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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의 회심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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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적이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특히나 정치판에서는 친구도 적도 없다곤 합니다. 그만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개망나니가 내일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귀한 존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말입니다. 도무지 사람 될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온 세계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결코 낙심할 이유도 없고 포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래서 말도 할 수 없었던 천덕꾸러기 여자 아이가 온 세계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 여사요 이 천덕꾸러기를 위대한 인물로 바꾸어 놓았던 위대한 스승이 바로 설리번 여사입니다. 설리번 여사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천덕꾸러기를 보살필 때 주 하나님이 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뒤바뀐 인생을 살게 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나중에 위대한 전도자 바울로 불리게 된 사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원래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미 우리는 사울이 어떠한 사람인지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입니다. 스스로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믿음으로는 철두철미한 바리새파 율법을 따라 성장했고 유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철저한 유대교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의 괴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예수의 부활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요 단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굳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당연히 유대교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존재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처형하는 일에 증인의 대표로서 앞장을 섰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에 머물고 있는 예수의 무리들을 잡아들이는데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지고 가까이는 사마리아 지방에서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되자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는 대제사장을 찾아 갑니다. 사울의 마음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위협과 살기로 가득차 있었기에 당연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잡아 가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마스쿠스에 가서 예수의 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고자 해서 대제사장에게 그곳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울이 이렇게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요한복음 16장 2절로 3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사울의 입장에서 바로 본 예수는 이단의 괴수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마땅히 처단해야 될 존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요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이렇게 예수 믿는 무리들을 잡아 처형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믿음으로 볼 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정말 미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신이 나가도 완전히 나가버린 사람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들이 볼 때 도대체 예수가 누구란 말입니까? 그냥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대로 성인군자 중 하나로밖에는 생각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네 전통과 윤리를 어지럽히는 사람들로만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들끼리만 노상 모이고 붙어 다니고 하는 그 모습이 그렇게 눈꼴사납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에도 예배드린다고 남편을 두고 나가버리지를 않나 무슨 수요 예배니 금요 기도회니 구역 예배니 해서 집을 비우는 것도 그들에게는 마땅치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니 그럴 수밖에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 2절로 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그 영생이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오직 한분 밖에 없는데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한 분 뿐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또한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우리가 노력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요 믿어도 왜 꼭 예수만이냐? 부처를 믿어도 되고 공자를 믿어도 되고 알라를 믿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다른 길은 없다고 아주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악한 마귀가 이를 인정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밖에 모르는 독선적인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핍박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울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토록 핍박을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임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 사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깨달을 수도 없고 깨닫지를 못하니 당연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를 뒤늦게 깨닫게 된 바울 사도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할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힘들고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도 우리를 능히 지켜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담대함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대로 오늘 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라며 이 은혜 가운데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떠날 때만해도 예수를 믿는 무리들을 잡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에 살기로만 가득했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쳤고 이에 그는 놀라서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런데 엎어진 그의 귀에 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아니 자기가 누구를 핍박한단 말입니까? 자기에게 음성을 들려주는 것으로 봐서는 하나님이 분명한데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다니요? 그래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신앙심으로 가득한 사울의 입장에서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정말 하나님이십니까?” 라고 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지금 일하고 있는데 그래서 다마스쿠스까지 가고 있는 마당인데 핍박한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하나님이 분명하신데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다고 하시니 정말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들려오는 음성이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흘 동안 사울이 느꼈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래 그는 아무 것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아니 내가 도대체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들려진 음성으로 본다면 정말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비로소 그는 자기가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을 이 사흘 동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줄 알았더니 사실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난 것이 아니라 나를 택하여 불러주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부른 이유는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맺어야 될 열매는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하기에는 우리가 받은 상처가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서로 기도하면서 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사랑이 내 안에 넘쳐나도록 기도하며 먼저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겠다. 그리고 내가 먼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면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하고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를 통해 “흩어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택하여 불러 주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울은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교회를 못 살게 굴었던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변하여 오히려 큰 하나님의 복음 증거자요 교회의 든든한 버팀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왜 우리가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까? 그도 회심하게 되면 이렇게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 누구라 하더라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면서 그리고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축복하면서 다가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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