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돌감람나무의 희망 (롬 11:13- 24)

  • 잡초 잡초
  • 425
  • 0

첨부 1


제목- 돌감람나무의 희망
본문- 로마서 11: 13- 24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해주에서 큰 과수원을 하시는 해주 제일 가는 부자라는 말씀을 부친으로부터 자주 전해 들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그 해주 수양산 밑에 넓은 과수원 부지가 제것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할아버님께서 과수원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자연히 과수에 대하여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6. 25 동란 직전 피난을 내려오셔서 마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이래 30대 젊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충성을 하시다가, 30대 후반에 목회의 길로 들어가 약 42년간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만 헌신을 하셨는데, 60 - 70년대는 경제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고 더우기 농촌은 보리고개로 힘겨워 하던 시기에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목회지에 부임하시면 마을 돌아다니며 노인들께 부임 인사도 하며 전도의 접촉점을 찾기위해 애쓰셨는데, 집집마다 뒤 뜰 안에 보면 포도나무나 감나무, 혹은 배나무들이 한 두 그루씩은 다 있었는데 그것이 전도에 아주 효자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실수들이 하나 같이 줄기와 잎사귀는 무성한데 반하여 열매는 아주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해마다 제대로 과실을 얻는 일이 없었기 대문입니다. 아버님께서 가정을 방문하시면서 자연스럽게 농부들과 대화를 나누시게 되었고, 가지와 잎만 무성한 과실수들을 보시고 "내년 가을에는 몇 박스를 따게 해 드릴 테니까 제가 지도하는대로 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시면 대부분이 반가워하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전지가위로 필요 없는 가지들을 다 잘라 멋지게 가지치기를 하시고, 나무에서 한 1m쯤 거리를 두고 1m 깊이로 구덩이를 파도록 한후에 거름을 가져다 붓게 한두에 1년 동안 잘 봐드릴테니 염려하시지 말라고 하신후 이렇게 농을 하셨습니다. "한 5상자 정도 포도를 따면 나도 좀 주세요..." 그러면 열이면 열 모두 "그럼요 1상자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대답들은 시원시원하게 하셨답니다. 그러나 정작 초가을이 되어 포도를 멸 박스를 따도 한 박스는 커녕 한 송이도 소식이 없는 집이 많았다고 하시면서, 사람 마음이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농촌목회를 하시면서 농촌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일을 많이 하셨는데, 그 중에서 제가 특이하게 본 것 중에 하나가 접붙이는 일 이었습니다. 농촌에 가면 고염나무들이 많아요. 고엽나무들은 병충해를 잘 타지않고 열매가 풍성해서 좋은 반면에 맛이 떫어 먹기가 쉽지 않은 단점도 가지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감나무 묘목을 고염나무 원목에 접붙이는 작업을 통하여 병충해에도 잘 견디고 당도도 뛰어난 질좋은 감나무를 생산해 보급하셨습니다.

감나무 묘목을 고염나무의 가지에 45도 각도로 서로 베어낸뒤 묘목을 딱 붙이고 거기에 테이핑을 해두면 자연스럽게 묘목에서 진액이 나와 아교로 붙인 것처럼 딱 붙어 자라게 되는 것이 접붙임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고염나무 뿌리에서 부터 영양분이 그대로 감나무의 줄기를 통해서 전해져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때는 병충해에 강할 뿐 아니라 크고 단 감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접붙임이라고 하는 과수의 특이한 점을 먼저 이해해야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를 소개하셨습니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돌감람나무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까? 이방인이지요. 그러면 50%의 답은 나왔어요. 참감람나무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곧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 가지에 이방인을 의미하는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면 놀랍게도 돌감람나무에서 귀한 열매가 맺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돌감람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감람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진액이 올라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도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1장 2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러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뇨?" 바울사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절대로 그럴 수 없느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핍박하며 내어 쫓았지만 오히려 그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 순교이후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던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 유대와 사마리아로 디아스포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할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이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지를 가차없이 쳐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아직도 남아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의 핍박에 못이겨 광야로 도망치다가 혼자서 탄식하며 나만 홀로 남았다며 할때에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남은 자들이 7,000명이나 있다며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것을 기억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믿지 못하면 못 믿는거고, 내가 확실하지 못하면 불신하는 내 중심적인 생각 속에 살아가지만, 안 된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는 이 땅에 칠천명이나 순결한 백성이 있어.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다시금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뿌리는 하나님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가지는 잘라 내셨지만, 원뿌리는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뿌리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배반하고, 고전하고, 핍박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 그 축복이 어디로 왔습니까?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에게 왔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1885년 제물포에 처음으로 선교사 두분이 발견하고, 선교사와 3분이 도착을 하기는 했는데, 그 분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도착을 했습니다. 모두가 20대 후반에 젊은이들이 안수를 받고, 결혼을 해서 신혼부부가 감리교선교사인 아펜젤러선교사 부부와 결혼하지 않은 총각선교사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을 했습니다.

교회역사학자들은 누가 먼저 도착을 했을까? 라고 설왕설래하고, 아마도 미국에 그러한 풍습으로 보면 여성들이 먼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어떤 집을 들어가도 문을 열어주고, 레이디퍼스트, 아마 그래서 결혼한 아펜젤러 부부가 사모님이 먼저 한국땅에 발을 디디고 그 다음에 아펜젤러 목사님, 그리고 총각인 언더우드 목사님이 내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 추측을 했었는데, 우리 장로교와 감리교회사 신학자들이 서로 누가 한국에 먼저 왔는가? 신학적인 논쟁을 미세하게 벌였는데, 다행히도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당시의 일기가 발견이 되었어요. 그러한 내용들이 기록이 됨으로써, 감리교 선교사 부부가 먼저 이 땅에 도착했다고 그렇게 판정이 났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젊음을 포기하고, 그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미지의 땅 지금 우리가 아프리카를 이야기해도 기가 막힌 일인데, 1885년 지금 아프리카보다도 더 기가 막힌 한국을 그들이 찾아왔다고 하는 것, 여러분 그 당시에 인천 제물포 지역, 서울 남대문 지역, 동대문 지역 선교사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우리는 지금 드라마로 조선시대, 심지어는 고려시대, 고구려시대를 드라마를 봐도 얼마나 좋은 비단옷에 화려하게 입은 것을 보고서 그러면 옛날에도 좋게 입었구나 그랬는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그 당시의 모양을 낸 것이기 때문이기 그래요.

조선시대 임금님이 앉던 그 왕좌를 여러분들은 가 보셨습니까? 덕수궁을 가 보시고, 경복궁을 가 보셨습니까? 얼마나 초라합니까? 좀 누우면 누울만한 넓이에 나무로 만들었어요. 지금 여러분들 집에 지하실에 사시는 분들도 그거보다 더 좋은 쇼파를 가져다 놓으셨어요.

지금 여러분들은 어렵다고 하지만, 잘 사는 사람들과의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 지금 지하실에서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얼굴에 찍어 바르는 화장품은 옛날 왕후보다 더 좋은 것을 바르시고 계시는 거예요.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뭐 불평할 게 있어요? 저 50평 사는 사람들보면서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말씀처럼 족한 줄로 알며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임금님보다 왕후보다 더 잘 먹고, 잘 사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올 때 그 아펜젤러 목사님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습니까? 미국사람이예요. 미국사람들이 한국의 복음을 전해 주었어요. 그 미국사람들은 누가 복음을 전해 준 줄 아세요? 영국에서 웨슬리목사님 애즈베리라는 분에게 안수해서 선교사로 보내고, 웨슬리목사님도 미국의 선교사로 다녀왔습니다.

그들이 미국에 가서 복음을 증거해서 미국이 그렇게 기독교 나라가 되었어요. 영국은 누가 또 전해 주었습니까? 온 유럽대륙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누가 했어요? 초대교회 사도들이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느 나라 사람이예요? 이스라엘 사람이예요. 다른교회 방송설교를 들어보면 대답을 척척 하는 것을 보면 참 보기 좋더라구요. 우리 평안의교회도 그래야지요. 열두제자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가 이스라엘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이라 그 말이예요. 그 사람들에 의해서 전세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또 주의 종들을 통해서, 또 주의 종들을 통해서 복음이 서쪽으로 그래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중국으로 저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마지막 서쪽 끝 예루살렘이 복음이 도착하면 주님이 오신다는 거예요. 제 얘기가 아니라 주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지금 한인교회가 있지만 십자가도 제대로 걸지 못해요. 제가 한인교회를 가 보니까 십자가가 없어요. 찾기가 힘들었어요. 골목골목을 찾다가 여기가 한인교회라는 거예요. 왜 십자가를 달지를 않느냐고 그러니까 유대인의 공격이 있어서 자유롭게 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백만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은 천만명이 넘어요. 그 중에 뉴욕에만 사는 유대인들이 이백만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중동에 전쟁이 나고 무슨 분쟁이 났느냐 하면 다른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여러 이유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지만 미국은 눈 딱 감고 누구 편?,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딱 잡고 있는 거예요. 뉴욕에만 이백만이 살고 있다니까요. 껍데기만 아메리카합중국이지, 내용은 이스라엘이예요. 자기 조국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무슨 문제만 생기면 무조건 이스라엘편 드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직도 유대교를 중심해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힘들게 하는데, 그래서 외부에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놀랍게도 구소련지역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런 구소련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그런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귀환을 하는데, 놀랍게도 구소련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정착하는 사람들의 50%가량이 크리스찬들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해외교포로 살다가 그 삶을 포기하고 자기의 본국으로 돌아가는 교포유대인들 중에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자기들이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유대인들끼리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이 좁아요. 그래서 자리가 별로 없으니까 해외에서 이주하는 수천 수만 사람들을 위해서 정착촌을 만드는데, 산간지역에 가면 수백동씩 정착촌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소련지역에 오는 사람들을 거기에 집을 주고 살게 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그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외국에서 듣게 하고, 받아들이게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면서 유대인들 속에 복음을 가진 자들이 점점 확산되게 되어서 마침 많은 가루 속에 누룩이 들어가는 것과 같고, 서말 가루 속에 조금의 누룩이 들어가지만 얼마 후에 누룩이 쫘악 펴져서 서말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누룩처럼 번져서 하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확산될 때에 주님 오실 줄로 믿습니다.

이 세계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안목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그 소련지역에 크리스찬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 그 말이예요. 신앙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아, 이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오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분별하는 거예요. 그걸 잘 모르면 그런 소식을 들어도 아멘이 잘 안 되지, 잘 모르니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신앙적 사건인데 감이 안 잡히니까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들으셨으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뉴스를 단순한 역사로만 보지 말고, 사건들만 보지 말고 신앙적인 안목으로 이 역사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고백이예요.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줄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세계역사의 흐름을 우리가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였습니다. 바울은 목이 달아났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어떤 주의 사자들은 창에 찔려 죽었고, 어떤 제자들은 온몸에 껍질이 벗겨져 죽었습니다.

그렇게 순교하였지만 그들의 복음증거의 은혜가 열매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까지 주님을 믿고,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족속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반열에 참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돌감람나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 중심이 되었다고 해서 마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해서 참감람나무의 뿌리를 통해서 진액을 공급받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을 때 이것이 내 공로라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 18절에 보면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가 돌아온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가지만 쳐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업으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입시에 실패할 수 있고, 여러분 자신들이 진급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전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돌감람나무 같은 우리의 구원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패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기회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느냐? 그렇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는 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날,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도 그렇게 사랑하셨다며, 참감람나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은 오죽하리요. 그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돌감람나무를 사랑하신다고,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은 얼마나 축복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잘 되는 것 보면서 때때로 좌절하지요? 예수 믿는 우리는 잘 안 되는데, 저들은 부정직하게 술수를 쓰면서 그렇게 하는데도 잘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제대로 정직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사업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고민하실 때가 있으실 거예요.

이중장부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을 둘러치고 메치고, 적당하게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유혹을 받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숭배로 가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핍박의 길로 갔지만 그들의 가지를 잘라내 버리셨지만 가지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다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회에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당했어요. 우리가 지금 큰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돌감람나무인 우리도 축복하신다면 원가지인 이스라엘은 얼마나 축복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잘 되는 것 보면서 여러분 유혹되고 좌절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교통신호 위반하고 빨리 가는 사람 부러워하지 마세요.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면 그들도 결국은 다른 길로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가지 놀라운 일을 봤어요. 한국에서는 운전습관이 나빠서 교통신호도 잘 어기고, 제멋대로 잘 하는 사람이 그 분이 영국에 와서는 너무나도 법을 잘 지키는 거예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법을 지키니까 자기 혼자 법을 안 지키다가는 큰 일 나는 거예요.

사거리가 영국은 주로 로터리로 되어있습니다. 신호등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어요. 4차선, 8차선, 10차선도 신호등이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사거리에서 차가 들어오면 먼저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차를 기다려 주고, 기다려 주면서 차가 로터리를 돌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방향으로 다 빠져 나가는 거예요. 클락션 소리도 하나 안 누르고, 교통경찰관 하나 없는데, 복잡하고 큰 거리에 차들이 다녀요.

우리가 생각할 때 더딜 거 같은데, 시내버스도 약속한 시간에 정류장에 딱 도착합니다. 우리 시내버스들은 빨간불인데도 막 지나가고, 그 정류소에 안 오고 2차선에 대고, 그렇게 덤비고 그래야 제 시간에 올 거 같아도 우리는 그래도 제 시간 못 지키잖아요.

여러분,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지름길인 줄 믿습니다. 법을 어기고 먼저 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사람들이 앞서 가는 것 같아도,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잘 되는 것은 기준이 어디 있나요? 여러분들 기준이 잘 된다고 보이시나요? 성경에 말씀합니다. 칭찬을 받는다는 하나님이 칭찬하셔야 참된 칭찬입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복되다고 하셔야 복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복되다고 해서 복된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마치 거품 같은 것입니다. 거품처럼 확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온세상을 삼킬 것 같아도 태양만 뜨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안개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불의한 사람들의 잘 됨을 안개와 같이 생각하면 좋아요. 그것은 진정한 복도 아니요, 진정한 성공도 아닙니다. 성공은 하나님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고,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감람나무,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인해서 가지를 잘라내셨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종교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셨고,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서는 안 되요. 잘난척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자긍하지 말며 겸손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복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감사의 모습이요, 겸손해야할 우리의 자세인 줄 믿습니다.

돌감람나무,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었던 돌감람나무,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감람나무 하나님의 자녀의 잘못된 삶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와 그들의 잘못됨을 위해서 우리에게까지 은혜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돌감람나무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 희망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까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주신 그 소망을 기뻐하면서 이 소망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유지하며, 그 소망을 간직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희망이 없었던 우리에게, 절망뿐이었던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고, 꿈이 되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연약함을 주님이 책망하시고, 징계하셔서 그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사도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해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은혜, 구원의 감격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늘 찬양하게 하시고, 늘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