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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곤한 때에 피곤하지 않는 지혜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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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피곤한 인생입니다. 현대인의 삶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남녀노소 무두가 힘들어 하고 피로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른만 피곤하지 않습니다. 우리시대의 학생들은 얼마나 피곤합니까? 집에 입시생이 한 사람있으면 비상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린아이까지도 피곤한 세상입니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세상에서, 제대로 누워 편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 갈수록 삶이 투쟁적이고 경쟁적이 되어갑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 보면 피곤해집니다.

솔로몬은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이 세상은 보는 것 때문에 욕심내고 헛수고를 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보암직도 하고. . .먹음직도 하고. .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만일 하와가 장님이었다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인간의 눈을 이용했습니다. 현대 문명의 꽃은 바로 visual(보는) 문화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얼짱 몸짱 . . 몸매, 주택, 장식품, 가구, 모든 것 . . .

좋은 옷이란 추위와 더위를 가리워주고 몸을 보호해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옷은 보여주는 목적으로 바뀌고 손바닥 만한 비키니 수영복은 1300억원 매출의 황금시장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보는 것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이루지 못할 수고를 하면서 피곤해 집니다.

또 귀의 욕망에서 오는 피로감입니다.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도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애씁니다. 특히 남에게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칭찬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고 하고, 공부합니다. 남에게 자랑하고 칭찬 들으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5:11-13) 솔로몬은 궁녀들을 1000명이나 거느려 보았으나 “이것도 헛되도다. . . . ”(전2:1-2)라고 토로합니다. 궁녀 1,000명을 거느린 솔로몬이 매우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삶의 고질적인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국가적으로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같은 강대국에게 협박당하면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왕, 귀족, 제사장과 같은 지배 계층이 타락하여 백성을 수탈함으로써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종교는 세속화 하여 형식적인 의식만 남아 있었고, 아무 위로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 가득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젠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들었으나 포로의 삶이 오래 지나게 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예배생활도 감격이 없어졌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나날을 보냈습니다. 살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피로가 누적된 사회였습니다. 질병이나 피로가 생길 때 풀어야지 누적되면 심각해집니다.
유다백성들은 이렇게 누적된 피로 속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2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피곤함의 원인은 육체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피로의 근본 원인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 정신 상태에 있습니다.

1. 피곤의 원인은 나에게 있슴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 왜 피곤해 하며 살아가느냐? 네게는 피곤해 하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걸어가도 뛰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절망과 곤고의 세월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피곤하지 않고 곤비치 않을 수 있습니다(25-29절).

세상사람들은 다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다 피곤하고 곤비하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작은 말뚝에 묶인 코끼리와도 같습니다.) 체념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아시는 분이고,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며 피곤하지도 곤비치도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피곤한자에게 능력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으로 구하면 주시고, 고쳐 주시는 분인데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피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한 아이가 산 속에 갔다가 큰 새 알 하나를 주워서 닭장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이 알도 깨어났는데 보니까 독수리 알 이었습니다.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자기 자신을 닭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닭이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독수리는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닭이라고 생각하는 한 푸른 창공을 날지 못합니다.

어느날 지붕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 보는데 하늘에 큰 독수리 한 마리가 훠이- 훠이- 날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날개짓을 하며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새끼 독수리는 꿈을 꿉니다. ‘나도 저렇게 날고 싶다’ 그리고 날개를 폅니다. 그랬더니 날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높이 높이 -- 그제야 알았습니다. 자신이 닭이 아니고 독수리임을 . .
내가 누구인가? 자기를 발견하는데서 부터 사람이 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피곤한 사람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지금 영적인 낙심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끌려와 포로 생활을 막 시작할 때는 그들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이 포로생활은 끝이 날 것이다. 그러면 고향으로 돌아가 갈 것이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사랑하는 성도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리라” 이 꿈 때문에 그들은 먼 이국 땅, 노예 생활 속에서도 처음엔 잘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성전이 없었지만쉬나고그(회당)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마음속의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면 도저히 이럴 수 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다. 우리의 이 원통함, 이 사정을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신다. 아무도 내 사정을 모른다. 내 이웃도 . . .”
그때부터 그들의 삶은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일을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시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시면 변개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사탄은 정체성에 의구심이 생기도록 만듭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낙심하여 하나님의 손을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수생각>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환자가 죽을상이 되어서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묻습니다. “어떤 증상 때문에 오셨습니까?” 환자가 자기의 증상을 설명합니다. “선생님, 제가 요즘 증상이 심각합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찔러도 아프고, 팔과 다리를 찔러봐도 아프고, 온 몸이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하면 무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요?”
의사가 심각하게 환자를 검진을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음. . . 심각하군요. 선생님은 손가락이 부러지신 것입니다.” 원인은 머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팔에도, 다리에도 이상은 없었습니다. 원인은 부러진 손가락입니다.
우리의 삶이 벽에 막혀 있을 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회의에 빠집니다. 이제 하나님은 내 삶을 간섭하지 않으시거나 아니면 너무 더디 오신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을 바라보라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28절에 보면 소망이 없다고 낙심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까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의 양편에 강도 둘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 된 실패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강도는 죽음 앞에 생을 포기한 사람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우편의 강도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도 임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편의 강도는 인생의 마지막 때에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는 수많은 유태인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었습니다. 그 때 수용소에 한 유대인 외과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날 사역장에서 깨진 유리조작을 발견하고 무언가 깊이 생각을 하더니 깨진 유리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방으로 돌아와서 아침과 저녁으로 얼굴에 피가 날 정도로 면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약속한 대로 오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오신다고 불편을 한다. 그러나 그가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급할 뿐이다.’ 나치의 간수들이 사람들을 일열로 도열을 시켜놓고 죽일 사람을 골라낼 때 마다 이 외과의사는 늘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외과의사를 지나가면서 군인들은 저 녀석은 죽이기에는 너무나 젊다. 결국 이 외과의사는 수용소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맞이 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그의 일기장이 공개 되었는데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고통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하나님이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급한 것일 수 도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라” 이 말씀은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 사람들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위를 바라보는 신앙은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받습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땅을 바라보면 망합니다.
본문의 야곱이 피곤했던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어렵고 힘든 내 환경을 바라보고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실패했던 과거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양 빛을 등지고 서서 앞에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고는 왜 이렇게 그림자가 크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어서 태양 빛을 바라본다면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역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아무리 착잡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주시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희망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부르짓고 기도하는 삶입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 암몬, 마온의 연합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전혀 이길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도하기를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하고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하시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해 주셨습니다.

3.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의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의무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무로 하게 되면 기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곱, 이스라엘은 신앙이 의무화 되었을 때 피곤해 졌습니다.
기쁨이 되어야 할 신앙생활이 의무처럼 여기면 신앙은 마치 규범이나 율법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임무로 합니다. 억지로 합니다. 노예처럼 합니다. 머슴은 댓가 때문에 일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일 자체를 기쁨으로 합니다. 사업장에 종업원은 시간만 되면 총알처럼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인은 제일 늦게 퇴근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줄줄이 외우고 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의무적인 종교생활을 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많이 알고 있음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헬라의 어원까지 줄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의무가 아닌 기쁨과 특권으로, 율법이 아닌 감사감격의 삶으로 우리 신앙생활을 바꾸어가야 합니다.
기도도 율법적인 기도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독백에 불과했습니다. 기도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드려진다면 슬픈일입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크리스챤의 최대의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밤이 새어도 모자랍니다. 전도도 율법적인 전도는 전도대상자들을 전도 숫자를 채우기 위한 도구나 앞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들이 교회의 필요를 채워가는 자원들로만 본다면 이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헌금도 회비정도로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일 것입니다. 십일조도 의무가 되면 안됩니다. 감사 감격하여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큰 가뭄이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펌푸를 땅에 박아 놓고 펌푸질하는 것입니다. 30분동안 펌푸질하고 쉬고, 20분동안 펌푸질하고 쉬고, 10분동안 펌푸질하고 쉽니다. 펌푸질해서 메마른 농토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 저 건너편에 광활한 땅이 있는데 보니까 어떤 슈퍼맨 하나가 펌푸질을 하는데 한시간도 좋습니다. 2시간도 좋습니다. 오전내내 쉬지않고 펌푸질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점심시간인데 점심도 먹지 않고 펌푸질을 합니다. 그 다음날도 밤새도록 펌푸질을 합니다. 그 다음날도 봤더니 새벽부터 펌푸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슈퍼맨인가? 원더우먼인가? 가보기로 했습니다. 강을 건너 가까이 가는데도 계속 펌푸질을 했습니다. 가서 보니 기계인간이었습니다. 물을 펌푸질하고 나니까 솟아오르는 물로 다시 누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만든 것입니다. 또 누르면 물이 솟아오르게 되고 다시 그 물로 누르게 하고 기계인간인 것이지요.

야곱처럼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그 때 새이름 ‘이스라엘’을 받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마”
피곤의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무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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