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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활과 살을 들고 승리하기 (왕하 1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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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살을 들고 승리하기(열왕기하 13장 14절∼19절)

오늘 아침에 우리는 어리석은 왕, 소극적인 왕을 만난다. 선지자를 통해 동편을 향해 쏜 화살이 구원의 살임을 알면서도 그 살을 가지고 땅을 칠 때 세 번만 친 왕을 보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왕의 행동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 듯 한데 선지자 엘리사는 이 왕의 행동을 보고 분노하였다. 왕이 살을 들고 오륙번을 쳤다면 아람을 진멸하셨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아람은 살을 가지고 땅을 친 횟수대로 세 번만 치리라는 예언을 하고 선지자는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원수와 싸우는 전술을 알게 된다. 번영의 시기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람처럼 우리의 평안한 삶 속에 도전하는 원수의 무리가 있다. 교회가 새 일을 행하고 가정이 새로워질 때 사탄의 궤계가 있다. 이 때 신앙의 대적자를 물리치고 완벽한 승리를 가져오는 그 길은 무엇인가?

첫째,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왕하13:15∼17)
요아스 왕은 여로보암의 죄를 쫓아 행하는 악한 왕이었다. 그러나 16년간 재위하면서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려 있을 때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생각하였다. 심지어 요아스 왕은 엘리사 때문에 아람이 잘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내 아버지여"라고 부를 만큼 권위를 부여하였다. 선지자가 죽고 나면 이스라엘의 위기가 풍전등화인 것을 직감한 왕은 엘리사의 전략을 들으려 하였다.
왕은 선지자의 지시에 순종하였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하13:15 "활과 살을 취하소서." 왕은 취하고 있다.
왕하13:16 "활을 잡으소서." 왕은 손으로 잡고 있다.
왕하13:17上 "창을 여소서." 왕은 창을 열고 있다.
왕하13:17下 "화살을 쏘소서." 왕은 살을 곧 쏘고 있다.
이 순종하는 모습은 신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왕은 선지자의 말대로 움직이고 있다. 승리의 길은 말씀에 의지하여 일하는 것이다. 복잡한 가운데서도 문제를 해결함 받고 축복을 회복하는 길도 말씀을 따르는 데 있다.

둘째, 응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왕하13:17)
요아스 왕의 승리가 완벽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응용하는 지혜, 창의적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왕하13:17 말씀을 보면 엘리사가 동편으로 날아간 화살을 보고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라고 예언한다. 왕이 아람 사람을 아벡에서 치리라는 승리를 예언한다. 알고 보면 왕에게 화살의 의미를 해석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을 취하시고 그 살을 가지고 땅을 치라고 왕하13:18에서 엘리사가 이야기 했을 때 왕은 주저함 없이 살을 들어 땅을 쳐야 했을 것이다. 세 번만 치고 오륙번을 치지 못하여 분노를 산 이 행동은 요아스 왕의 어리석음을 알려준다. 지혜란 하나를 보고 또 하나의 답을 찾는 것이다. 화살이 구원의 살이라면 그 구원의 살을 들어 치라고 했을 때 어떻게 쳐야 할지 답이 나온 것이다.

프랑스의 한 은행원은 입사 시험 때 인터뷰를 하는데 자기가 앉아 있는 책상 옆에 떨어진 작은 핀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 작은 핀을 주워 치마로 닦아 데스크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손길을 보고 은행장은 그 여인을 채용하였다. 이유인즉 작은 물건 하나를 버리지 않고 내 것처럼 옷으로 닦아 다시 쓸 수 있는 기물로 챙겨 놓는 그 마음과 그 손을 귀히 여겨 입사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그 핀 하나는 면접 시험에 사용된 은행이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도구였다.
오늘 말씀에서 화살이 갖는 의미에 대해 엘리사는 설명을 해 주었다. 이는 구원의 화살이다. 아람을 진멸하는 화살이라는 이 설명을 들었다면 요아스 왕은 살을 들어 땅을 치라는 선지자의 말을 올바로 이해했어야 했다. 그런데 왕은 살을 들어 땅을 치는 일에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어리석었던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악한 자의 공격을 받고 대적하는 싸움을 한다. 신앙의 영적 전쟁에서 한 가지 일을 보면 두 가지 일을 응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다.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인데 가만히 있지 말자.

셋째, 승리를 열망하는 불같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왕하13:19)
살을 들어 땅을 치는 의미를 이해 못하는 왕은 살을 들어 땅을 치는 그 자체가 신나지 않은 일이었다. 구원의 살이란 의미를 말해주었는데도 왕은 원수를 완전히 물리치는 불같은 열정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아람의 공격만 받지 않으면 된다. 아람을 진멸하는 것까지는 필요치 않다."고 아람에 대한 승리의 열망이 왕에게 너무도 분명치 못했다.

승리의 사람이 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한다. 원수를 박살내기 전에는 나의 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Passion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열정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열정으로 몰입되어 미친 사람이라 할만큼 마음과 뜻을 바치는 사람에게 원수는 도망가 버리고 만다. 열정의 사람이 매력이 있다. 열정은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이 되게 하고 둔재를 천재가 되게 만든다. 열정은 삶을 집중하게 만들고 치열하게 만든다. 열정은 인생의 보화이다. 열정이 없는 부자보다 열정이 있는 가난한 자를 부러워하라.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요아스 왕은 이 열정이 없이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왕이기에 선지자는 화를 낸 것이다.

넷째, 사랑과 심판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왕하13:19)
왕하13:19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세 번만 땅을 치고 만 왕의 대해 책망하는 이 책망의 분노 속에는 왕의 자비와 왕의 사랑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탓하는 것이다. 승리의 사람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사랑해야 할 자와 진멸해야 할 자를 구별하지 못하면 완전한 승리도 부분적으로만 누리게 되고 절대적 승리의 축복도 제한적으로만 누리게 된다. 아람이 싸워야 할 원수라면 왜 적당히 그 원수를 치려 하는가? 화살이 땅을 칠 때 그 화살이 구원의 화살이라면 5번, 10번, 20번이라도 땅을 쳐서 원수를 진멸한다는 의지를 보여야 할 것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땀 흘리고 애를 쓰며 노력하는데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영예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요아스 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해야 할 내 백성을 마음대로 다루며 진멸해야 할 아람에 대해서는 왜 너그럽고 자비로운가? 원수를 적당히 물리치고 원수를 살려두는 자비를 누가 기뻐할 것인가?

분별력을 갖자. 사람이 타락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 분별력 없는 왕을 그냥 볼 수 없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선지자이지만 왕을 향해 분노한다. 완벽한 승리를 외면하는 요아스 왕, 그 왕에게 분노하는 엘리사는 너무도 멋있다. 이 땅에 마귀의 편을 따라가고 마귀의 활들을 허용하고 분별력 없이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는 이를 향해 분노하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내 교회, 내 성도, 내 하나님, 내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죄를 사랑하고 사탄과 거짓을 사랑하는 이 어리석은 삶은 격려해야 할 것이 아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첩경을 깨달을 수 있다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는 분별력이 생긴다면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의 분노대신 죄 짓는 분노를 한다. 미움의 분노를 한다. 우리는 의의 분노로 열정을 회복하고 의의 목마름으로 안일을 깨뜨리고 마귀를 박살내야 한다. 벧전5:9 "마귀는 대적하라."고 하였다. 마귀는 적당히 물리치거나 적당히 용납하거나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마귀는 꾸짖어야 한다. 의로운 분노로 박살내야 한다.

이 시대에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해 활과 살을 들어야 한다. 활에 살을 놓아 활시위를 힘껏 잡아 당겨야 한다. 그리고 구원과 승리를 위해 화살을 들고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땅을 치는 일에 땀 흘려야 한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완벽하게 이기고 다시는 사탄, 원수가 엿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다. 신앙의 승리를 위해서도 활과 화살이 필요하다. 활은 기도 생활이다. 마음껏 기도의 줄을 당겨라. 당긴 것만큼 살은 멀리 날아간다. 새벽 기도의 활을 당겨라. 있는 힘을 다해 당기자. 구원의 살은 재빨리 날아간다. 속도 있게 날아간다. 살은 복음이다. 복음의 말씀이다. 복음의 말씀이 날아가 힘차게 박히는 것은 활을 당기는데 달려 있다. 활을 당겨도 복음의 말씀의 살이 준비되지 않으면 헛수고이다. 구부러진 살이 아니도 반듯한 살이 준비되어야 한다. 복음의 살이 박히는 심령마다, 복음의 화살이 떨어지는 지역과 가정마다 원수 마귀가 도망가는 역사가 일어난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였다. 사탄과의 싸움, 유혹과의 싸움, 죄와의 싸움에서 거룩하게 승리하는 길은 말씀의 확신과 기도의 활이다. 이것을 버리면 안된다.

우리는 기도의 활과 복음의 살을 들고 계속 싸워야 한다. 화살이 녹슬지 않도록 말씀을 외워라. 공부하라. 이 땅이 우상의 땅이든지 이 땅이 불신의 땅이든지 기초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신앙의 사라진 무지의 땅이든지 복음의 화살을 들고 이 땅에 도전하라. 지혜와 열정, 분별력을 가지고 말씀을 신뢰하여 이 땅을 향해 복음을 외치라. 지쳐서 쓰러질 것을 각오하라. 기회는 지나간다. 소극적이면 성령이 슬퍼하신다. 적당히 시간 때우기로 하면 성령이 근심하신다. 이 정도면 하고 중단하면 성령이 분노하신다. 목사가 흡족하도록, 선지자가 흡족하도록 아니 우리 주님이 보실 때 흡족하도록 주어진 구원의 화살, 복음의 화살을 들고 계속해서 이 지역을 두들겨라. 오목천동, 고색동, 호매실동, 봉담, 영통, 구운동 등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타락한 문화를 향해 활을 쏘라. 그러면 기쁨이 오고, 평화가 오고, 부흥이 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리석은 요아스가 되지 말고 동편 창을 열고 그 살을 쏘고 화살을 들고 땅을 치는 일을 멈추지 말자. 함성이 일어나고 원수, 마귀 완전히 쫓겨 갈 때까지 복음을 들고 도전하자. 3번이 아니다. 500번, 600번 두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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