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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이다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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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내 자신은 소중한 존재인가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하찮은 존재야!”
“나는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나는 약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늘 원망과 짜증과 어둠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고 성공의 인생보다는 실패의 인생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의 모습을 비하하며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들이 여리고성의 10명의 정탐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여리고성의 아낙자손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메뚜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메뚜기와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가서 싸울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도 전에 자신을 메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움에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싸움에 나간다할지라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할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주눅이 들면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권투나 K-1를 보면 싸움하기 전에 눈싸움이 치열합니다. 만약 이 눈싸움에서 주눅이 들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 된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프레미어리그에 진출한 설기현 선수의 경기를 잠시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기현 선수가 볼을 드리볼하다가 다른 선수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선수와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설기현 선수가 기죽지 않고 몸싸움을 벌리다가 심판이 와서 말리는 바람에 그쳤습니다.
그때 축구 해설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기현 선수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지금 팀이 좀 침체에 빠진 것 같은데 다른 선수들에게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설기현 선수가 프레미어리그에 처음 출전했는데 의기소침하게 경기를 했다면 주눅이 들어서 아마 경기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눅 들지 않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아낙 자손을 보자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메뚜기정신은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삶을 비하하며 살았던 또 한 사람이 바로 므비보셋입니다.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은 매우 친한 친구였습니다. 둘은 의형제와 비슷한 언약을 맺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만약 둘 중 하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가족까지 돌봐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후에 사울 왕과 요나단은 같은 날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므비보셋의 유모가 어린 므비보셋을 안고 달아나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유모는 므비보셋을 주변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외딴 도시들 중에 하나인 로드발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은 거기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어느 날 다윗이 부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자가 없느냐? 내가 요나단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야겠다.”
그때 한 부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는데 다리를 접니다. 지금 로드발에 살고 있습니다.”
다윗은 “당장 가서 그를 궁으로 데리고 오라.” 명령했습니다. 궁에 도착한 므비보셋은 당연히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그의 할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온 나라를 뒤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 9:7)

그때 므브보셋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므비보셋이 왜 초라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왜 므브보셋은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까? 자신을 죽은 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므비보셋은 장애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포기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화상을 “죽은 개 같은 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윗이 그를 찾아 회복시키고 복원시켜주기를 원하는 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나는 죽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어둠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자신은 죽은 개 같은 존재야!”라고 자신을 비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우리는 “메뚜기 같은 존재야!”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미스터 사탄의 소리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너는 하찮은 존재야!” “너는 별 볼이 없는 존재야!” “지금 네 꼴을 바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냐? 너는 할 수 없는 존재야!”
“너 또 죄 지었잖아? 그러고도 네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읽었지만 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 중에 4절 말씀만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4)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입니까?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왜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것도 그냥 작품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걸 작품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우리 안에는 보배로우신 예수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 안에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인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수십억의 인구 가운데 꼭 집어 나를 지명하셨습니다. 나는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에게 부름을 받았다면 아마 큰 자부심을 갖고 살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으며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는데 자부심이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은 사람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귀하게 여깁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인 것은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속이란 단어는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얼마를 지불하고 사셨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와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값 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별 볼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장 고귀한 예수의 피 값으로 산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10만원짜리 빳빳한 수표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빳빳한 10만원짜리 수표주면 받겠습니까? 싫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 수표를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수표를 받으시겠습니까? 이 수표로 코를 풀고 발로 짓밟아도 받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왜일까요? 아무리 지저분하게 만들었다할지라도 여전히 이 수표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낡아도 아무리 모양이 흉해졌어도 아무리 오물질이 묻었어도 이 수표의 가치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이 수표처럼 보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난관에 부딪히고 시련을 겪습니다. 때로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지폐 같은 심정이 됩니다. 하지만 지폐가 여전히 가치가 있듯이 우리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탄의 소리에 속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십니다. 여러분 누구보다도 보배롭고 존귀한 분이십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삽시다. 그럴 때에 모든 일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므비보셋처럼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죽은 개 같은 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왕의 상에서 마음껏 먹으며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믿음대로 됩니다. 내가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믿으면 보배롭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인생, 형편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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