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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계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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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1주일동안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곱 번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내 스스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분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물건의 용도를 알고자 한다면 물건을 만드신 분에게 물어보아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창조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서 너희를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들어진 물건은 만들어진 물건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든 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나를 위해서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만들 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우연한 존재도 아니고 제품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유명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미술이나 조각으로 명성이 있는 위대한 작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의 가치는 환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우연히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제품도 아니고, 나는 위대한 걸작품이라는 실존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나는 우연도 아니고, 나는 제품도 아니고,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걸작품을 만들 때 하루정도 쓰고 버릴 정도로 일시적으로 만드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잠시 동안 머무는 곳일 뿐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면 얼마나 짧게 한순간에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다고도 이야기 합니다.  요즘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연세가 있는 분들은 베를 한번씩은 짜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에 베를 짜는 것을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베틀의 북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인생도 이렇게 빠르게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일식간에 끝난다고 말합니다.  숨을 한번 쉬는 그 순간에 우리의 인생이 다 가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 동안에 지나가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은 다 임시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도 임시로 빌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게 “몸아 참 감사하다.  나를 위해서 심장도 띄어주고 모든 것을 빌려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번 고마움을 표현해 보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임시적인 것입니다.  내 아내와 남편도 임시적인 것이며, 내 자식들도 임시적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임시적으로 잠깐 동안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말자” 이 노래는 정말 철학적인 노래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그네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오라고 부르시면 가는 나그네인데 같은 나그네가 꼭 알아야 될 것은 정일랑, 미련일랑 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나그네가 한번 지나가는 길에 정도 주고, 미련도 주고, 투자도 하며 온갖 계획을 다 세우는 나그네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임시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시험, 저런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만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우리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유혹[Temptation]을 합니다.  이런 유혹이 올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시험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Test를 하십니다.  대학 시험을 안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대학원 시험도 안 치르고 대학원에 들어가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취직 시험을 안 치르고 직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시험을 보아야만 한 단계 승진도 되고, 높아지고, 공부도 더 잘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고 축복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시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시험이 올 때 넘어지지 말고 담대하게 이겨서 한 단계 Jump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고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모두 합격해서 이런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잠시 빌려 쓰는 것입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서 쓰고 있다가 갈 때 다 두고 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빌려서 쓰는 것들을 마치 제 것처럼 거기에 가치관을 두고 돈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것을 빌려서 쓰고 있습니다.  움켜지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이 있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깐 동안의 임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잠깐의 임시적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결정되어집니다.  예를 들면, 엄마 뱃속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의 준비과정입니다.  엄마의 뱃속처럼 완벽한 장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서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의 구조가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눈도 손도 발도 필요 없는 전자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준비 없이 세상에 나온다면 사람구실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을 살게 하기위한 준비과정입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서 코도 손도 발도 없어도 괜찮지만 이 땅에 나오면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는 예수님 믿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시집 장가 잘 가고, 사업도 잘하고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전혀 다르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야하지만 잠깐 동안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만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의 질문에 대한 한마디의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광명소로 소문이 난 나이야가라 폭포를 떠올려보세요.  그곳에 간 사람들은 “와!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만물을 만드셨을까!” 감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과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본래 아담과 하와는 영광을 돌리면서 살았는데,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영광 돌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의 문제를 처리하십니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난후에 새롭게 창조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피조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재창조된 피조물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목적대로 잘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제가 마이크를 하나 사왔습니다.  이 마이크가 제 기능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이크를 자주 닦기도 하고 광도 내면서 얼마나 소중하게 보관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마이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바로 버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을 잘 따라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보호하시고 자랑하시며 은혜까지도 주실 줄 믿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존재의 의미를 잘 깨닫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적이 있어야 방황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갑니다.  우리의 남은 삶은 목적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남은 삶은 시간낭비하지 않고 승리하며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한 주간 동안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던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된 우리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까?  첫 번째, 예배  두 번째, 교제  세 번째, 훈련  네 번째, 사역  다섯 번째, 사명[전도]  이 다섯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한가지씩의 사명을 한 주간에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우리가 첫 번째의 목적을 살피고 내일부터 엿새 동안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첫 번째 목적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도 정말 마음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놓고 칭찬을 할 때 “아,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다!” 라며 칭찬을 할 때 어떤 표현을 사용합니까?  “아, 그 사람 정말 좋은 인격자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인격자라는 말은 지(知), 정(正), 의(義)가 잘 조화된 사람을 인격자라고 말합니다.  너무 막힌 사람은 안됩니다.  지식이 있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웃을 때 같이 웃고 울 때도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정적인 면이 풍부해야 합니다.  만나면 반갑다고 기뻐하며 표현을 하는 정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결심 한 것은 뜻을 가지고 반드시 진행해 나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지(知), 정(正), 의(義)가 잘 갖추어진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말 하는데 때로는 하나님을 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도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인격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었더니 우리가 인격자가 되어진 것이고 이러한 인격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지, 정, 의는 우리보다 훨씬 더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만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기쁨을 가지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기뻐하시는가 하면 바로 우리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기쁨이 있을 때, 그 기쁨을 이기 못할 때 어떻게 합니까?  배가 댕기도록 깔깔거리며 웃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웃음도 참지 못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가장 기뻤습니까? 

간절히 기다렸던 자녀가 태어날 때, 또 그 자녀가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면 한없이 기뻐집니다.  노래하는 모습을 봐도 기쁘고, 똥을 싸도 기쁘고, 넘어져 울 때도 기쁩니다.  그냥 바라만 봐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도 좀 늦게 장가를 갔습니다.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갔는데 그때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시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너무 웃음이 나와서 사무실에 바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얼굴을 좀 근엄하게 표정을 만들면서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낳고, 그 자녀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는 감추지 못한다고, 이기지 못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시고 이렇게 기뻐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드릴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렇게 기쁨을 드리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 그 책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될 수 있는 서열도 아니었으며, 이미 아도니아라는 다윗의 아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는 천번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도 되고, 천번의 제물을 드렸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일천번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예배를 표현할 때 일천번제를 드린다고 표현합니다.  솔로몬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서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예, 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나는 어린 아이입니다.  출입할 줄을 모릅니다.  이 많은 백성들을 내가 어떻게 재판을 해서 선악을 구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지혜를 더하여주시옵소서!”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가 원수의 생명도 구하지 아니하고, 너를 위한 부귀영화도 구하지 아니하고, 지혜만을 구하였으니 내가 너에게 지혜도 주고 네가 구하지 아니한 다른 모든 것도 다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상 솔로몬과 같은 왕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토록 지혜로움을 갖춘 왕은 전무후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창조하시고 예배를 잘 드릴 때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에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지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배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는 본능과 번식의 본능도 주셨습니다.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의 본능을 주셨기 때문에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 할지라도 예배가 있습니다.  미개한 종족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삶 속에서 항상 예배가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예배를 드립니다. 

침팬지는 굉장한 지능이 있는 동물입니다.  왠만한 사람만큼 지능이 높은 침팬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침팬지가 똑똑하다고 해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지 않을 때는 다른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 삶의 목적이고, 예배 하도록 우리는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이 존재 이유입니다.  인간이 본능대로 살지 않으면 죽습니다.  인간에게는 식욕이 있는데 식욕대로 살지 않고 본능을 죽여버린다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성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성적인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면, 결혼도 하지 않고 산다면 집안의 대가 끊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예배의 본능을 살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죽습니다.  우리의 영이 죽으면 혼도 죽게 되고 육체도 따라서 죽게 됩니다.  물건이 만들어진 목적대로 쓰이지 않으면 그 물건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예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예배하지 아니하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에머슨은 예배의 상실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미국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상실하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의 재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는 실패해도 예배생활만은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생활을 성공해야만 다른 곳에서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흔들리면 신앙이 흔들리고 신앙이 흔들리면 우리의 삶 전체가 다 흔들립니다.  신앙은 피자 한판의 여덟쪽 중에서 겨우 한쪽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삶의 전체입니다.  신앙은 모든 삶의 구심점이고 그 신앙의 중심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잘 드리면 신앙이 바로 서고 신앙이 바로서면 전체의 삶이 다 승리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못 드리게 해서 망하도록 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제안했습니까?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는데 사탄의 대리자인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방해합니다.  예배드려서는 안된다고 극구 반대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많은 재앙을 내리니까 나중에 포기하고 예배를 드리라고는 하지만,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다가살만하니까 다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또다시 재앙을 내리니까 다시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만, 이제는 너희만 가서 예배를 드려야지 소와 양은 가져가지 말고 너희 몸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다가 또 얼마동안 살만하니까 다시 방해를 합니다.  다시 재앙을 받자 이번에는 아이들은 예배드리지 말고 너희 어른들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끊임없이 방해를 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예배를 왜 방해를 합니까?  우리가 예배하지 아니하면 전체가 다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를 가려고 하면 멀리는 가지 말아라, 조금 더 가까운 곳을 찾아보라는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신앙의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죽습니다.  멀리 가지 말라고 해서 가까운데로 가면 이번에는 헌금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또 아이들은 집에 두고 너만 가서 예배 드려라.  오늘도 계속해서 이렇게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탄의 방해를 이기고 승리해서 이 자리에 나온 분들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생활에서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잘 들여서 살아있는 예배가 될 때는 나라가 튼튼하고 국방이 튼튼합니다.  나라 안이 평강하고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셔서 곡식이 잘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약화되면 외적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일어나고 평강이 깨지고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의 자녀까지도 삶아먹는 이런 엄청난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경제와 안보와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졌습니다. 

예배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예배에 실패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따라서 해보겠습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예배에 실패하지 아니하리라!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바빠도 내가 죽지 않을 만큼 되어지면 예배는 반드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기를 “오늘 예배 잘 드렸다, 오늘 은혜 많이 받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예배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는 워십[Worship]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서비스[service]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비스할 때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방법대로 하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겠다고 초대해놓고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묻지도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서 자기만 실컷 먹고 난후에 오늘 대접 참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한다면 그 사람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늘 예배는 내가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서비스가 아닙니다. 

예배는 내게 있는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드린다.  내게 가장 가치 있는 좋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으로 섬기고, 최상의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라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라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가 너무 번폐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예배가 번거롭다.  예배가 짐이 된다.  예배가 귀찮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도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을 드리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을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게 준 이 제물을 너희 총독에게 주면 받겠느냐?  그들도 받지 않을 것인데 내가 받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시대만 그런 예배를 드렸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는 양을 잡고 소를 잡아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물질로 드리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병들고 저는 것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병들고 저는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시간에 있어서 병들고 저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졸며 예배를 드리고, 또 축도 전에 나가는 우리의 예배태도는 시간적인 면에 있어서 병들고 저는 것입니다.

4. 예배를 위한 결심

오늘 나누어드린 주보를 살펴보시면 스티커를 한 장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테이블 앞에도 한 장씩 모두 붙여놓았는데 이 스티커를 여러분 각자의 찬송가에 모두 붙이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10분 일찍 오셨네요.  주님께서 참 기뻐하실 꺼예요.” 하고 써놓았습니다.  우리도 예배 10분전에 오시는 습관을 길러야겠습니다.  예배에 늦게 오는 것도 병들고 저는 제물을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대통령이 초대한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자리에 10분 늦게 도착한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1년 전에 갓피플 닷컴(www.godpeople.com)에서 네티즌 1,785명을 대상으로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20.1%는 옷 입고, 화장하고 준비하느라고 늦었다.  15.4%는 조금 더 있다가 한잠 더 자고 가려고하다가 늦었다.  12.6%는 습관적으로 항상 늦는다.  12.2%는 같이 갈사람 기다리다가 늦었다.  11%는 일어나지 못해서 늦었다.  절대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14.5%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대부분은 제시간에 오시지만 습관적으로 늦게 오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지각하지 않고 예배 10분전에 일찍 나오기, 그리고 앞자리는 금자리, 은혜자리입니다. 이렇게 좋은 앞자리부터 앉기 운동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예배시간에 절대로 빠지지 아니하리라!  예배시간에 늦지 아니하리라!  앞자리는 금자리!  앞자리부터 앉으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앞으로 더욱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잘라먹고, 와서 졸며 드려서 파먹고, 끝나기 전에 나가서 떼어먹는 병들고 저는 예배를 드리지 말고 온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도 깨끗하고, 옷도 깨끗해야 합니다.  지금도 규모 있는 모임에 가면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식당도 있습니다.  음악회인데도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음악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지에 가면 몇몇 예배당에서는 무릎이 보이는 옷을 입고가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습니다.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나에게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깨끗한 최선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깨끗한 헌금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십일조도 상처가 있는 예물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온전하게 드리지 않고 반쯤 드린다면 그것도 병들고 저는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잘려 나간 예배시간, 아무렇게나 입은 옷, 대충 드리는 헌금, 이런 것들을 대통령에게 드리면 받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대통령이 받을만한 정성을 가지고 드려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번 주는 예배주간입니다.  주일 낮 예배뿐만 아니고 주일 오후예배도 참석하시고 수요일 예배도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오후예배 때마다 새로운 강사를 모시고 매번 테마가 있는 예배를 드립니다.  앞으로는 수요일 예배는 은사집회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위해서 은사 집회를 하겠으니 모두 나오셔서 열심히 기도해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예배드리는 사람의 3분의 1은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또 3분의 1은 간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봅니다.  지금 우리 교인 중에도 예배를 드릴 때 앞에 강대상과 저 뒤에 천사가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일 전에도 성도님 한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옆에 누가 있었어요? 하면서 상담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이 장소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분의 1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헌금할 때의 모든 예배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아!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하면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와 지금 예배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예배가 훨씬 더 은혜롭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배와 아프리카의 예배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습관적이고 위선적인 예배가 아니고, 메마른 기도가 아니고, 입으로만 하는 찬양이 아니고, 건성으로 듣는 설교가 아니고, 아이들도 받지 않는 성의 없는 헌금이 아니고, 늦게 오는 예배시간이 아니고, 열정이 있는 예배, 기쁨으로 드리는 감격이 넘치는 예배를 회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록펠러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살았더니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되어서 시카고 대학과 같은 유명한 대학을 24개나 세웠습니다.  그리고 4,9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대로 살았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세 가지 유언이 이것입니다.
첫 번째는, 주일날 예배를 반드시 드리고 앞좌석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앞좌석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찍 와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졸아서도 안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십일조는 반드시 정확하게 드려야한다.  세 번째로는 목사님을 아버지와 같이 섬기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세 가지의 유언을 어머니께서 남기셨습니다.

‘불의 전차’ 리들을 보면 금메달도 사양합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나는 대통령은 안해도 주일에 예배는 드리겠다!” 고 말하는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배는 주일날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또 하나의 예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물론 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예배가 끝난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산제사입니다.  이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감격합니다.  깨달은 말씀과 감격을 가지고 계속해서 한주일 동안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주일날 낮 예배 때 모이는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그룹의 예배가 살아서 양 날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에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를 잘 드리고 이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만남을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다시 예배생활을 하는 양 날개 예배가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일날 들은 말씀을 가지고 일주일 내내 생활에 옮기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은 책상이 제단이 되고 주부는 부엌이 제단이 되고 가장은 직장이 제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격하여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며 찬양하고,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마음을 다 드려서 하나님과 교재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이러한 감격의 예배, 이 감격이 생활로 이어지는 예배, 두 양 날개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려서 예배 잘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을 받아서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평생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리라!  내 평생 예배에 실패하지 아니하리라!  내 평생 사탄에게 유혹받아서 예배를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이렇게 다짐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윤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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