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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슬의 연주 (행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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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아덴(지금의 그리스 아테네)을 떠나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육상과 해상의 지중해 연안 국가를 포함한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윤택한 생활은 우상숭배와 함께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타락의 중심지 고린도에서 선교전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선교전략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재정적인 뒷받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면부지의 낯선 곳에서 우선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피륙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바울의 사역에 전격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그들은 금슬지락(琴瑟之樂)의 부부 였습니다.

여기 금은 거문고 금(琴)자입니다. 슬(실)은 비파 슬(瑟)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부사이의 화목과 즐거움을 상징할 때 거문고와 비파의 조화에다 비유하여 금슬지락이라고 합니다.
본문 18장 2절에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로마에서 고린도에 온 것은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습니다.

글라우디오는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였습니다. 그의 재위 9년(49년 경)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追放令)을 내렸습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이 추방령이 내려지게 된 동기는 로마의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 남자들은 다 추방해 버렸지만 유대 여자들은 원하는 대로 로마에 남아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 여자들을 남자들의 이용물로 사용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그 때 로마 정부에서는 유대 여자들이 남게 되면 특별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유대여자들은 이 특권을 거절하고 사랑하는 남편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은 언약사상에 기초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결혼하면 상대방을 향하여 언약의 남편 그리고 언약의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로 맺어진 약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에 그들 둘 사이에 다른 아무도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이혼하고 쉽게 결혼하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아야 합니다. 이혼하는 이유가 살아가기가 힘들어서 이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혼한다는 것도 결혼 자체를 쉽게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수없이 이사를 했습니다. 큰 이사만 해도 본도에서 로마로, 그 곳에서 고린도로 또 거기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다시 로마로 왔습니다. 이들이 한 도시에서도 여러 번 다른 장소로 이사를 했다는 것은 얼마든지 예측 가능합니다.
우리가 신림동에 살지만 신림동에서도 여러 번 이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언제나 함께 등장합니다. 초기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부부를 말할 때 단연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부부에 대해 여섯 번 기록되는데 그 중 네 번은 부인 이름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활동이 남편 아굴라보다 두드러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라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인의 활동을 지극히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남편 아굴라의 이해력이 더 값진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아굴라가 외조를 잘했다고 말하기보다는 부인의 의사를 존중해줄 뿐 아니라 부인의 뜻을 무시하지 아니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부부는 하나님의 일을 극히 작은 것도 할 수 없습니다.

Ⅱ. 복음 전파가 그들의 존재 목적이었 습니다.

1) 바울과 함께 일했습니다.
본문 18장 3절에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2) 복음 전파에 동참했습니다.
본문 18장 4절에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1년 6개월 동안이나 같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수종들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이들도 의젓한 교사로서의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3) 바른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
본문 18장 26절에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라고 하는 유명한 전도자가 에베소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박식한 자입니다. 그래서 주의 도에 대해서 자세히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그의 가르치는 것을 듣고 보니 세례 요한까지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아볼로가 어디서 성경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중요한 핵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볼로가 복음의 진수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수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된 모든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박식하다고 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능하다고 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가르친다고 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자의 신앙과 신학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교만하거나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자존심 상하지 아니하도록 가만히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후 아볼로는 이들 부부가 전해주는 진리의 복음을 받고 훌륭한 설교자가 되어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Ⅲ. 복음 전파가 그들의 존재적 사명이 었습니다.

1) 이들 부부는 교회와 가정을 일체화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20절에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바울이 말하는 아시아의 교회들은 지금의 터키지역에 위치한 교회를 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과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을 도우는 삶이었습니다. 이들 부부의 마음도 주의 종 바울을 도우는 일이 저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주의 종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객관적인 최대공약수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천박한 기복 개념에 의해서 주의 종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택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거룩한 뜻에 따라 헌신하는 마음으로 주의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전도자들에게 집회 장소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민감한 것입니다. 전도자들에게 대단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집회 장소입니다.

이때는 이들 부부가 다시 로마로 돌아왔던 시기입니다. 이들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세계 복음화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이들 부부의 집에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유가 있다고 해도 큰 건물의 집회 장소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통 세상에 기독교 말살정책으로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역예배를 한 번 드린다고 해도 장소를 제공하는 가정은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집을 공식적인 예배처소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2) 이들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동역자, 교회운동의 동역자, 세계 선교운동의 동역자, 이러한 별칭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3) 이들 부부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들 부부가 사도 바울의 사역에 어떻게 도왔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 놓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죤 머레이(John Murray)는 이것은 그들이 핍박의 손에서 바울의 생명을 구하고자 극단적인 위험을 겪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 부부가 바울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와 함께 일사각오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있는 극단적인 수사까지 동원하면서 이들 부부의 헌신을 회고한 것은 이들 부부의 충성과 헌신과 봉사가 지극히 영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까지 이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설교를 지난주일 인쇄에 넘겼습니다. 오늘 이상하게도 송집사님의 부군되시는 전형달 집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오늘 설교 제목이 금슬의 연주입니다. 금슬은 이들 부부의 일체(一 )를 말하고 연주는 이들의 복음사역의 일체(一 )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저의 의도였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도우는 것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기드온 300용사가 미디안 진영을 공격할 때 여호와와 기드온을 동일한 의미로 말했습니다. 사사기 7장 18절에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사기 7장 20절에도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섬기고 그 앞에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이 곧 주께 하는 것으로 일체화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복음 전파에 우리의 신망애를 거는 것은

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a living construction work)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우리도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② 하나님의 말씀은 찬송의 대상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동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했습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아니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5-6절에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 6장 48-51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를 누가 주장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박시켜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 교환가치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사용가치로서의 성공을 원해야 합니다.
이들 부부는 참으로 복된 부부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이들 부부를 바울에게 붙인 것은 이들의 복입니다. 언제나 복음운동에 나란히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야말로 참으로 금슬의 연주입니다. -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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