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기도문 강해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9-13)

  • 잡초 잡초
  • 1287
  • 0

첨부 1


주기도문 강해 8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오늘은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죄 용서의 간구입니다. 요 근래 국회 인사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건데 과거의 죄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의자와 언론이 후보자의 과거를 이 잡듯이 뒤집니다. 과거의 탈세 경력, 위장 전입, 자녀의 부정 입학, 논문 중복 여부, 심지어 적십자 회비 납부 상황까지 들추어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드러낸다면 그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 잡듯이 뒤진다 해도 인간은 한 사람의 과거를 밝혀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속마음까지 다 드러낸다면 우리는 최후의 판결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지옥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그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변호자가 되셔서 우리 허물을 가리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쉴 새 없이 스쳐가는 죄악들을 주님께서 친히 변호하시면서 ‘아버지여 이 죄는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하시기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변호해야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파헤치시는 하나님의 그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인 교사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죄를 평생 안고 가야 한다면 다윗은 괴로워서 못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해서 드러내시고 적절한 심판(불륜의 아들의 죽음, 국가의 내란적 위기)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을 때 다윗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지난 미국과 베트남 전쟁 때 세계 최고의 언론상인 퓰리처 상을 받았던 유명한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972년에 상을 받았는데 미군이 베트남 양민 살던 트랑방이라는 곳을 네이팜 탄으로 공격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네이팜 탄은 거대한 불을 일으키는 폭탄입니다. 이 폭탄으로 인해 한 어린 소녀가 화상을 입고 발가벗은 채 소리치며 거리를 질주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은 킴푹이었습니다. 지난 1996년에 미국은 이 소녀를 찾아내 재향 군인의 날에 연사로 초청하였습니다. 지난 과거의 아픔을 씻고 화해하자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에 평생을 괴롭게 살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당시 네이팜 탄을 떨어뜨렸던 존 플리머라는 조종사였습니다. 플리머는 신문을 통해 보도된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양민들을 죽이고 어린 소녀를 화상으로 몰고 갔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심정을 플리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죄책감, 내 영혼을 부숴 버릴 것 같은 끔찍스런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본국으로 돌아와 보니 잡지, 신문, 텔레비전 등 온 천지에 그 사진이 널려 있었다. 도무지 그 사진을 피할 길이 없었다. 1974년 초에 제대한 후, 나는 절망감에 빠져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통스런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술을 마셔댔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이혼으로 끝이 났고, 정서적인 장애가 생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열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고통 가운데 살던 플리머에게 깜짝 놀랄 소식이 들립니다. 이 소녀가 살아 있고 미국에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플리머는 떨리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킴푹이 온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킴푹은 그 때 그 폭격으로 자기 두 부모는 죽었고, 화상으로 14개월 동안 고생해야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탄을 떨어뜨린 그 조종사를 지금 만날 수 있다면, 저는 그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지금부터, 또한 앞으로 계속 선한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더욱 고통스러워 흐느껴 울던 플리머는 용기를 내어 단상 쪽으로 나가 내려오는 킴푹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 조종사입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I'm sorry. I'm truly sorry.”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킴푹은 팔을 벌려 그를 안아주면서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이미 용서했어요.” 플리머는 그 때의 만남에 대해 후에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어떻게 2분 동안의 짧은 대화가 지난 24년 동안의 악몽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용서는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선물이었습니다. 그저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지금 존 플리머 씨는 감리교 목사로 교회를 섬기며 십자가의 용서를 선포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의 이 기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간구하라 하십니다. 용서받지 않은 죄는 우리를 두고두고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103:12)실 것입니다.

루터는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감하게 죄를 저질러라. 그러나 보다 더 씩씩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 이 말씀의 의도는 자기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 하면서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향한 권면입니다. 과감하게 죄를 저지름으로서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손 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와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런데 문제는 이 다섯 번째 간구 앞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문장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말씀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어떤 분이 주기도문을 하기를 무척 꺼려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이 구절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순수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움은 미움대로 품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주기도문을 반복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설교가 중 한 사람이었던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형판결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주지 마옵소서”하고 간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누가 완벽한 용서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따지면 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겠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율법과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율법처럼 생각하면 용서가 힘이 듭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말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 반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은혜를 제대로 감사하며 받고 있는지 의심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온 형제 용서에 대한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18:21-35).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 베드로는 스스로 답을 말했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아마 베드로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자답했을 것입니다. 한 번 용서도 힘든데 일곱 번 용서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 엄청난 용서를 요구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70 X 7 = 490번입니다. 이는 무한한 용서를 말합니다. 아예 미워하거나 원망의 마음은 그 싹조차 없애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이 명령이 정말 가능한 명령입니까?

주님은 이어지는 비유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라 함은 셀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빚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 대왕의 한 해 세수가 900달란트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이 빚진 자를 보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밖에 나가다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던 사람은 이 1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통 사정을 해도 몰인정하게 듣지 않고 옥에 쳐 넣고 말았습니다. 1달란트는 당시 화폐 가치로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1백 데나리온보다 60만 배의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조그마한 빚을 진 자에게 무정하게 행한 것입니다.

이 소식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1만 달란트 빚졌던 자를 다시 옥에 가두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1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1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율법처럼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답답하신 것은 네가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형제의 작은 잘못 하나 용서해 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슴 속에 십자가의 은혜가 살아 있느냐, 그리스도의 사죄의 피가 너희 심장 속에 흐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여 나에게 고마워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에게 베푼 은혜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우리 영혼의 평화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고 분노의 마음을 품고 살면, 여러분이 상처를 받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이것을 품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맥밀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노예가 되고 만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여러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안 되고, 우리의 영혼을 분노로 불사르고 맙니다. 린다 클링(Linda Kling) 이라는 시인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내 가슴에 적개심의 불을 지르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친/ 그곳에 그를 남겨 두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집으로 그를 데려온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는 내 생각들을 지배하며 나에게 명령한다/ 그는 내 혀를 통치하며/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채찍을 가하도록 자극한다/ 내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증오의 불이 증오의 목표물에게보다/ 증오하는 자에게 더 큰 피해를 주었던 것이 그 몇 번이던가!
  오 주여, 당신의 용서의 은혜를/ 내 불난 가슴에 부어주소서/ 제가 품은 모든 상처들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저는 이 용서를 자기에게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가혹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외모나 학벌 때문에 자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우한 환경이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수에 대해서, 어떤 일로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픔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놓았다가도 그 밑바닥에 있는 상처가 어쩌다 올라오면 주체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기를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감히 누가 정죄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판단보다 전능하시고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판단이 더 올바르고,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자학하지 마십시오. 자학은 교만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적 태도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한 번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제가 과거에 많은 실수를 하였고, 아픈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와서 죄의 용서를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 설사 간구하더라도 그는 이미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라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간구는 전혀 응답이 없는 간구가 되고 맙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이 간구는 우리 한국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원한도 용서 못하지만,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사는 환경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합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인한 미움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6.25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은 상처와 원한들입니다. 남쪽은 북쪽을 미워하고 북쪽은 남쪽과 미국을 미워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미움을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전쟁이 지난지도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때 상처받았던 것은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미움과 용서하지 않는 죄를 가지고 이 주기도문으로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데 우리 남한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은 우리 안에 있는 개인적인 원수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이며 민족적인 원수들에 대해서도 용서할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 교회가 남북간의 이데올로기로 인한 마음과 상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끌어안지 못하는 이상 한반도에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항상 위기고 긴장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죄 사함의 축복은 단순히 영적이거나 심리적인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 땅에 평화가 임하고 축복이 임합니다.

역대기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상7:13-15). 우리가 행하고 있는 악한 죄 중에 하나는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 죄입니다. 우리가 이 악한 길에서 떠나 겸비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땅을 고치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과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향한 저주를 가져가시고 평화를 허락하시고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종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