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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 나무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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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만드신 생물체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수명이 있습니다. 사람은 보통 70과 80년이 평균수명입니다. 거북이의 수명은 100, 200년이 되고,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물곰은, 약 1500년 동안 주로 잠을 자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 사는 것은 ‘나무’라고 합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얼마나 오래된 나무인가를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메두살레 나무’ 라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화이트 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소나무의 일종인데 마디가 지고 굴곡이 생기는 현상 때문에 살아있는 ‘부목’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나무 중에 가장 오래된 나무는 5000년이나 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수명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거의 초창기 때부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나무의 이름이 메두살레인고 하니, 이 이름은 성경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정확하게 하면 ‘메두살레’가 아니고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던 사람으로 969살까지 살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따라 이 나무도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더디게 성장하기에 100년에 3cm 밖에 굵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 하나님 지으신 세계를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우리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 넓고 광활한 대지와 높은 하늘, 망망한 바다와 우람한 산, 그리고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나무들을 보면, 모두가 그야말로 주님의 솜씨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보면서 인생을 배우고, 또한 신앙을 배웁니다. 산과 바다를 지나 이제 나무입니다. 성경에서는 나무를 무엇이라 말할까요? 오늘은 먼저 무화과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열매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주님은 이른 아침에 몹시 시장하시어 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저주하시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여름에 잎과 꽃이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4월경이었는데, 이 나무는 벌써 잎이 무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잎이 무성했으므로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나무가 다 그렇겠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 대표적인 나무인 무화과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무화과의 무성한 잎을 보면서 사람들은 열매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래서 교회를 다니고 믿음생활을 하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열매를 통해서 압니다. 그래서 주님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듯이, 열매로 신앙을 아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요, 하나님나라의 생명력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신앙의 열매가 없던 사람들입니다. 분명 의식은 있고, 형태는 그럴듯하게 갖추었지만 정작 신앙의 알맹이라고 하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독을 품다가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신앙에는 열매가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잎만 무성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못됩니다. 신앙은 열매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나는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하면서 어떤 열매가 있습니까?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신앙생활을 형식과 의식의 수준에서만 머무르고 있습니까?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좋은 계절 가을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하고, 예배의 열매, 기도와 전도, 봉사의 열매, 사랑과 구제와 겸손과 용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통해 나의 기쁨이 충만하고, 신앙생활의 맛이 넘쳐야 합니다. 매번 반복하는 신앙생활을 평생 은혜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게 신앙생활이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구나, 이렇게 맛이 있구나, 이게 기쁨이고, 행복이구나” 하며 느껴야 합니다. 이제 내 모든 신앙에 형식과 의식에서 탈피하여, 귀한 열매와 결실을 보면서 주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깊은 세계로 몰입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대입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이토록 심하게 말하고 저주를 선포하신 것은 반대로 그만큼 이 나무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기대를 배웁니다. 이 욕망의 바다에서 자기를 조절하면서 몸부림치며 바르게 살려는 여러분과 저에게 무화과나무는 기대의 대상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너무도 하나님과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작 기대를 갖고 있는 교회와 믿는 자에게조차 실망하는 일이 많아 모두를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홍성사라는 유명한 출판사의 대표이고, 목사로서 그가 지은 책들이 한국교회에 적잖은 자극과 도전을 줍니다. 그가 지은 책 ‘내게 있는 것’에서 그는 전 세계에서 보낸 편지를 소개하는 글을 부끄럽지만 여과 없이 기록한 것을 봅니다. 이 편지는 국내외에서 온 것인데, 목회자와 관련되고, 교회 혹은 성도와 관련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미주 한국일보 종교 컬럼을 오래 동안 연재했던 한 여자 기자가 마지막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이것이 한인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목사님, 제가 너무 심한가요? 저 보기에 교회와 교인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제 책상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장로를, 혹은 교회를 비방하며 보내온 투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또 험담으로 가득한 전화를 받은 것은 얼마인지요.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교회의 문제는 주도권 싸움에서 시작돼 돈 싸움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 교회의 분쟁을 예로 들어볼까요? 어느 쪽이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쪽 다 상대를 결사적으로 증오하며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하지요. 싸움이 절정에 달했던 3주 동안은 주일예배마다 싸움이 일어나 경찰이 출동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한쪽이 교회 자물쇠를 모두 바꾸고 주차장을 봉쇄한 후 입구에서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편만을 교회로 들여보냈고, 다른 쪽은 인근 주차장에서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곳이 교회일까요? 이것이 예배입니까? 이 사람들이 성도 맞습니까?”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잘 하는 교회가 많고, 잘하는 성도가 많고, 잘 하는 목회자가 더 많은 것을 압니다. 그러나 기대가 크기에 이런 것에 대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은 허전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의 어그러진 단면들을 보여줍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씁쓸하게 하는 편지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은 또 다른 편지를 소개합니다. 개인적이지만 모두를 향한 마음으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위대한 비전을 말하는 것보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를 후배들을 갈망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의 지나온 삶은 저에게 큰 도전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끝까지 저희들에게 실망을 주지 마세요.. please..."

  그는 이 편지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비수처럼 자기의 심장에 꽂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철아,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please"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기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끝까지 우리를 지켜보겠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강도가 크면 클수록 더 큰 기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남편은 아내의 기대요, 아내도 남편의 기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대요, 부모는 자녀의 기대임이 분명합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기대요, 성도는 또한 목회자의 궁극적인 기대입니다. 교회는, 분명 이 시대의 모든 교회는, 이웃과 세상과 열방의 기대입니다. ‘끝까지 실망을 주지 마세요, 플리즈...’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기며 살아야 말입니다. 주님의 기대로서, 사람의 기대, 세상의 기대로서,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최선을 다하시기 소원합니다.

  셋째, 한계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해서 주님의 책망을 받아 저주를 받았지만, 무화과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그의 한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애초부터 열매를 맺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해도 안 되는 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이 나무를 무섭게 저주한 이유는 이 나무를 통해 뭔가 교훈 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그것이 계속되는 말씀 속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맥없이 말라진 것을 본 제자들이 깜짝 놀라 주님께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통해 여기에서 두 가지의 영적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기도가 아니면,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내 삶에 관여하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간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며칠이 지나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 주님을 배신할 자들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알라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기도 없이,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도 주님을 실망시키고 배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과 행동과 삶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나의 한계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범죄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이 사탄의 꾀임에 빠져 범죄 했을 때 수치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이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고, 교만할 수밖에 없고,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가만 나두면 멋대로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고작 무화과나무로 자기 몸,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여전히 부끄러운데 그들이 만든 무화과나무의 잎은 부끄러운 죄를 지속적으로 가리기에 한계가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동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뭔가가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인간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영원히 가리기 위해 주님을 예비하셨고,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주님을 통해야만 뭔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구원이 없고, 의지하지 않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바로 이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분명 우리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의 한계가 있고, 죽음의 한계가 있습니다. 의지의 한계가 있고, 행동에 한계가 있습니다. 잘 해 보고 싶지만 잘 안 되고, 바르고 참된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고 행동할 의지가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기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한마디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잘 안되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된다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를 향해 기대하시며 실망시키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이제 내가 주님께 간절히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플리즈...”

  말씀을 맺습니다.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늘 나를 사랑하시며 기대하시는 주님 앞에,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도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열매맺는 신앙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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