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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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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를 잠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이방인이 유대교의 율법학자 ‘샴마이’에게 가서 자기가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 율법 전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아주 짧은 시간에 율법 전부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샴마이’는 이 무례한 이방인을 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이방인은 다른 랍비 ‘힐렐’에게 가서 똑같은 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힐렐’은 ‘샴마이’와는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소. 당신이 한 쪽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는 시간 안에 율법 전부를 알려주겠소.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짓을 남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전 율법의 요약이요.”

소크라테스도 이와 같은 교훈을 말했습니다. “남이 너를 괴롭혀 화가 나더라도, 그러한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토비아스도 “네가 미워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말라.”고 했고, 에픽테레스도 “네게 원치 않는 고난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했으며, 필로도 “네가 원치않는 것은 그에게 행치 말라.”고 했습니다. 동양의 공자도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慾 勿施於人)고 했습니다. 이들의 교훈은 모두 “~하지 말라” 등으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입니다. 남이 싫어하는 일, 남이 원치 않는 일, 남이 좋아하지 않는 일 등을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교훈을 ‘은률’(銀律, The silver rul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것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
적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이 나에게 행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그렇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은률’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인 삶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이 황금률에는 세상에서 얘기하는 “은률”에 해당되는 것들, 즉 남이 싫어하고, 남이 원치 않고, 남이 좋아하지 않는 일 등은 당연히 해서는 안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이 황금률을 말씀하시며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언급하신 곳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어느 한 율법사가 예수께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구약과 신약, 즉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요체이며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둘째는 그와 같다.”는 말의 뜻은 첫째 계명과 똑 같다, 다시 말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첫째 계명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를 성경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일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생활이 전체를 드리는 모든 예배보다 낫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 첫째 계명이 되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바꿔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을 대접하고, 이웃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이웃을 대접하라. 그리고 하나님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이웃을 대접하고, 이웃에게 대
                    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을 대접하라.”

예수께서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에 대해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순금 34kg, 1데나리온의 6,000 배, 10억달러)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500만원)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그래서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리고서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마18:22-34)>
그리고 결론으로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종으로서 34억 달러라는 빚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고 심지어 처, 자식들을 팔찌라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럼에도 소액의 빚을 진 자기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가둬버린 것은 누가 들어도 용납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같은 종의 행태를 듣게 된 왕은 화가 나서 그 종을 다시 붙잡아 가둬 버렸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받은 성도 여러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작은 것 하나 용서와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웃에 대한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전제로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대접하는 생활입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대접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이 원하지 않는 것, 이웃이 싫어하는 것, 이웃이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싫은 것도 이웃에게 해서는 안됩니다. 남으로부터 받은 대접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런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여 불쾌했다면 나도 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내 말한 것을 듣고 기분이 언짢았다면 나도 남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지간, 부모 자녀지간, 형제지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서도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회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WHENEVER), 누구든지(WHOEVER), 어디서든지(WHEREVER), 무엇이든지(WHATEVER)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최고, 최상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고, 최상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시는 것들은 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들을 행하므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일곱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6) 여호와께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17)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죄 없는 자를 죽이는 손과,
(18) 악한 계획을 세우는 마음과, 악을 행하려고 빨리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말을 토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다.(잠언6:16-19)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상낙원 에덴동산을 창설하시므로 아담과 하와를 살기에 최고,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선악과를 범하므로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생명을 걸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만 인간의 죄가 사함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로막고자 했을 때 “(마16:2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이 성도 여러분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는 자기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는 마음과 자세로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남을 대접하는 것보다는 남으로부터 대접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사탄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행하므로 하나님을 대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최고, 최상의 대접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이웃이 좋아하고 기뻐하며 원하는 바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실행하여 대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간호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한 노인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는 노인을 잘 보살폈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안락의자에서 몸을 왼쪽으로 있는 대로 다 기울인 채로 불편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간호사는 왼쪽 옆구리 쪽에 베개를 하나 받쳐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보니 노인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의자에 앉아 있길래... 몸을 가누기가 무척 힘들다고 생각한 간호사는 아예 의자 등받침과 노인의 몸통을 끈으로 묶어 주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병원은 마음에 드세요?”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참 친절하고 좋은데 우리 방 간호사는 방귀를 못 뀌게 해.” 이웃이 원하는 바 대로 대접하는 생활로 지혜롭고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최상으로 사랑하고 대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이웃들에게 최고의, 최상의 사랑과 대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자신에게 최악으로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 최상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할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친절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거나 멸시할지라도 자신을 그를 끝까지 존경으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여러 가지로 인색하게 굴지라도 끝까지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양보하지 않거나 아주 이기적으로 대할지라도 성도 여러분은 끝까지 양보하고 손해보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남이 나에게 아주 교만하게 굴지라도 끝까지 겸손함으로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저주할지라도 오히려 그를 위해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시는 대접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이 원하는 바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 처지를 상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둘째는 내 행동에 상대가 인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셋째는 내 처신에 상대가 존경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남이 나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바를 행하는 것이 남을 최상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재상이 친구들과 함께 기생들을 불러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재상은 기생들 중에서 특별히 총애하는 기생이 있어서 자기 옆에 앉히고 시중들게 했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특출하여 모든 남자들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꺼졌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누군가가 그 예쁜 기생의 손목을 덥썩 잡자 그녀는 그 사람의 갓 끈을 잡아채서 갓 끈을 끊어 놓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손목을 잡은 자가 있는데 그의 갓 끈을 끊었으니 빨리 불을 켜시오.” 이 소리를 들은 재상은 불을 켜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같이 갓 끈을 끊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모두 갓 끈을 끊자 불이 켜졌습니다. 이 재상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입니까? 누가 그 여인의 손목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건은 복잡하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하는 마음, 정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비슷한 경우에 누군가가 내 허물을 들추어내고 다닌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 재상이야말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친구들을 최상으로 대접한 인물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또한 그 약점을 덮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덮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과 허물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한 것들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인 자세로 덮어주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부끄러운 자리, 아픈 자리를 다시 기억나게 해서 괴롭힌다는 것은 잔인한 짓입니다. 그가 잊고 싶은 과거라면 생각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며 호언장담하며 끝까지 예수를 따라갈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께서 끌려가 고난을 받게 되자 예수를 전혀 모른다며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마26:72)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베드로는 이같이 부끄럽고 뼈아픈 과거를 가슴에 묻은 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의 과거를 들추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되도록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이웃을 대접하는 생활입니다. 남을?대접하는?생활이?성경 전체를 이루는 생활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생활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복된 생활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좋은 음식으로 이웃을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음식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먼저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고,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먼저 칭찬하는 생활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이웃이 보이거든 먼저 달려가서 그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대접하는 생활입니다. 이웃에 대해 친절과 존경, 칭찬과 격려에 인색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친절과 존경으로 대접하고, 칭찬과 격려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처음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안내를 맡으신 분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달려가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교회에 처음 오는 분들이 교회를 향하여 친절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와도 알아주지 않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안다니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사실 그런 면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인사할 사람 따로 있고 인사 받을 사람 따로 있습니까? 누구는 인사하고 누구는 인사 받습니까? 친절한 교회란 따로 없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되는 것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여, 어느 교회가 친절한가 기웃거리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먼저 내가 친절을 베풀도록 하십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아내가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자 아내는 여섯 살 난 딸 아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예쁜 딸이 기도해 주겠니?” “난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예요!” 딸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하는 소리 들었잖아. 그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러자 딸은 머리를 숙이더니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어쩌자고 이 무더운 날에 사람들을 불러다가 식사를 대접하게 하셨나이까?” 남을 대접하는 대로 대접받는 것입니다.

100여년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 비바람 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여관에 어떤 노인 부부가 들어왔습니다. 비를 맞고 들어온 노부부에게 안내원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이 있습니까?” “방이 모두 나갔습니다. 오늘 필라델피아에 기독교 총회가 세 군데나 모여서 방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아, 어르신! 누추하지만 방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제가 자고 있는 방인데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 방에서 쉬시죠.” 젊은 안내원은 방을 깨끗하게 정돈한 후 노부부를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노인은 호텔비를 지불하고 떠나면서 안내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호텔을 운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요. 2년 후에 만납시다.” 안내원은 웃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편지에는 필라델피아와 뉴욕 사이의 왕복 기차표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2년 전 비바람 치던 날 밤에 방을 비워주었던 노부부를 기억하오? 그 노인을 만나주시오.” 청년이 뉴욕에 가 그 사무실에 들어가니까 정말 그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노인은 청년을 데리고 뉴욕 5번가를 지나면서  “이 빌딩이 보입니까? 내가 2년 전 당신에게 약속한대로 이 호텔의 사장이 되어주시오.” 그 호텔의 이름은 아주 유명한 왈도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 종업원이 자신이 일하는 자리에서 한 노부부를 잘 대접해준 연유로 그는 뉴욕의 큰 호텔 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한 친절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남을 대접하 는것 자체가 곧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을 대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그의 장막문에서 나그네 셋을 잘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하나님처럼 영접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지 중에 대접한 그 사람들이 곧 천사였으며, 하나님이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세상 최후의 심판 날에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이겠습니까? 그 때에 영생(천국)에 누가 들어가며, 영벌(지옥)에는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양처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며 천국을 상속받을 자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된 자를 영접하고, 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며, 병든 자를 돌아보며,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것이라. 이러한 자들, 곧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들이 바로 양이며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니라.”(마25:34-46)

하나님께 대접하듯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이웃을 대접하는 생활로 온 율법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최고, 최상으로 대접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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