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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공동체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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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가장 빅뉴스가 있었다면 태국의 쿠데타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총을 한발도 쏘지 않고 탱크 8대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좀 특별한 쿠데타로 받아들여집니다. 탁신 총리가 미국의 유엔총회에 가 있는 상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태국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하였고 태국의 탁신 총리는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어 망명처를 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그 가장 큰 원인이 탁신 총리의 부정축재와 권력남용이 주 원인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주식을 처분하여 많은 졸지에 큰 재산을 벌게 되었으나 세금은 단 한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세상의 문제 속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여 결국 혁명이 일어난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명한 영성신학자인 리처드 포스터의 고전 중에 ‘돈 섹스 권력’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삶에거 가장 경계해야 할 주제가 바로 이 3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돈이 우리의 호주머니를 위협하고 성이 침실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권력이란 우리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오늘 심지어 교회 속에서도 이 권력에 대한 남용과 오용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깨어지게 됩니다.

가정의 문제와 싸움의 중심에 가보면 상당한 경우가 권력의 싸움입니다. 누가 가정의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를 두고 싸웁니다. 가정 안에서 고부싸움을 할때 서로 경제권과 같은 권리를 서로 잡기 위하여 싸움을 합니다. 심지어 부자 지간에도 자식이 아버지의 권력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때로는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가 서로 주도권을 다투며 직분을 이용해 권력의 싸움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 속에서 섬기라고 준 직분과 섬김의 자리가 어느덧 권력의 자리가 되어서 서로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혹 또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섭섭해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정이 상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인생을 살며 경험하는 온갖 갈등의 뿌리에는 이런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의 부부의 갈등,부모 자식간의 갈등,직장의 상하간의 갈등,노사간의 갈등,교회의 직분을 둘러싼 갈등,나라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여야의 갈등,민족의 남북을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갈등등 모든 것들이 사실은 권력을 중심으로 한 갈등입니다.
2천년전의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 사이에도 권력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제자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각각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청탁을 하게 됩니다. 이말을 들은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너무 분노하는 것을 봅니다. 왜 분노할까요? 바로 그들에게도 이런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면서도 권력을 얻는 것에 대한 욕망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장 회복해야 할 중심의 주제는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평신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교회는 많은 평신도들이 다함께 섬김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 교회가 서로 섬김의 살아야 합니까?

1.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45절 “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년의 생애를 보면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섬김의 삶을 먼저 제자들에게 친히 본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만찬을 행하면서 손수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본래 유대 나라에서는 발을 씻기는 자들은 종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신 우리 주님이 손수 종이 돼서 제자들을 섬긴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땅히 예수님을 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주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시기고 난 뒤에 옷을 입으시고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겼는지 그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에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합니다.
오늘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몸소 행한 것처럼 먼저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본을 보이신 것처럼 먼저 섬김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누가 더 크냐 하는 질문과 싸움을 하기 이전에 먼저 섬김을 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더 오래 믿을 수록 직분을 갖을수록 더 연륜과 경험이 많을수록 더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을때 가장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월의식을 버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길때 왕의 자리에서 섬기지 않고 종의 자리로 내려와서 자신의 몸의 드리며 섬겼습니다. 빌립보서2장 6-7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엇고”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었습니다. 여기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본질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00% 하나님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으시고 높임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까? 바로 우리를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왕의 근성 우월의 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의식이 없습니까?
특히 우리나라는 무서운 병이 바로 서열병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가장 먼저 매기는 서열이 무엇입니까? 나이의 서열입니다.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또 학교에서 졸업년수로 서열을 매깁니다.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목회안수를 근거로 서열으 매깁니다. 그리고 그 서열의 비교 속에서 한 살이라도 나이가 더 많으면 우리는 얼마나 어깨에 힘을 줍니까? 좀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고 형님이라고 어깨에 힘을 줍니다. 혹은 촌수를 따져서 조금이라도 위이면 그때부터는 얼마나 건방진 태도를 갖습니까?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가 잘못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교문화는 철저하게 출세중심의 문화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장원급제를 하는 순간 그 자리는 권력의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출세는 바로 장원에 급제하는 것입니다. 또 그 가문은 조상들이 우의정 좌의정했다는 권력의 소유를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높아졌는가 이것이 자랑이 아니라 얼마나 낮아졌는가 이것이 자랑이 됩니다.

이땅에 처음 온 선교사들의 수기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땅에 도착한 신참 선교사를 교육할 때 “한국은 권력구조다 상석 하석 이런 자리를 잘 구별해야 제대로 인간대우를 받는다. 한국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도 방에 일등석,이등석,삼등석이 있다” 이런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신참 선교사가 “그러면 한국에는 방에 들어가면 일등석,이등석,삼등석 그런 구별이 표시되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표시는 없다. 그건 눈치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방에 들어가면 상석과 하석이 있는데 일단 상석을 양보하고 먼저 하석을 차지했다가 잠이 앉으라고 하면 상석을 차지하는 식으로 자리 하나를 둘러싸고 한국 사람처럼 ‘서로 앉으십시오“하고 싸우는 문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리싸움은 교회 속에서도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목사의 자리,장로의 자리는 계급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섬김의 자리입니다. 많은 자리가 있지만 대그룹을 이끌고 섬기는 자리 장로와 목사의 자리는 얼마나 큰 책임과 섬김의 자리입니까? 많은 희생과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이기에 할 수만 있는대로 피하고 싶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불러서 맡긴 자리이기에 순종하면서 섬기는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세상 속에 영향을 주고 많은 교회에 좋은 본을 보이기 위해서 먼저 섬김의 공동체로서 섬김의 정신과 본을 우리 함께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고난의 섬김이 있어야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8절, 권력을 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먼저 고난을 말씀합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합니다. 권력의 영광을 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먼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 주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바로 십자가에서 받으실 고난의 잔과 고난의 세례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섬길때 사람들에게 칭찬과 환호와 인정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의 섬김을 통해서 결국에 어떤 결과를 맺었습니까?

빌립보서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되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서 모든 만물들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하시고 모든 만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주님깨서는 먼저 높아지고 으뜸이 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내가 받는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고난 뒤에 영광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먼저 섬기라고 하십니다. 먼저 섬길때 섬김을 받는 열매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 뒤에 영광이 주어지는 것은 세상이치입니다.학생이 공부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공부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 잘 압니다. 남들 놀때 놀지 않고 잠잘 때 자지 않고 공부를 위해서 고난받아야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 살빼기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뻐지고 좋은 몸매를 가꾸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또 살이 잘 찌는 사람들을 보면 남보다 더 왕성한 식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고 절제해야 합니다.그래야 아름다운 몸매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들 놀고 잘 때 열심히 일어나 운동하면서 자기를 가꾸고 힘써야 몸매유지하고 살을 좋은 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살을 빼고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는 일에 성공하는 사람들 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만사가 고난없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속에서 많은 섬김의 일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연말이면 교회 속에서 어떤 섬김을 감당할지 지원서를 받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사역 중에는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 어린이와 청소년 새신자를 가르치는 사역 식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 또 외부적으로 차량으로 봉사하는 사역 주차와 같은 안내를 하는 사역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역들이 고난없이는 어렵습니다. 그 사역섬김의 지원서를 받아보면 항상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개 보면 조금이라도 부담이 되지 않는 곳으로 쏠리게 됩니다. 한번은 사역자 중에 어떤 집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주차관리와 같은 사역은 한직이기에 사람들이 별로로 여기고 그 봉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같이 말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교회 많은 사역 중에서 새신자나 성도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봉사사역이 바로 교회차량과 주차와 안내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 오신 새가족들에게 그런 질문들 가끔 드린 적 있습니다. ‘저희 교회 오셔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차량안내 하시는 분들과 안내하시는 분들이 너무 친절하여서 좋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다른 사역 중에서 특별히 교회 차량 봉사라든지 주차안내는 잘 해놓고도 한번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고 욕을 얻어 먹기 십상입니다. 조금만 시간이 늦거나 하면 얼마나 또 무안하고 미안합니까? 또 겨울철이나 여름철에 바깥에서 주차안내하는 분들은 얼마나 덥고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힘들어 그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진짜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봉사라면 열심히 봉사하고 욕먹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려고 온갖 고난을 당하셨지만 얼마나 많은 욕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그 모든 고난이 헛되지 않게 영광으로 열매를 맺으셧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세워가기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 건강한 교회는 하루아침에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지도자와 모든 평신도가 동역자가 되어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말고 주와 함께 고난받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난 한사람부터 먼저 주와 함께 고난에 참여할 때 주와 함께 오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교회를 위해서 감당해야 할 고난은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무엇이든지 열심히 “참여”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먼저 대그룹의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십시오. 그 참여가 이미 주님을 섬기는 것이요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 예배드리면 그 참여가 벌써 주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를 섬기는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목장교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목장교회를 위한 고난의 섬김의 시작은 바로 참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어서 몸을 드려서 참여하는 것이 이미 큰 섬김입니다. 내가 참여하면서 목장교회가 활성화되고 내가 참여하면서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었자면 얼마나 나는 엄청난 섬김을 행한 것입니까? 물론 그 참여를 위해서 시간도 몸도 물질도 함께 포기가 되고 헌신이 되겠지요. 그러나 참여하면서 우리는 값으로 지불하지 못할 엄청난 유익과 영광을 이미 얻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이런 고난의 섬김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가장 극복해야 할 과제가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여러분 이기심이란 섬김을 방해하는 못된 최대의 적입니다. 이기심이란 공동체를 생각하기 이전에 나를 먼저 생각하고 이기심이란 고난의 섬김보다 먼저 이익의 영광을 계산하는 못된 죄성입니다. 그래서 이기심의 사람들은 먼저 고난받기보다 먼저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안되는가 손익을 계산합니다.그래서 이익이 되지 않는 자리는 고난받지 않습니다. 유익이 없는 자리는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은 남에게 내가 조금만 무시당하고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섬기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내것을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결국은 참된 섬김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의 종입니다.주님의 종은 주님의 뜻대로 섬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돈도 우리의 생명도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의 뜻대로 나를 드리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네비게이토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론새니라는 분이 한 젊은이에게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는 종에 대한 훈련을 받고 난 뒤에 지도자인 론 새니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이제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론새니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몰라. 자네가 사람들에게 종 취급을 당할 때 그때 자네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지.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종 취급할대 ‘네가 나를 무시해?’하고 화를 내면 자네는 아직 종이 되지 못한 거야. 남들이 나를 종취급하고 부릴때 내 자존심이 꺽이고 내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때 ‘그래 맞아 나는 종노릇하는 사람이야 주님의 종이야 나를 밟아라. 기꺼이 당하겠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자네는 진정한 종이야‘라고 하더랍니다. 고난받는 종으로 주와 같이 섬길때 주와 같이 영광의 복을 우리가 다 함께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42-43
주님은 세속적 리더쉽과 주님 나라의 리더쉽이 달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여기 세속의 권력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42절에 보면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라고 합니다. 여기 주관하다는 말은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마구 내리 누르고”라고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남을 내리 누르고 자신을 높이려는 리더쉽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짓밟고 내가 올라서고 내가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리더쉽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고 남을 위하여 섬기고 그들을 높이는 리더쉽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 속에서도 이런 세상적인 나의 야망을 갖고 잘못 섬길때 그 섬김의 자리에서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먼저 말 그대로 섬김이란 남을 높이고 주님을 높이는 자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잘못된 동기인 나를 높이고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로 섬기게 될 때 만약 그것이 안채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그 자리에서 책임을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난과 분노와 원망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한 리더쉽이었습니다.
여러분 겸손한 섬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섬기는데 나는 없습니다. 나는 열심히 수고하는데 내가 없습니다. 이런 겸손한 사람의 사역과 섬김이 있는 곳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이런 겸손한 사람의 섬김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만한 사람이 섬김이 있는 곳에는 부서가 소란스럽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프고 오히려 분쟁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드러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하고 내가 인정받으려고 할때 결국 거기에는 주님이 높아지지 못하고 주님이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난 뒤에 남을 누르고 교만한 모습이 되는 것일까요? 바로 사명과 목적을 바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소유하고있는 그 자리가 어떤자리인가? 그 자리에 대한 명확한 사명의식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정약용을 좋아합니다. 그는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무려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쓴 많은 책 중에서 ‘목민심서’가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 책에서는 관리가 부임하여 마치기까지 어떻게 처신해야하고 어떻게 백성을 섬겨야 하는지 자세하게 그 섬김의 도를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그 책을 쓴 이유는 당시에 부패한 관리들이 그 자리의 권세를 오용하여 백성들을 오히려 괴롭히고 부정부패를 통하여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들리는 뉴스를 보십시오. 섬기라고 세워놓은 공무원 정치인들이 그 자리에서 오히려 교만하여서 큰소리치고 각종 비리와 부정으로 부를 축적하다가 발각됩니다. 어쩌면 여러분 이런 일이 드러난 경우보다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회 속의 경우도 좀 덜하기도 하지만 여지없이 문제가 일어납니다. 초신자일때에는 얼마나 겸손합니까?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잘 섬기고 순전합니까? 그런데 점점 직분이 더할수록 경험이 더할수록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하여서 섬김의 모습은 간데 없는 모습은 혹시 나에게 없습니까? 주어진 권위로 섬기기보다는 먼저 주장하려고 하고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사명감을 갖고 섬기셨습니다. 45절에 “인자의 온곳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과 목적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세상의 섬김과 다른 섬김으로 섬김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각양의 은헤와 은사대로 섬김의 기회와 특권과 복을 주셧습니다. 그 기회와 자리를 통해 더욱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섬김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섬김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백성인것을 알고 끝까지 항상 섬기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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