렇게 부흥이 안 될까? 속회를 보면 속 터지는 속회들 많지요? 20- 30명 회원들이 있는데, 3- 4명 모이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도 속회라고 모이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속회보고서 보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심령들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계십니까? 우리 선교회가 20명인데, 5- 6명 모이면서 그것도 속회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한 주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얼굴이 뻣뻣해서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청장년속회들, 우리 남선교회 속회들 20- 30명 되는 회원들 중에 3- 4명씩 속회로 모이고, 그것도 속회라고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에이, 우리 회장이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우리 속장이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우리 강사가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우리는 다들 바빠서, 우리는 다들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스스로는 위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끌어안고 무릎꿇고 기도하시는 그 자리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바로 그 원 안에 있는 나로부터 이 원 안 바로 여기서부터, 부흥의 불길이 영혼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인데, 시간이 갈 수록 구원의 행위로 된 것처럼 변질되고, 변형된 것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하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적인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건강하지 못한 부흥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상태, 왜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하고, 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부흥하지 못하는가? 혼미한 심령을 가졌기 때문에, 건강한 생각을 가지지 못 했기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도 그들은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적과 기적을 보여 주어도 그들은 보지 못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택하셔서 이방인을 구원하셨고, 택함을 받지 못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사모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서 넘어지고, 이스라엘이 실패함으로 세상이 부요하고, 이방인이 구원의 부요함을 얻었다고 하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충만해 지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다가온다고 하면 세상이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겠느냐? 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굳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귀가 굳어져 있고, 눈이 굳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기득권을 선택하려고 하면 이미 그의 귀는 그의 눈은 닫혀져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우리의 모든 말씀들이 들려지고, 보여질 줄로 믿습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가는데, 옛날에는 심방을 가면 심방한 목회자를 안내하고 대접하는 자리가 안방입니다. 안방이 아무리 침대가 놓여 있어도 안방에서 예배를 드려야 정성껏 목사님을 대접하고, 예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요. 안방의 침대에 들어온 것이 오래되지 않습니다.

원래 안방에는 자리를 깔게 되어 있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안방에 침대는 놓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안방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좀 불편하기 시작을 했어요. 하지만 90년대 이전까지는 그래도 무조건 손님이 오거나 주의 종이 오시면 무조건 안방에서 대접을 했습니다.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거실에서 대접을 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그것은 아주 홀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아파트나 집들은 안방이 컸습니다. 12자, 8자 그 이상이 되어야 아주 안방이 넉넉해서 좋다고 그랬습니다. 안방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안방은 그 가정에 상징적인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돈 좀 벌면 안방에다가 자개장롱, 18자, 20자짜리 자개장롱을 걸어놓고 사람들이 오면 자개장롱을 보여주고, 문갑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가 되면서 우리의 거주문화가 서구화로 급속하게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방, 건넌방, 그러면서 방의 싸이즈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을 했고, 반면에 거실이 점점 커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베드룸, 침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잠자는 그런 공간으로 안방이나 그 방의 의미가 축소가 되기 시작을 했어요. 외국에 가면 보통 집이 2층 구조가 되어 있어서 1층은 거실과 부엌과 서재 등으로 구성되어져 있어서 일반인들이 집에 오면 1층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거기는 방이 2개냐, 아님 3개냐, 그것은 잠 자는 방이 둘이냐, 셋이냐, 잠 자는 방 밖에 없고, 남의 집에 가서 함부로 2층에 올라가는 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2층 구조는 아니지만 이제 한국도 가정을 방문하면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거실에서 회의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아직도 주책스러운 사람들은 무슨 입주예배를 드리거나 아파트 입주한 집에 가면 방 좀 구경하자고 안방문 막 열고, 이 방, 저 방 막 구경하는데, 아주 실례되는 일이예요. 이제는 그러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교인들은 아주 젠틀해야 하거든요.

이제는 그러지 마세요. 주인이 우리 방 좀 구경하실래요? 하면서 주인이 열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안방문을 열어봐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21세기입니다. 많이 달라졌어요. 이제는 담임목사님이 심방을 가도 안방에서 예배를 안 드려도 제가 기분나빠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삶의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에 거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삶의 패턴도 달라지고 가치도 달라졌어요.

오래전에 이야기입니다. 안방에서 예배 드리려고 들어가는데, 냄새가 진동해서 제가 죄송하지만 코를 막았어요. 무슨 냄새예요? 담배냄새, 니코틴냄새, 얼마나 그 방안에서 담배를 피워댔는지 니코틴 냄새가 아주 쩔었어요. 막 구토가 날 정도예요.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도로 나왔어요.

그 성도님한테 말했어요. ‘집사님, 도저히 여기서는 예배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고 그래요. ‘목사님, 뭐가 어때서 그래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랬지요. 아, 이 분도 같이 중독이 되었구나.

여러분 어제 뉴스를 보니까 우리 여성들이 폐암환자 사망률이 높은데, 그 폐암환자 높은 확률이 높은데, 자기는 평생 담배 한 대도 피워보지도 않았는데, 너무너무 억울하다는 거예요. 알아보니까 남편이 골초이고, 부모가 하루에 담배 3- 4갑 피우고, 간접흡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남편이 2갑 피면 부인은 안 피워도 한 갑은 피운 거예요. 그것도 그 방안에서 담배를 피워대고 있으니, 그 담배가 어디고 가요? 그 니코틴이 어디로 가냐고요? 옛날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남편들이 집안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죄송하지만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간 큰 남자지요? 아직도 그런 남자가 있을까요? 아마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정말 담배를 못 끊어서 담배를 피고 싶으면 저 뒷 뜰에 가서 담배를 빼꼼빼꼼 피다가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됐나? 끊어야지 그러고 들어오고, 그러는 수준이예요. 이제는 웬만한 공공건물, 기차 비행기 다 금연지역입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어요.

그 분은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는 분과 한 방에서 살다 보니까 남들은 냄새가 나서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 방을 거기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알고보면 불쌍한 일인데, 본인은 불쌍한지도 모르고 사는 거예요.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왜요? 왜 이상해요? 그러면서 오히려 반문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내가 심령이 혼미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면서도 내가 정상인 줄 알고 내가 어때서요? 라며 다른 사람에게 반문하고 대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 지경이다. 그 말이예요.

그런 그 이스라엘은 우리 주님이 아직도 불쌍히 여기시고, 아직도 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그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주님이 눈물로 간구하신다 그 말이예요. 성령께서 아직도 애통해 하신다 그 말이예요.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 입니까? 또 비교합니다. 9절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며’ 이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끼의 밥을 먹습니다. 하루 세끼밥을 먹다보니까 우리가 밥을 먹어야만 힘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한끼만 안 먹어도 굉장히 힘들어 하지요.

어떻게 우리가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가 사순절 같은 때 고난 주간 같은 때 우리 주님의 십자가 달리신 이 고난 주간에 금요일 하루만 금식하십시다. 그래도 그 세끼 그 하루 금식을 못해서 쩔쩔 매는 오랜 믿은 성도들 참 불쌍하지요.

우리 고난주간, 우리 주님이 십자가 못 박힌 날부터 최소한 3일만 금식하십시다. 3일 금식 식은 땀이 나지요. 우리 고난주간 일주일만 금식하십시다. 그럼 교회를 안 나오면 안 나왔지 금식은 못한다는 사람이 생깁니다.

언젠가 우리 1월1일 여주기도원 가서 권사, 장로님들을 모시고 우리 기도원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금식을 시켰습니다. 우리 3일동안만 금식합시다. 뭐 기도원 가서 금식하는 것이니까 나가서 몰래 사 먹을 수도 없는 것이고, 다들 금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나서 3일째 되는 날 여주 시내로 봉고차 세대가 들어왔습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갑시다. 설렁탕 먹으러 갑시다. 설렁탕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도착을 해서 한참 설렁탕을 끓이는 중에 먼저 깍두기를 다 상에 내왔는데, 그 시뻘건 깍두기가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어요. 매운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 먹는게 중요한 거예요.

순식간에 상마다 깍두기가 동나서 아주머니, 깍두기요, 깍두기요! 난리가 났어요. 아니 이 분들이 웬 깍두기를 왜 이렇게 많이 잡수시지? 우리가 3일을 금식했거든요. 우리는 먹어야 살아요. 육신적으로는 먹어야 건강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이 밥상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거치는 것이 되고, 보응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굉장히 해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서울 시내에 그래도 훌륭한 목사님들 설교를 참고해 봤어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이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탄이 유혹할 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육신의 양식도 먹어야 하지만, 날마다 하늘의 만나 말씀을 먹어야 건강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귀중한 뷔페를 잡수러 오신 거예요. 싸구려 뷔페 아닙니다. 꽤 품위있는 뷔페입니다. 힐튼호텔을 가니까 뷔페가 45000원이더라구요. 먹을 거 많더라구요. 그거 먹고 나오는 사람들, 목사님, 감사해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더라구요. 왜? 45000원이래. 굉장히 비싼거야. 굉장히 좋은거야.

여러분 평안의교회 주일아침 뷔페 괜찮은 거지요? 먹을만 해요? 저도 이왕이면 상을 잘 차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거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양식, 그것을 먹어야 건강한데, 이게 잘못되면 예수 오래 믿어도 순수하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우리가 강팍해 지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강팍해 져요.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 건강해 져야 하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탈난다 그 말이예요. 이스라엘이 그런다는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면 선포할 수록 그들은 더 강팍해 져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죽일까?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예요. 바울사도가 성령의 말씀을 선포하면 선포할 수록 그 유대인들은 작당을 해서 저 바울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한다 그 말이예요.

교인들 중에도 말씀을 들으면 순수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말씀을 받고, 그 성도의 눈을 보면 두꺼비가 파리 잡아 먹듯이 아멘아멘 하면서 말씀을 받는 사람이 있고, 예전에는 순수했지만 지금은 조금 흐려졌지만 그래도 말씀을 받으면서 회복되어서 주여 어찌할꼬, 마음을 뜯으면서 회개하면서 은혜를 회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강팍해지고 더 굳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도 있을 거예요. 없으란 법은 없지요. 그러니 설교를 듣고서 은혜의 말씀, 풍성한 양식을 나누면서 나가면서도 인사할 때 인상 퍽 쓰고 가는 사람이 그 사람 아니겠어요? 예배시간에 1부, 3부 그런 사람들보면 한 두명 있더라구요. 성경에도 있다고 그랬는데, 우리에게도 없으리란 법은 없지요.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오죽하면 바울사도가 이 다윗의 고백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밥상이 너희에게는 올무가 되고, 거침이 되고, 덫이 되었는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밥상을 발로 차 버리고, 그 귀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버렸잖아요.

사람이 강팍해지면 그 정도까지 가는 것입니다. 은혜로와지면 말씀은커녕 찬송 한 장만 들어도, 찬양대의 찬양을 들어도 가슴이 그냥 푸근해져 가지고, 속에서부터 그냥 후련해 지고, 주님의 손의 어루만짐을 느끼고, 눈에서 눈물이 글썽합니다. 오늘도 찬양이 좋았어요. 오늘 찬양하는 모습이 참 이뻐가지고, 업어주고 싶어요. 실제로 업어는 못 드려도 제 마음은 그렇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만 들어도 그냥 막 마음 속에서 은혜가 충만하고,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그렇게 은혜가 찬양만 들어도 되고, 말씀을 들으려고 주의 종 얼굴만 쳐다봐도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말씀을 선포해도 점점 굳어지고, 강팍해 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 이스라엘도 주님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위해서 애타게 사모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서두에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복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구원은 은혜로 된 것인 줄로 믿습니다. 구원은 사랑으로 된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가 은혜되어지는 삶이 바로 우리 평안의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이 아침 귀한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은혜가 은혜되게 하옵소서. 강팍하여 거치는 돌이 되고, 올무가 되고, 덫이 되어지는 저희들 되지 않도록, 그러나 저 이스라엘조차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사모하시며 성령께서 눈물 흘리시는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진 성도 있습니까? 그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 어루만져 주시고, 거두어 주시옵소서. 은혜가 은혜되어지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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