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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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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RUN이란 선교잡지에 실린 나라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혈서로 쓰여진 옥중편지를 소개합니다.
`저는 이제 스무 살이 된 자매입니다. 지난여름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옷이 벗긴 채 포승에 묶여서
  전기봉으로 차마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전기봉으로 나의 온 몸을 태웠고.
머리는 잡아 뜯겨서 이미 산발이 되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실신하는 내 몸에 물을 쏟으며 고문했습니다.
어머니(교회를 의미), 저희들은 이제 찬송을 부를 힘도, 성대도 없습니다.
우리의 입마저 전기봉으로 지져져서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무섭지도 않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주님이 계신 영원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어머니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우리들이 이런 견딜 수 없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잃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2001년 12월 16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는 것, 축복의 최정상입니다.
아무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는 것,
    역시 성령의 은혜로 만이 가능합니다.
실제 팔복 강의를 예수님께 직접들은 제자들은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즉 핍박이 두려워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충만 받은 제자들
    주를 위해 고난당하는 걸 기뻐하더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축복의 최정상에 오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 지는 형통의 삶이 전개되어져야 할 건데

1. 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핍박이 있게 합니까?(10절)

1) 그것은 진정한 성도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이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 허영 시장에서 믿음이란 사람을 재판하는 과정       
무용 -저런 작자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해,
악의-나는 그 사람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해,               
육욕 - 그 사람은 보기만 해도 도대체 참을 수가 없어,
방탕- 언제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쁘다고만 한단 말이야.
그리고 다른 배심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항상 이 세상의 저항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무엘 레드포드>는
“ 하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 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바람이 그리스도인의 얼굴 쪽으로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저항을 받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
그리고 핍박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나가며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합니다.
그래서  터틀리안은 「핍박은 교회의 종자」라고 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가짜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골고다)까지는 가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2)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핍박은 의를 위해 받는 핍박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이나 사회적인 소신에 근거해서
데모를 하고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소신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부인은 교회 봉사를 한다고 살림을 게을리 하고
  자녀를 돌보지 못 한다고 남편으로부터 핀잔을 듣는 것을 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핍박이 아닙니다.
빗나간 신앙의 열정 때문에 가족과 가정을 포기한 체 전도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경우도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닙니다.

그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바로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불이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 지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막10:29-30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주를 위해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핍박을 받은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10절)

우리는 팔복을 보면서 그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즉 천국에 관한 복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8번째도 천국에 관한 복을 말씀합니다.
왜 두 번이나 천국 복을 언급합니까?
그 이유는 첫 번째 복은 천국에서 시작되는 복이요,
      마지막 복은 천국에서 마무리되는 복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복`이란 천국이라는 범주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천국에서 벗어난 것은 복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지요.
이것 아셔야 괄세하는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복을 소유한 사람은
결국 천국에서 더 큰 복을 누리기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마무리를 지울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을 끝까지 견딤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핍박받는 것이 왜 최고의 복인가 하면
팔복은 축복의 산을 향해 올라가는 8개의 베이스 캠프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핍박을 받는 것은 바로 축복의 산의 정상을 정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자로 시작하여
    천국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최후에 받는 복이란 우리 믿는 자가 궁극적으로 도착되어야 할 목표요,         
반드시 받아야만 할 복이요,
        더 이상 받을 다른 복이 없는 최고 최상의 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 증거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핍박을 받지 않으면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요,     
최상의 복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표시로 많은 사람들이                        <4>
    자동차에 물고기 모양의 마크를 달고 다닙니다.
그것 왜 달고 다닙니까?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받아 들여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제국은 지역적으로 광대하고 인종과 문화가 다양해     
정치적으로 통일 시킬 이데올로기가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각 식민지의 고유 종교들은 인정해 주는 대신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자들은 반드시 황제를 신으로 숭배토록 했습니다.
일 년에 일차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에서 제사 지냈다는 증명서를     
신분증처럼 소지하고 다녀야 했고,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나 어떤 모임이든 인사말로     
“가이사는 나의 주(主)입니다”라고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자로선 십계명의 첫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를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나 인간을 주로 섬길 수 없음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로마에 대한 반역 죄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순교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런 핍박가운데도 그들끼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주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지하 동굴에서 비밀리에 예배 볼 때에
이 고백의 각 단어의 헬라어 첫 글짜를 딴 ‘익투스(fish)’라는 단어로
      신자임을 드러내는 일종의 암호로 사용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익투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예수 믿는 믿음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날 사람들이 자동차에 물고기 표시를 다는 뜻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과 삶의 주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풀어서 말한다면
“어떤 핍박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예수는 나의 주님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과연 교인들이 그런 헌신을 바탕으로 실제로 그렇게 살면서   
물고기 표시를 달고 다니는 것일까요?
물고기를 달더라도 주님께 대한 정절의 표시로 달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3. 핍박을 받은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10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합니다.
두 가지 천국이 있지요 - 장차 들어가는 누리는 천국이 있는가 하면
                임하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천국과 무엇이 다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천국은 임하는 천국의 은혜라고 한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누리는 천국은 천국의 상급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진짜 부자> 라는 예화가 있습니다.
포도농장 주인은 기분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포도농장 주인은 이웃에 사는 사과농장 주인이랑
      누가 더 부자인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포도 열매가 풍작이고 사과보다 포도가 훨씬 잘 팔리기 때문에
포도농장 주인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장주인은 굉장히 큰 걱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으면서 “휴우···휴우” 하고 한숨만 쉬고 있습니다.
이유는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 중에
    언제나 쉬는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늙은 노예가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를 ‘모세 목사’라고 불렀습니다.
포도농장 주인이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은
      낮에 모세 목사가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농장주인은 모세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 주제에 예수 믿는다고 핍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점심시간에
    다른 노예들은 점심식사 후에 모두 낮잠을 자는데
    모세 목사만 혼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농장주인 마음속에 이 모세 목사를 좀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떠올라
몰래 뒤로 다가가서 갑자기 “왁!”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모세 목사가 놀랬을까요? 아니요.
모세 목사는 “어, 주인님”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주인을 뒤돌아 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많고 귀가 어두워서 잘 못 듣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목사가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자 주인은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자네 얼굴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네.. 주인님, 제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요.
  이 농장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이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죽는데요.”
농장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뭐어라꼬?”
이 농장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예요? 바로 농장주인 자기인데
  그럼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누가 죽는단 말인가?
농장주인은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흥, 그래? 성경을 너무 많이 보다보니 별 개꿈을 다 꾸는구먼!”    <6> 
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집으로 돌아온 다음
    주인의 마음속에 걱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모세 목사는 성경도 열심히 보고 또 기도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꿈속에서· 큰일들을 가르쳐 줄 수 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정말 내가 죽을 수도 있잖아” 이런 생각이 드니
주인은 저녁식사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늘 밤에 죽을 지도 모르는데 밥이 맛있겠어요?
잠을 자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걱정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농장주인은 제일 재미있는 책을 한 권 들고 의자에 앉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벌써 새벽 1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베개 밑에 권총이 잘 있는지 만져 보았습니다.
만약 강도가 들어오면 이 총으로 쏠거라구요.
“땡, 땡, 땡·” 새벽 세시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침이 되겠지
그럼 아까 모세 목사가 했던 꿈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 되겠지?’
그러면서 혹시 누가 몰래 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주인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은 권총을 손에 쥐고 조심, 조심 뒷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농장주인은 문을 ‘확’ 열면서 권총을 들이댔습니다. “꼼짝마”
그러자 거기에는 노예 대장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인님, 저예요. 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달려온 건 방금 모세 목사가 죽었기 때문이에요
그걸 알려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하는 말이
“내가 제일 부자인 줄 알았는데 예수 믿는다고 손가락질 받던 그가 더 부자였나?”
의미 있는 예화이지요. 천국부자로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4. 주를 위해 핍박을 받는 다는 것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며 우리가 언제 이런 핍박을 받습니까?(11절)

의를 따르게 되면 어떤 핍박이 오겠습니까?
한국교인들은 거의가 신앙생활을 세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해서 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 생활’입니다. 주일 날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구역예배와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하며,
  집에서도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을 열심히 갖습니다.
둘째는 예수를 ‘증거하는 생활’이다.                      <7> 
전도폭발이나 사영리를 이용한 전도 훈련 등을 받아
  노방 혹은 개인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세 번째는 예수 믿는 신자답게 ‘실천하는 생활’로   
식사 때마다 기도를 간절히 하고
    집안에 성구나 그림을 걸고 찬양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습니다.
    그리고 서로 모여 거룩하고 고상하게 교제를 나눕니다.
        나아가 교회 봉사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세속적 사건이나 유흥의 냄새가 나면
        마치 징그러운 것을 본 양 얼굴을 찌푸립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의 거의 모든 포커스를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믿음 생활에만 둡니다.
둘째 증거 생활, 셋째 실천 생활은 조금 등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강해야 힘든 일을 이겨내고 주위에 전도도 잘 할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선 믿음을 키워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것도
예배, 성경공부, 기도 모임에 얼마나 성실히 출석했느냐에 따라 비례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핍박을 받는 문제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 생활이 방해 받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 가는 아내를 두들겨 팬다든지,
시부모가 예수 믿는 며느리 때문에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다고
      구박하는 것들이 핍박의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아가 남편이나 시부모로부터 받는 박해를
      마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카타쿰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것에 견주기도 합니다.
남편과 시부모는 로마 제국으로 하나님의 철천지원수가 되고     
자신은 거룩한 순교자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은 흔히 생각하듯
세상 사람이 예수를 믿고 증거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에만 국한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제3의 핍박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거의 무시하고 있는 제3의 핍박,
우리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고 겪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핍박은 따로 있습니다.
요15:18,19절“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방해와 억압입니다.
핍박에 대해 11절에 자세히 언급하기를                  <8>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바르고 의롭게 사는 성도에게 오는 것이
        곧 모욕과 박해와 위증입니다.
모욕은 나쁜 말이나 행동으로 인격적 멸시나 창피를 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직장의 술자리에 합석하지 않거나 해도
        술 마시지 않는 신자들은 욕을 얻어먹습니다.
      `멋대가리 없고 병신같은 예수쟁이`라고 욕을 합니다.
혹은 돈에 깨끗한 신자들은
    `제 혼자 잘났어!, 똑똑해!` `성자 낫네!` 등으로 비꼬임을 당합니다.
  아니면 `세상 살기 힘든 놈이야!`라며 무능력자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안 믿는 부모나 형제로부터
`예수 혼자 잘 믿는 체 하더니 왜 너는 되는 일이 없니,
예수 믿는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하나님이 정말 계시면 교회 30년 이상 다녔으면
    부자가 되어야지 그게 뭐냐?`는 등의 조롱을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딤후3:12절에
[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 
내일교우 여러분 !
핍박이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물론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가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고 하는 일이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예수 믿다가 오해를 사고, 중상모략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일 등등, 이 모두가 핍박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해도 인정받지 못할 때, 그것도 일종의 핍박이지요.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여 나름대로 수고를 하는데도
    알아주지를 않으면 그것도 일종의 핍박을 받는 것이지요.
주님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다 핍박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일은 비일비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모든 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이런 핍박을 받을 때가 있지요?
            언제? 전도할 때입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이래라 저래라 수를 가르쳐 주는 것을 훈수라고 합니다.
‘훈수는 뺨을 맞으면서도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 두는 장기나 바둑에 훈수가 꼭 따르기 마련입니다.
도대체 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당해가면서까지 훈수를 두는 것일까요? <9>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이유와 동기가 있겠지만
  분명히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고민하는 모습이 딱하기 때문에 훈수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는 이기면 잠시 즐겁고 지면 조금 섭섭할 뿐이지만
인생은 한 번 패배하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에 결코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버리고
    파멸의 길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인가?
백 번 천 번 “그 길은 위험한 길입니다.
그리로 가면 죽습니다”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훈수를 한 대가로
치욕의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셨으며,
그 분으로 인하여 죽음의 길을 벗어난 우리는
그 분이 원하는 대로 삶의 전투에서 패배해 가는 사람들에게
  이기는 길을 알려주어야 마땅하리라 봅니다.
욕먹는다고 분해하지 말고 매 맞는다고 슬퍼하지 말고
욕먹더라도 많은 생명을 완전한 패배로부터 빛나는 승리로 이끄는
    참된 훈수를 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5. 성도는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 기뻐하라고 할까요?(12절)

12절에 [ 하늘에 너희 상이 큼이라 ] 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핍박을 잘 참고 견디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즐기는 정신병자,
        마조키스트(학대를 즐기는 정신병자)이기 때문인가?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기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행5:41절에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도
    핍박을 참된 교회를 식별하는 표지로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회피하고 영광만을 추구하는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회퍼는 핍박을 참된 제자도의 표지라고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10>
히틀러 치하에서 미국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핍박의 현장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는 의를 위하여, 아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였으나,
이 세상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상처를 입고 고문을 당한 몸은 새 몸으로 변할 것이고,
      죄와 참회의 옷 대신에 영원한 의의 흰옷을 입을 것이다.`

행7장에서 보면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왜 주님이 서셨을까요?
주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스데반을 주님께서 받아 영접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스데반은 주님께서 앉아게시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서셔서 자기를 영접하시려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 아닙니까?
이 영광을 어떻게 누리게 된 것입니까?
주를 위해 끝까지 핍박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핍박이 오면 그것을 피하여 쉽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견디겠습니까?
주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천국을 완전히 소유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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