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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솨라트’ 의 삶 (창 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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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억울한 적이 있으십니까?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았는데, 멋대로 산 사람만도 못 할 때는 없었습니까?
십일조도 늘 먼저 바치고, 성경도 자기 나이만큼 읽으며 거룩하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이 잘 안되었는데, 자기 하고 싶은 짓 다 하며 형편없이 산 다른 사람은 잘 되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이럴 때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섭섭하고 성질나면서 왠지 손해 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대개 이럴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태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반항’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어떻게 난 쟤보다 더 착하고 거룩하게 살았는데 재는 저렇게 될 수가 있어?”
그래서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참고 회개하고 싸웠던 악들을 다 저질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반항하듯 이 기회에 합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할 때 부모가 싫어하는 짓을 일부러 하듯 말입니다.
왜요? “억울해서!” “한이 많아서”입니다.

두 번째로는, 억울함의 반응을 하나님께 거절당했다고 생각하여 ‘자기연민’과 ‘체념’을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놈이 그럼 그렇지!” “그래 난 그런 놈이야!”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안 나옵니다. ‘먹지도 않습니다. 씻지도 않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엘리야’ 같이 ‘B.J.R.이 됩니다. 여기서 ‘B.J.R.’은 전용 용어로서 “배째라!”입니다.

마지막 억울할 때 보이는 유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더 믿음이 좋아지고, 더 소망이 생기고, 더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많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어떤 반응을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억울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비결에 대해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을 대라면 저는 ‘요셉’을 댈 것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억울한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랍니다.
그래서 입는 옷부터 다른 형들과 다릅니다.
아버지 야곱이 형들은 쎄일 하는 ‘기성복’ 사 입혀도, 요셉에게는 이태리 원단으로 ‘맞춤복’을 입힙니다. 그래서 그 위로 10형들이 아버지의 그러한 편애로 요셉을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17세 쯤 되었을 때에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편애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원래 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잘난 체를 잘 합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겁 없이 자기 ‘꿈 이야기’를 합니다. “곡식 단들이 있는데 형들의 단들이 내 단에 둘러서 절하였다.”는 꿈입니다.
이러한 말은 ‘말하는 사람은 기분 좋아도 듣는 사람들은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날 분위기는 정말 살벌했고, 썰렁했습니다.
“이 놈 뭐야?”, “아! 재수없어!”, “이걸 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형들에게 더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 후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 한다”는 꿈을 요셉이 또 꾸게 됩니다.
원래 편애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별로 눈치도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꿈 이야기들은 거침없이 또 다시 그대로 형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이라는 곳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가게 됩니다.
그때 그 형들은 요셉을 잡아서 죽이려다가 아예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형들의 입장으로 보면, 이것이 은혜가 되지만 요셉 입장에서 보면 참 억울한 일입니다.
- 자기가 11번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채색 옷을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안 꾼 꿈을 소설 쓰듯이 거짓말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형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타국에 팔려 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겁났을까요?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더 억울한 요셉의 이야기는 또 계속됩니다.
친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진 요셉은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왕을 옆에서 모시는 경호실장 격의 ‘보디발’ 집으로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은 워낙 성실히 일하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는 일마다 다 잘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일들도 이상하게 요셉이 맡으면 잘 합니다.
희한하게 그의 손만 가면 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저 ‘재수가 좋았다’거나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주변사람들이 요셉을 신적인 존재로 보게 만들 정도로 형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자기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다 관리하는 매니저로 요셉을 신뢰하고 맡겼습니다.

드디어 신세가 좋아지나 했더니, 문제는 보디발의 아내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워낙 바람기가 있어서 젊은 청년들을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음탕한 아줌마입니다. 이 사모님이 요셉만 보면, 맨 날 요상한 눈짓을 하고 꼬리치고 난리인 것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거룩함을 지킵니다. 범죄 하지도 않습니다. 절대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모님이 요셉을 잡기로 완전히 작정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사모님께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다 내 보내고, 요셉과 완전범죄를 저지를 날을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모르고 요셉은 출근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오자마자 사모님이 눈짓합니다. 물론 요셉이 그 눈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모님께서 대 놓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는 요셉의 옷을 꼭 붙잡고 유혹하며 꼬십니다.
그의 옷을 잡고 있는데 워낙 힘이 쎄서 옷을 벗고 도망치는 방법 외에는 빠져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모님이 화가 나고, 독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보디발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나서 요셉에게 묻지도 않고 감옥으로 쳐 넣어 버립니다.
감옥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으로 보냅니다. 그 감옥은 ‘국가 최고 통치자가 직접 가두어 두고, 바로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왔지만 보디발이 감옥에 넣기 전에 요셉을 때렸을까요? 안 때렸을까요? 아마 팼을 것입니다. 저 같아도 반은 죽여 놓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 요셉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억울한 상황에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계속됩니다.
이 기록들은 놀라운 기록입니다.

요셉이 억울할 때마다 성경에서 쓰고 있는 놀라운 기록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요셉이 억울하지 않던 37장에는 없고, 억울함이 시작되는 39장에 나오는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셉이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되 팔렸을 때 바로 나옵니다.
창 39:1, 2 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보디발과 그 사모님에께 억울하게 맞고 최악의 감옥에 갇혔을 때 바로 나옵니다.
창 39:20, 21입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

요셉의 억울한 순간마다 같이 딱 붙어서 나오는 놀라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억울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고백할까요?
“당신이 억울할 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은 요셉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십니까?

억울할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사는 요셉이 이후로 어떻게 변했을까요?
요셉의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그러던 중 그 감옥에 귀한 분들이 오셨습니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고위 공무원이 온 것입니다.
그들은 왕을 독살할 수도 있는 ‘술 맡은 관원장’과 ‘빵 굽는 관원장’들 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하루아침에 이 두 거물이 왕의 감옥으로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은 고관들이라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들을 감옥에서 모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희한하게 같은 날 각각 다른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됩니다. 너무 꿈이 이상해서 그 둘은 다 근심을 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묻고 대답 합니다.

창40:8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그리고는 그들은 꿈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그 꿈을 해석하게 하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은 “포도나무가 자기 앞에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사흘 후에 당신은 복직이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는 창40:14, 15절에 내 말대로 당신이 복직이 되면 꼭 나를 생각해 주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정말 잘못한 짓이 없이 여기에 끌려온 히브리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빵 굽는 관원장은 “흰 떡 세 덩어리가 내 머리에 있고, 새들이 내 머리에 있는 음식을 먹더라.”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그 빵 굽는 관원장에게 “당신은 사흘 후에 죽게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요셉의 말대로 삼 일 후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빵 굽는 관원장’은 사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된 후 요셉이라는 인물을 싹 잊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잊기도 쉽지 않은데 하나님의 역사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만 이 년을 요셉은 그렇게 잊혀진 채로 지냈다고 합니다.

요셉은 분명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니 소망에 들떠서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 일 없이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흐릅니다.

이때 요셉이 억울해 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게기고 심술부리고 반역했을까요?
아니면 자살을 기도했을까요?
아닙니다.. 요셉은 그때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냐구요? 제가 증거를 대 보겠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빵 굽는 관원장’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창40:8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그리고 그가 2년 동안 잊혀지고 난 후,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그 나라 안에서는 그 꿈을 해석할만한 용하다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해 내어 왕에게 권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드디어 만 이년 만에 감옥에서 나와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창 41:15에 보면, 그때 바로 왕이 요셉에게 묻습니다. “니가 그렇게 용하게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냐?”그때 요셉은 창41:16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감옥에 있을 때에 답한, 창40:8과 만 2년 동안 잊혀지고 난 후 왕 앞에서 대답한 것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이 이 년 전의 신앙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멋있는 삶이 아닙니까?
만 2년 동안 요셉은 어떻게 그 신앙을 유지했을까요?

억울한 중에도 여호와 함께 계심을 믿은 요셉은 잊혀진 2년 동안 다음과 같은 삶을 삽니다.
요셉의 삶을 한 줄로 줄 표현하자면 창40:4절입니다.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

이 절을 한 단어로 다시 줄이면 “섬겼더라”라는 히브리어로 ‘솨라트’입니다.
‘솨라트’라는 이 히브리 단어는 두 대상을 섬길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먼저, ‘솨라트’는 하나님을 섬길 때 쓰는 단어입니다.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신21:5)”

여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할 때 쓴 단어가 ‘솨라트’입니다.
‘솨라트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삶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사는 삶입니다.

창 37장의 요셉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솨라트’하는 요셉은 말부터 다릅니다. 가령 창37: 6에 “청하건데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9절에는 “내가 또 꾼 꿈을 꾼즉” 합니다.
그러나 억울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여 믿고 변화 된 하나님을 섬기는 솨라트의 삶을 사는 요셉은 창40:8에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라고 표현하고, 왕 앞에서도 41:16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솨라트의 삶’은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사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억울한 중에도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솨라트의 삶’을 삽니다.

또한, ‘솨라트’는 사람을 섬길 때 쓰는 단어입니다.
민수기 11:28에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에게 ‘술 맡은 관원장’과 ‘빵 굽는 관원장’을 섬겼을 때 ‘솨라트’를 씁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자기가 섬기는 관원장들의 얼굴만 봐도 근심의 빛이 있는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요셉은 두 관원장들의 말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솨라트의 삶’은 하나님만 섬기는 삶이 아니라, 사람들도 섬기는 삶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해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요셉처럼 사람들을 섬기는 ‘솨라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요셉처럼 나도 믿음 지키고, 내 가족도 구하고, 내 민족과 다른 나라까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김동호 목사님 늘 말씀하시는 ‘높은 뜻’이고 ‘하나님 내 덕 보세요’이고, ‘오천명을 먹이는 삶’입니다.

저는 먼저 저와 동역하는 교역자들과 여기 있는 재직들과 리더들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솨라트의 삶’을 먼저 모범을 보이며 삽시다!
그렇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문하고 여러분들의 귀한 설문을 가지고 기도하며 여러분들 섬기겠습니다.

또한, 높은뜻 숭의교회에 오시는 여러분 모두도 ‘솨라트의 삶’을 삽시다.
서로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할 때도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솨라트의 삶을 삽시다!”
(문희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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