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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에 대한 버릇을 고칩시다!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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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

태초에 하나님께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동산에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갈라지고 단절되어졌는데, 그 Gap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믿는자라면 모두가 하나님 자녀로의 관계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자녀삼으시고, 좋은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 선물을 주셨습.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이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

구약시대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형이 되는 것이 있었습. 성막. 그 중 성소안에서 백성들은 향을 피워 올렸습. 그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과 정성이 하나님께 올려 바쳐진다고 생각했습. 신약시대와서 이 분향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계5:8이 설명해주고 있습.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향이었고, 그 향이 바로 신약시대 즉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기도라는 것입. 우리의 마음을 딱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불가능합. 너무나 여러 마음이 있기 때문입. 그래서 계5:8절에도 기도라는 단수를 쓰지 않고, 기도들이라는 복수를 써서, 우리의 마음 전체, 삶 전체가 기도가 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
신자는 바로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언행심사를 아뢸 수 있다는 것입. 그러기에 기도는 너무 중요한 나머지 ‘신자의 생명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

그런데 이 신자의 생명줄인 기도를 신자인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붙잡고 있습?
참 부끄러운 보고입니다만은, 어느곳에서 수련회에 모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다고 합. 약 70명 정도의 목회자 들에게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 하고 물었는데, 5분 이내로 기도한다는 분이 약48명, 5분에서 10분 기도한다고 응답하신 분이 12명, 10분에서 30분 기도하신다는 분이 9명, 그리고 하루에 1시간 이상 꾸준히, 정기적으로 기도한다라고 대답한 분이 단 1명이었다고 합.
정해진 대상을 놓고 조사한 것이지만, 이 결과를 한국 목회자들 전체의 비율로 봐도 결코 과언이 아닐것이라 생각됩. 그리고, 목회자들이 이렇다면, 평신도들의 기도시간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

요즘들어 한국 교회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아십?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입. 생명력을 왜 잃었을까? 생명줄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 생명력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인데, 이 땅에 4분의 1 이상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는 크리스천들이, 점점 이 생명줄을 놓고 있기에, 교회에 있어야 할, 나아가 이 온 땅에 있어야 할 생기가 자꾸 꺼져가고 있다는 것입.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던 한국 선교사와 미국선교사가 있었습. 방학이 됐는데 이 미국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해서, 한 달 일정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게 되었습. 도착하는 시간이 밤늦은 시간이었는데, 도착하면서 창 밖을 보니까 빨간 십자가가... 그래서 미국 선교사가 한국엔 웬 무덤이 이리도 많냐?고 하니까, 그건 무덤이 아니라 교회 종탑의 십자가라고.. 아 그러냐고 미안하다고 하고, 도착해서 그 다음날부터 한국의 내로라 하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탐방을 하고, 한 달이 다 돼서 돌아가는 저녁 비행기를 탔는데, 창밖의 십자가 들을 보면서, ‘내가 잘못 본 것 같지 않다고..’ 말하더랍.

물론 이 땅에 모든 교회가 다 죽어있는 교회는 아닐것입.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한 달 동안 한국교회 들을 둘러보고 떠나면서 말한 미국 선교사의 멘트에 완강하게 부정하지 못했던 한국 선교사의 모습에, 저와 여러분도 어느정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

다시 생명줄을 붙잡아야 합. 그리고 한 번 잡으면 좀 오래 잡고 있을 필요가 있습. 우리의 기도 시간이 너무 짧아진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닙. 마음이 담긴 기도, 진실된 기도, 구체적인 기도제목들을 세워서, 하나씩 하나씩 깊이있게 올려드리는 기도가 우리안에 다시 세워져 나가야 할 신앙의 버릇이 되야 할 줄 믿습.

그리고 우리안에 가장 크게 변해야 할 기도에 대한 자세는,
기도는 대화라는 것입. 그래서 깊은 기도는 듣고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입.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만이 기도의 전부라는 인식에 대한 전환이 필요합.
오늘 말씀 8절에 보면,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고 말씀하고 계십. 많은 사람들의 기도의 모습은 마치, 내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하나도 모르신다는 전제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 그래서 나의 모든 필요를 열심히 통보하는데서 기도를 그칩. 하지만 주님께선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하십.

행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가 나옵. 베드로가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있던 마술사 시몬이, 너무 신기해서 그 능력을 돈주고 사려고 합. 그랬더니 22절에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말합. 여기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기도하라는 헬라어로 ‘데오마이’인데, 이것은 붙들어 맨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 즉 기도는 나를 주님께 붙들어 맨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
나를 주님께 붙들어 매려면 나 혼자만 떠들어선 안됩.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그 말씀에 나를 묶을 수 있습.

여러분 이판사판이라는 말 들어 보셨죠? 이게 어디 용어? 불교 용어. 이 말은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이판이라는 것은 이판승, 즉 이치를 판단하는 승려를 말하고, 사판은 사판승, 즉 일을 판단하는 승려를 말합. 불교의 모든 행정을 보는 사람들은 사판승이라고 합. 가끔 신문에 나오는 각목들고 싸우는 승들도 사판승입. 언뜻보면 이 사람들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불교의 뿌리를 잡고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게 계속 유지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나름대로의 도를 갈고 닦는 이판승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
카톨릭에도 이판과 사판이 있다고 합.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교황이나, 추기경, 주교, 신부등 밖에서 드러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 다 사판들입. 하지만 카톨릭을 계속적으로 존재케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판들입. 수도원의 수도사들입.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 불교의 이판승들이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는 다는 것입. 말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듣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입. 침묵이나, 묵상을 더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 내 안에 욕망의 소리들을 자신의 신에게 부르짖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신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듣는일에 더 급급한 사람이라는 것입.
전,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지려면 우리의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믿습.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 주님께서, 무엇인가가 필요한 나를 지금 어떻게 보고 계시며,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말씀묵상이나 듣는 기도를 통해 듣고, 그 다음에 말하고 행동하는 자가 되야 한다는 것입.
서울법대에서 법을 전공하면서도 국악에 심취해서 가야금을 배워 그로인해 한국국악을 외국에 널리 알리신 황병기 선생 이란 분이 계십.
1989년도에 정부에서 에밀레 종 타종을 그 해를 마지막으로 금지시키기로 했습. 황선생은 마지막 타종을 듣기위해 일부러 경주로 내려갔습. 그래서 마지막 종소리를 가장 잘 들으려고, 군중들의 맨 앞에 서 있었습. 타종이 임박한 순간, 타종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경주 박물관장이 군중틈에 있는 황병기 선생을 알아보고는 함께 타종을 하자고 올라오게 했습.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올라가 긴 통나무를 잡고 자정이 되자 첫 번째 타종을 했습. 그런데 이런 타종은 연달아 치지 않습. 한번 치면 그 소리의 여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칩. 그런데 이 마지막 종소리의 주인공인 에밀레종은 세계에서 여운이 가장 긴 종이었습. 한 번을 치고, 두 번을 쳤습. 그러자 황병기 선생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 버렸습. 왜냐하면 세계적인 종의 그 마지막 외침을 들으려고 갔는데, 종소리가 한 번씩 날 때마다 모여든 군중들이 지르는 환호성에 그만 가장 가까이서 종을 치고 있으면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입. 그런데 내려오는 황선생을 어떤 노신사가 붙잡았습. 왜 내려오십? 이차저차 사정을 말했더니, ‘그러면 저기 보이는 저 언덕위로 올라가십시요, 그러면 들릴 것입.’ 반신반의 했습. 바로 앞에서도 들리지 않는 종소리가 저렇게 먼 언덕위에서 과연 들릴까? 밑저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올라갔습.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수많은 군중의 환호성은 거의 들리지 않고, 참으로 명확하고도 깨끗하게, 그리고 그 긴 여운까지도 정확하게 자신의 귓전을 때리더라는 것입.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 나의 욕망이 뒤범벅된 외침 앞에선, 주님께서 아무리 가까이서 말씀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 다물어야 합. 아무리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급박한 상황에 몰려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분앞에 잠잠히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 진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에게 산이 터지고, 땅이 흔들리는 지진 속에서, 불 속에서, 바람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
[왕상19: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그의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 지려면, 그래서 그 깊어진 기도가 바탕이 되어 우리의 신앙과 영성, 그리고 삶이 더욱 깊어지려면,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의 길이와 그 깊이는 비례한다는 것임을 인정하시기 바랍.

듣는 다음에 말하는 것입. 제가 지난 한 학기 목회 상담 과목을 들으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최고의 상담가가 되려면 먼저 잘 듣는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것입. 맞습?

최고의 영성을 소유하고 싶으십?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시기 바랍. 그래서 그 놀라운 진리의 비밀들을 듣고, 그것을 간직하게 된다면, 그것들을 실천하게 된다면 깊은 파워를 소유한 신자가 될 줄 믿습.

말씀을 맺음.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기도하는 것은 말하라는 의미보다, 들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 기도할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즉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것입.
7절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다 보면 중언부언하게 돼 있습.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씀입. 왜? 8절에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입.

우리의 생명줄인 기도를 다시 붙잡읍시다.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나아갑. 그리고 그 시간을 늘려가되 내 말 만으로 그 시간을 채우다가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시간을 드리다가 일어납. 이 모습이 태초에 하나님과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습인 줄 믿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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