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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실의 계절 앞에 (눅 13: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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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9월로 접어드니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하늘도 높고 바람도 산들산들, 한국의 가을은 외국사람들이 아주 감탄을 한답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계절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현승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누가 뭐래도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열매가 있어야 할 이 무화과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내 인생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열매가 없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열매 없었던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1.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무화과나무의 책임이 뭡니까? 무화과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재목으로도 쓸 수도 없고 뗄감용으로도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 목적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의 존재이유와 인생의 존재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신 이유, 그들을 품으시고 가르치시고 3년 동안 삶을 같이하신 이유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열매를 위해서였습니다. 요13장부터 18장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치신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워지는 한 토막입니다. 그 중에 요한복음 15장은 우리가 흔히 포도나무 비유의 장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기 때문에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맺을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있는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까지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이 단어를 가르칠 때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또 다른 열매 즉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가운데 보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열매를 맺는 가을이 되었는데 당신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그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정말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천국의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주님의 교훈을 침묵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에 보기에 미친것처럼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교회가 제자훈련과 여러 봉사하는 일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강조합니다마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배우고 또 그 섬김을 통해 "나를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워진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하는 '전도의 열매'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갈5:22절의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니고 단수입니다.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여가지가 아니라 한가지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그 한 인격 속에 9가지의 특성이 다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분,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던 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 참을 줄 알았던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사람은 물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질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구조조정, 구조조정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몸부림쳐 왔습니다마는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됐어요. 사람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100번 바꿔도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사람이, 사람이 됩니다.

탕자를 보세요.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고 너무 많이 타락돼서 나는 아들자격이 없다. "머슴꾼의 하나로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굶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이런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만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하고 만납니다. 그 때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는 순간, 나의 더러운 과거 부끄러운 모습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영광된 잔치에 참여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으로 덮었습니다. 사랑으로 감쌉니다. 거기서 녹아져서 그는 아들의 정체의식을 가지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아버지와 만나는 관계에서 새사람이 된 것이에요. 자! 금년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 가을의 문턱에서 자신을 돌아보세요. 정말 그 은혜 앞에 내가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주님의 성품이 내 속에 열매로 자라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졌습니까? 6절을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사막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 재배를 참 많이 합니다. 무화과나무도 많이 나구요 무화과열매 포도열매 이런 것들이 많이 생산되죠. 그런데 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 포도나무도 심고 또 무화과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좋은 포도원, 좋은 땅에 심겨진 것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 그러면 좋은 땅에 심어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얘기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누리고 있었든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가 뭡니까? 그것은 '선민'이라는 특권이에요 나는 선택을 받았다. 우리는 선민이다.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죠. 베드로전서에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가 택하신 족속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놀라운 특권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이 선택은 분명히 특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보세요.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또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제대로 된 열매를 좀 맺어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건 어마 어마한 특권인데, 놀라운 특권인데 그렇다면 이 특권에 합당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열매를 맺는 이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 요즘 우리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줄 모르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있는 이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동체 생활할 때도 교회생활 할 때도 뭐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요.

2.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했습니다.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의 유치한 습관이나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무조건 변화는 싫어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란 없는 겁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예수가 들어가면 더 이상 생명이신 '고착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은혜 앞에 세상 속에 영향력을 끼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였지만 그러나 그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부쳐진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염병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염병, 여러분, 생각나십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옘병이라고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염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것은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때문에 "저들은 염병이다! 저들은 염병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또 하나의 별명가운데 이런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에 바울의 일행이 들어갔을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을 원문의 뜻을 보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던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은 아닐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을 빼앗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경고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한 크리스챤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프로는 '벤치워머'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벤치워머가 무엇인 줄 아세요? 벤치워머란 '의자를 따뜻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교회에 와서 한시간 예배 드리면서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만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나가는 것이 이 교회에 유일한 기여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자신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가리켜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말씀하는데, 저는 이 본문이 눅13장에 그 앞서 기록하고 있는 어떤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4절 한번 읽어보세요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갈릴리에서도 사고가 났고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어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있었든 어떤 사고에 관한 얘기를 예수님이 하신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사고가 일어나면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변에서 내 이웃사람이 뭐 교통사고가 났다, 뭐 좀 안됐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은 '글쎄 그 사람 죄 때문에, 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그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아니야, 너도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이웃 사람들의 비극에서 '경고'를 받아야 된다 말이죠. "그래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야. 너도 이렇게 될 수가 있어!" 우리는 이웃들의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나 사고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경고로 보면 됩니다. 지금도 내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보면서 그것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나를 향한 경고,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다. 어쩌면 내 인생도 한순간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나를 쪼여 들어오는, 내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위험을 나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싸인이다" 말이죠.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너도 이와 같이 망할 수가 있다 그걸 아느냐' 이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 도 좀 진지해지고 좀 달라져야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과원지기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8절을 다시 보십시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 말은,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보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비굴하리 만치 애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땅만 못쓰게 만들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주님은 나하나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너무 값비싼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영광의 보좌도 뒤로하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정말 너무나 많은 수치와 아픔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고난 앞에서도 나하나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과원지기이신 주님은 주인한테 애원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 은혜를 알았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향기 나는 제물로 아낌없이 주 앞에 드렸습니다. 여러분!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셨잖습니까? 2차 세계대전 때에 체코계의 독일인이었던 주인공 신들러가 폴란드의 크라코프시의 군수물자 생산공장의 주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그들을 수용소에 보내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을 보호하며, 먹을 것을 공급해주고 여러 가지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돌보아야 할 명단을 기록해 두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알은 유대인들은 모두 신들러의 수첩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많은 분들이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1100명의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에 독일이 망하고 신들러에 의해 살아 남았던 유대인들은 신들러가 정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도록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들러가 죽었을 때 예루살렘에 그의 묘지를 만들고 묻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생명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갚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는 꼭 갚아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 주위의 많은 성도들의 수고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꼭 갚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선교사는 대동강변에 성경을 들고 서서 복음을 전하려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희생되었습니다. 그의 주검이 장사나 제대로 치러졌겠습니까?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펜젤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 분명히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현재 폭발적인 부흥을 하고 있는 중국교회에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나 불행해 보였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그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33세의 꽃다운 나이에 풍토병으로 아내를 먼저 보냈습니다. 첫딸도 죽었습니다. 둘째, 셋째도 다 죽었습니다. 나중에는 자녀들이 그리운 나머지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낮에도 온 종일, 그리고 저녁에도 내 딸 음성이 그리웁다. 그러나 그 아이를 심은 정원사가 오시어 그 예쁜 장미꽃을 뽑아 가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삶으로 바꾸세요. 구체적인 열매를 향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엄숙한 이 명령 앞에 어느 날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호되게 닦아세울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대답은 오늘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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