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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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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고전2:1-5

I. 잘난 사람만 쓰시지 않는다

근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소년이 도벽을 버리지 못해 자동차를 훔치다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갔습니다. 소년원을 방문한 목사님이 기도를 해 주고 위로했습니다. "이번에 교도소에서 나오면 힘 닿는데까지 목사님이 도와주마." 그때 이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말씀 마세요. 자동차 훔치는 것 그렇게 쉬운 일 아니예요. 목사님이 도와주기 힘들 거예요. 목사님은 설교나 잘하세요."

잘못된 생각, 잘못된 행동, 잘못된 신학을 고칠 마음이 없는 사람은 도와줄 길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처음부터 못난 사람이기 때문에 못난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하나님께서도 잘난 사람만 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할때 지혜있고 영향력 있고 높은 신분의 사람만 쓰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적 가치로 볼 때 잘나지 못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고전1:27).

세상에 수많은 위인, 영웅들이 있었고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에도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위인들과 성경의 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잘난 사람을 불러서 '야, 그 사람 참 잘났다' 감탄의 역사가 아닙니다. 못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하시는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한 번도 제가 잘나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라도 시켜 놓아야 믿음생활 제대로 할 것 같으니까 목사를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여 쓰실 때에 능력순이 아니라 못난 순서대로 부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잘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도 못나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시청각 자료들이 참 많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이전에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드러낼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없는 일들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같은 인간을 선택하셨는지 모르겠다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 같은 인간도 부르셨다. 왜요? 너를 부르기 위해서." 야곱같은 인간을 부르셨다면 나 같은 인간도 하나님은 부르실 수 있다는 시청각 자료로 야곱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보십시오. 그 미련한 제자들을 불러 당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힘과 헬라철학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묶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네로 황제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이 배워 지혜로운 사람을 씁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을 씁니다. 훌륭하고 잘생긴 사람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든자를 부르러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약하여 넘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때로는 공포에 떠는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사람에게만 신경쓰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 약하여 넘어지는 사람,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런 우리들을 불러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그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들 역시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II.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고 복을 받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를 합니까? 똑같이 예배 드리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능력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늘 넘어지고 무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똑같이 목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목회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불행한 목회를 하는 것일까요?

어떤이는 지식이 모자라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이는 경험이 부족해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이나 환경 때문에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돈이 힘인데 돈이 없어서 자신은 아무일도 못한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경험이나 넉넉한 환경 따위는 신앙생활의 승리, 능력있는 삶, 성공적인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없으면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불편의 문제와 불행의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행복한 신앙생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환경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자신의 신학이나 환경을 의지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조건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파우워로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나 전도는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 3절에 이해하기 어려운 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무엇이 대사도 바울을 이토록 두렵게하고 약하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늘 바울을 괴롭히던 육신의 질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모적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말이 어눌해서 미리 겁을 먹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돕는 교인들이 모자라 고독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혹 고린도 도시의 위용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쓸데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당당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대답일 뿐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헬라의 수도 아덴의 전도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헬라 철학의 본거지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바울의 철학적끼가 발동한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 종교뿐만 아니라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헬라 철학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더라도 이들에겐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으로 논쟁을 하기도 하고 변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 싸움에서 보기좋게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대로 전도를 할 수 없었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실패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모진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도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철학적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십자가 초점을 잃은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 철학, 경험을 의지하는 사이에 성령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실패 원인은 이제 분명해졌고 우리가 능력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도 분명해졌습니다.

III. 먼저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통하여 큰 것을 깨닫고 큰 결단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 전도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절)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도 필요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나 말은 능력입니다. 복음전도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했고 착하기 그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사람이예요. 크지 않은 마을에서 전도를 하는데 예수 안믿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지옥 백성, 저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니 점점 대화의 문이 닫히고 마는 거지요. 물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지요. 그러나 지혜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번은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마침 옆집에서 제사 떡을 들고 온 겁니다. 이 목사님, 떡 바구니를 빼앗아 "예수 믿는 사람은 제사 음식 안 먹습니다"하고는 떡을 모두 쓰레기통에 부어 버렸더랍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름다운 것"이란 단어입니다. 말의 아름다움,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불신자를 전도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그들이 승복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달변이나 웅변이 영혼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말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불신자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절에 이어 본문 4절에서도 똑같은 결심을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4절) 전도에서는 물론, 모든 신앙생활에서 내 것 들어내고 나를 자랑하면 실패합니다. 은혜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내 의는 무익합니다. 내 재주, 내 경험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해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결단하십시다. 사도 바울처럼 포기하기로! 배설물로 여기기로! 버리기로! 그래야 새로운 능력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IV. 오직 십자가

사도 바울의 결단,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전도의 가장 탁월한 - 아니 유일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본문 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여기 "작정하다"는 말이 헬라어 원문으로 "크리네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복음전도에서 달변이나 설득이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최종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 통해 복받겠다고 처음엔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오직 예수님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병 낫겠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수님만 붙들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얻겠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고민을 하고 거룩한 수고를 하더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학은 깨끗이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와서 피묻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굳은 심령이 부서집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이다. 오직 십자가만 전하리라" 결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의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자녀가 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그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오늘도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니요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였습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그 물건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사도록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멋있는 말로, 그럴듯한 표현을 해가며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판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사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하지 않았습니다(갈6:14).

모든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V. 오직 성령

오늘 본문이 말하는 또다른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전도의 원동력, 성도의 파우워가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절).

여기 4절에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란 말이 나오고 5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4절과 5절을 다시 한번 풀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내 말 재주를 의지하지 아니했다 오직 성령님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 성령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너희도 믿음생활을 할 때 네 자신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형벌받게 될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란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 진리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분은 죽었으나 사흘만에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오던 모든 인생의 가치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무릎꿇어 경배하도록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누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안 믿고 싶어도 저절로 믿어집니다. 그때부터 지옥 가기는 영 걸렀습니다.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별것 아닌 설교 같았는데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찡하더니 예수가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때로는 강퍅한 심령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성령님이 나타나십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표적이 나타나고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성령의 구원하는 능력은 믿는데 성령의 나타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자들 가운데는 "성령의 나타나심"만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치우친 신앙들입니다. 예수 안에는 성령능력도 있고 성령의 나타나심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

VI.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잘난 사람만 잘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이룬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적 사역의 원리입니다. 셀교회와 알파코스의 정신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의 믿음이 있고 뱃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오직 십자가의 능력, 오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에 의하여!

제 목회의 첫사랑, 처녀 목회지는 마포구 망원동입니다. 33살 어린 나이에 전도사 신분으로 한 교회 담임으로 부임했습니다.

·분쟁과 갈등으로 교회는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낙심으로 거의 체념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즘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좋은 동네가 되었습니다만 처음 거기서 목회하던 고 이상양 전도사는 "망할 놈들이 모여 망할 짓만하는 망할 놈의 동네"라고 탄식했습니다.
·전도가 중단된지 퍽이나 시간이 지난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회복의 능력을 보고 싶었습니다. "문제만 보면 문제가 보이고 문제를 문제시하면 문제가 된다." 저는 문제를 보는 대신 예수만 보자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의 회복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독을 먹어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먹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상처를 먹고도 상처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모습을 보고도 멋진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새역사를 만들자고 소리쳤습니다.

4년만에 기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 부흥하는 모델교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교단이 주목하고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첫사랑을 쏟았던 처녀 목회지에서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회복과 치유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부흥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역사를 이루는 복음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신앙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전도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가문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부흥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교회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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