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옥합을 깨뜨리는 희생 (막 14:1-9)

  • 잡초 잡초
  • 485
  • 0

첨부 1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인간에겐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공부한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좋은 동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도 중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은 한 여인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는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어느 날 잔치 자리에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립니다. 그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여인을 보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귀한 것을 왜 낭비하느냐. 300데나리온 받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며 여인의 행동을 비난하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옹호해 주십니다. “저를 괴롭게 하지 말라. 오히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여 이 여인을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의 어느 누구가 이 마리아만큼 주님의 인정을 받고, 마리아만큼 주님의 칭찬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삶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3절 말씀에 보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는 아주 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전부를 다 부어드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희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옥합을 깨뜨린 희생”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여러분, 헌신과 희생의 차이를 아십니까? 헌신이란, ‘어떤 일이나 남을 위해서 자기의 이해 관계를 돌보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힘쓰는 것’, 즉 어떤 일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희생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희생은 남이나 어떤 일을 위하여 제 몸이나 재물 따위 등 귀중한 것을 바치는 행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생은 헌신보다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희생이란 자기를 상대방을 위해서 완전히 던지는 것,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께 내어드린 마리아의 희생을 이 아침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세 개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희생의 동기, 둘째, 희생의 자세, 셋째, 희생의 시기입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어떤 희생의 동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 주님 앞에 드렸을까요? 주님께 이렇게 희생한 동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드린다면 그것은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어도 거기에는 인색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동기,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 이것이 바로 옥합을 깨뜨린 희생의 동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잔치가 베다니에서 열렸습니다. 자, 여기에 오늘 성경에 보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아멘.

  이와 동일한 본문인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아마 마르다나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얼마 전에 오빠 나사로가 죽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이 슬피 움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무덤에 가셔서 돌문을 열게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나사로가 걸어 나온 사건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던 오빠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 큰 상심이었고 슬픔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다시 나사로를 일으키심으로 그 가정에 큰 기쁨을 준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주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시몬이란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문둥병을 앓고 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나사로의 집과 시몬의 집 가운데 서로 예수님을 모시려고 의논하다가 시몬이 이런 제안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집 보다는 우리가 살림살이도 낫고 우리 집이 더 넓으니까 우리 집에서 잔치를 합시다. 음식은 같이 준비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식사가 진행될 때에 마리아가 옥합을 들고 나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자기 머리털로 그 분의 발을 씻어드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감사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감사를 표현한다면 그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사람의 발을 씻겨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희생의 동기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께 어떤 은혜를 입었습니까? 우리는 어떤 감사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동물학자가 모성애와 부성애를 비교하려고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판을 놓고 밑에서 뜨겁게 불을 가열했습니다. 그 위에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같이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쳐서 뜨거워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한참 후에 이 동물학자가 와 보니 신기한 광경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원숭이는 그 철판위에 자기 몸을 놓아서 새까맣게 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위에 새끼 원숭이가 앉아 있는 것 이었답니다. 새끼 원숭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모성애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 다음엔 뜨거운 철판 위에 아버지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동일하게 놓았습니다. 한참 후에 와 보니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새끼 원숭이 등에 아버지 원숭이가 타고 올라 앉아 살아 있더랍니다. 이렇게 모성애와 부성애가 다르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희생, 어머니의 사랑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성애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깨뜨리셨고 자신의 물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 그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의 희생의 동기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옥합을 깨뜨린 희생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4절, 5절 말씀을 읽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 향유는 굉장히 고가의 물품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겠다고 비난한 사람은 가롯유다였고, 제자들 중 일부도 섞여 있었을지 모릅니다. 가롯유다는 요한복음에 보면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적이 아니라, 그 판 돈을 돈궤에 넣으면 가로챌 목적으로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노동자 품삯을 얘기합니다. 최소 5만원으로 잡는다면 300데나리온은 1천오백만원이 되며 10만원을 잡으면 3천만원에 이르는 돈입니다. 그 엄청난 고가의 향유를 주님 앞에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의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 나사로의 가정은 넉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싼 향유를 주님 앞에 부어드린다는 것은 거기에 헌신과 희생의 마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의 유대 여인들은 귀한 향유를 모으는 것이 결혼 준비 물품이었습니다. 조금의 돈이 생기면 향유를 사서 옥합을 채우고 채워서 그 옥합이 가득 차면 결혼 준비가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이 향유는 여인의 꼭 지참 물품이었습니다. 특별히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향유는 인도산으로 히말라야 산 정상에서 채취한 고급 향유였습니다.

  자, 그런데 이 여인은 한 방울쯤 드린 것이 아니라 그 전부를 다 주님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깨뜨리는 것으로 자기 전부를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전체를, 내 생명과 내 마음, 내 물질 전부를 드리는 결단이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색함도 없습니다. 계산적인 것도 없습니다. 전적인 희생의 자세가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듯이 마리아는 주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보니,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도 주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드린 희생을 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깨뜨리셨듯이 자신의 몸을 찢으셔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 처럼 마리아는 이제 자신의 전부를 깨뜨려서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깨뜨려야 할 옥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옥합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시간일까요? 물질일까요? 우리의 마음일까요? 우리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결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인도 교회에서는 헌금을 할 때에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든 교우들이 그 헌금에 참여한다, 둘째는 각기 자기의 형편에 따라 헌금을 드린다, 세번째는 헌금은 기쁨으로 드린다는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인도의 한 교회에서 선교센터를 설립하기 위해서 모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넉넉한 집사님이 첫 번째 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부원은 그 헌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은 “당신의 헌금은 첫 번째는 합당하지만 두 번째는 부합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매우 넉넉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은 액수의 헌금을 가져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돌아가서 다시 헌금을 준비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재정부원은 돌아온 헌금을 또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부분에는 부합하지만, 세 번째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기쁨으로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못해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상을 하고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헌금은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부유한 집사님은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사랑과 은혜의 마음을 가득 안고 기쁨으로 드릴 때 그 헌금은 기쁘게 받아들여졌고, 합당한 곳에 쓰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까? 최선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보니, 사도바울이 마게도니아 교회를 향해서 칭찬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아멘.

  마게도니아 교회는 환란과 가난 가운데 있지만 어느 누구 보다도 풍성한 헌금을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옥합을 깨뜨리는 헌금을 드리는 자의 자세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일생을 교직에 몸담으셨습니다. 그가 은퇴를 하고 자기 일생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소유를 보니 저금통장에 약간의 돈이 있고 50평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큰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전세방 하나는 얻어 주어야 했기에 이 장로님은 50평 아파트를 팔고 35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차액으로 큰 아들 전세를 얻어 주었습니다. 또 얼마 후에 딸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35평 아파트를 팔아서 20평 아파트로 옮기고 그 차액으로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자녀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얘들아, 내가 더 이상 너희들에게 해 줄게 없구나. 남은 20평 아파트는 내가 죽을 때 가져 갈 거다!” 했습니다.  자녀들도 다 수긍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약속하기를, 본인이 죽으면 그 남은 아파트를 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리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 아파트는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장로님의 일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 앞에 희생한 삶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여러분 삶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결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옥합을 깨뜨린 이 마리아의 희생의 시기를 생각해 봅시다.

  1절과 2절을 읽습니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아멘.
  유월절과 무교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번민도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인성도 가지셨기에 또한 제자들을 떠난다는 고독감과 외로움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간파한 것이 마리아였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가장 외로워하실 때, 마리아는 옥합을 가지고 와서 발을 씻기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림으로 그 분에게 놀라운 위로를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가장 적절한 때에 이 여인은 희생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에 기념될만한 감사를 위해서 우리는 기회를 붙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생애가 긴 것 같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붙들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대제사장들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며, 십자가를 앞에 두고 불안 가운데 있는 예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녀의 희생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한 성도가 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조금만 더 물질의 여유가 있으면 더 많이 봉사할 수 있을 텐데요. 하나님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좀 더 충성할 수 있을 텐데요, 좀 더 건강을 주시면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텐데요.”하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은 그 성도를 불쌍히 여겨 조금 더!의 물질과 조금 더!의 시간과 조금 더!의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는 더 드리지도 않고, 더 봉사하지도 않고, 더 충성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다 못해 주신 것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 나가 다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예전처럼 조금만 더의 시간과, 조금만 더의 물질과, 조금만 더의 건강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답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타임 아웃!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봉사할 수 있는 물질을 주었건만 봉사하지 않았습니다. 충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건만 하지 않았습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었지만 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더해주신 건강과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세상만을 더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할 수 있는 기회, 충성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98년, 제너라는 의사가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예전의 무서운 병은 천연두였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고 나면 곰보가 되어 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제너는 이것을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를 해서 젖소에서 천연두에 면역을 가진 우두를 발견하게 되었고 학계에 보고가 되었습니다. 당시 다른 학자들은 시골 학자가 우두를 발견하자 시기하고 비웃었습니다. 의학의 ABC도 모르는 주제라고 하며 비웃었습니다.

  그가 발견해 낸 우두가 실용화 되려면 권위 있는 학회에서 인정을 받고 통과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회의 권위 있는 학자들은 이 시골 의사 제너를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누누이 과정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통과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답답한 제너는 “제가 몇 달 전에 어느 사람에게 주사를 해 보았더니 약효가 드러났습니다.”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한 사람 임상 실험해서 어떻게 아느냐...”고 코웃음 쳤습니다. 그러나 제너는 “아닙니다. 저는 23명에게나 실험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낳은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장내는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우두를 상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태어난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는 이 어린 아이에게 실험을 했다는 말에 모두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너의 이런 희생적인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인류가 천연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발전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누군가의 헌신이 없으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의 기도의 희생, 눈물의 희생, 물질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또 한번의 희생을 기대하신다면, 또 한번의 헌신을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심정으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나 자신을 깨뜨리고, 우리의 시간을 깨뜨리고, 물질을 깨뜨릴 수 있는 여러분의 결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