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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에게 나아온 자들 (대상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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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흔히 말하는 '철새의 대이동'이란 현상이 벌어집니다.
  야당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대거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것입니다.
  뭐 본인이야 '양심의 결정'이니 '민족과 국가를 위한 고뇌에 찬 결단'이니 하고 온갖 미사여구로 변명하겠지만, 정말 한 마디로 말해서 '줏대 없는 정치인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구차한 변명들 보다는 어떤 국회의원이 그랬듯이 "나는 원래가 야당 체질이 못되어서"라는 변명이 차라리 솔직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렇듯 당적 변경이 잦다 보니, 어떤 국회의원은 자기 이력서를 쓰면서 "내가 옛날에 또 무슨 당에 있었더라?"하고 알쏭달쏭해 하고 있는 모습이 만평 같은데 흔히 등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이 당을 바꾸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본적인 줏대나 바른 소신은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에게 돌아온 자" 혹은 "다윗에게 나아온 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직도 사울 왕의 치하에 있을 때에 다윗 쪽으로 귀순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어떤 정치적 이득이나 얄팍한 계산을 따라 취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대의 조류를 깨닫고, 깨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마땅히 내려야 할 결단을 따라 다윗에게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윗에게로 돌아온 자,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새 이스라엘을 건국했던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 나가는 신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본문 말씀을 셋으로 나누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중심으로 모이는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정통성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나아왔던 사람들이 바로 혈통보다도 정통성을 더 존중하고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절로 7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돕는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2저희는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3그 두목은 아히에셀이요 다음은 요아스니 기브아 사람 스마아의 두 아들이요 또 아스마웻의 아들 여시엘과 벨렛과 또 브라가와 아나돗 사람 예후와 4기브온 사람 곧 삼십인 중에 용사요 삼십인의 두목 된 이스마야며 또 예레미야와 야하시엘과 요하난과 그데라 사람 요사밧과 5엘루새와 여리못과 브아랴와 스마랴와 하룹 사람 스바댜와 6고라 사람들 엘가나와 잇시야와 아사렐과 요에셀과 야소브암이며 7그돌 사람 여로함의 아들 요엘라와 스바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보면 다윗이 피신생활 시작할 무렵부터 자진해서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활을 잘 쏠 뿐만 아니라, 양손으로 물매돌을 던질 줄 아는 자들, 즉 야구의 스위치히터처럼, 오른손과 왼손 어느 쪽으로든지 물매를 던질 수 있는 숙달된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용사들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29절에도 보면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좇으나 그 중에서 나아온 자가 삼천명이요"라고 했습니다. 즉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아무래도 대다수가 다 같은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서도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이 벌써부터 많이 생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쉬 짐작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중에서, 바로 베냐민 지파야말로 다윗에게로 귀순할만한 이유가 가장 없는 지파였습니다.
  바로 같은 지파 사람으로서 사돈팔촌만 따지면 다 연줄이 이어질 사울이 지금 엄연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해 있는 형편인데 무엇이 아쉽다고 다른 지파 출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발 벗고 나서서 도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 중에는 사울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다윗에 대하여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삼하 16:5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 중에서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처럼 다윗에게로 일찍부터 돌아온 것은, 그들이 혈통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정통 왕가를 더욱 존중했음을 보여줍니다.
  자기네들에게 당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육신적 연줄을 좇아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어 주신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정통 왕조가 이어질 것을 이들은 놓치지 않고 주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초창기에 자기에게 나아온 자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로 사울의 동족 지파 출신의 사람들이 도피 중에 있는 자기를 찾아와주는 모습을 보고 다윗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더욱 확신하고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통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떤 교회를 중심으로 모일 때, 정말 깨어 있는 신자들이라면 결코 간과하지 않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입니다.
  '무슨 통' 하는 말들이 이 세상의 정치 집단에서 워낙 자주 쓰이다 보니까 우리 귀에도 거슬릴 수 있고, 또 교회를 두고 이런 용어를 쓰면 무슨 교파주의자처럼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정통을 따라 함께 뭉치는 것까지 정치적인 이합집산처럼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정통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할 때, 저는 그것을 개혁주의 신앙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교회만 최고다.'라는 유치한 구호도 아니고, '우리 교단이 순교자를 내었다.'라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자랑도 아니라,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발견하고 정립해낸 그 신앙을 따라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생각하면 할수록 귀중한 신앙인 동시에 정확한 신앙인 것은 이 개혁주의야말로 각 개인 신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연결시켜주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 개혁주의가 나오기 전까지, 중세 사회가 무려 천년 동안을 영적 암흑기로 지냈다는 사실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숱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마리아를 의지하며 성자들에게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천주교의 이단교리 때문에 신자라는 사람들까지도 마땅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대신에 교황을 떠받들고 살았습니다.
  셀 수도 없는 숱한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완전히 엉터리 왕, 가짜 왕을 섬기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루터와 칼빈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립한 멋진 신앙 슬로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 아닌 다른 중보자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모든 영광을 다 가로채고 있던 사제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바로 그 종교개혁자들이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그런 개혁주의 교회를 중심으로 참된 신자들이 뭉치게 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선지와 사도들이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온갖 종류의 이단 교파들과 변칙적인 신앙생활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개혁주의 교회 하나 바로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귀중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바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면, 하나님의 택자는 반드시 세상을 떠나 이 그리스도 왕국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경향교회가 바로 이처럼 정통신앙을 따르는 개혁주의 교회의 하나로 세워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고, 이 교회를 통하여 이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고 모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바치는 자입니다.

  다윗에게 나아온 자들은 다윗이 잘 되어 나가고 누가 보아도 그쪽에 붙는 것이 유리하다 싶을 때 모인 자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문 8절로 15절 말씀에 "8갓 사람 중에서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9그 두목은 에셀이요 둘째는 오바댜요 세째는 엘리압이요 10네째는 미스만나요 다섯째는 예레미야요 11여섯째는 앗대요 일곱째는 엘리엘이요 12여덟째는 요하난이요 아홉째는 엘사밧이요 13열째는 예레미야요 열 한째는 막반내라 14이 갓 자손이 군대 장관이 되어 그 작은 자는 일백인을 관할하고 그 큰 자는 일천인을 관할하더니 15정월에 요단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자로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갓" 지파 사람들 중에서도 방패와 창을 능수능란하게 쓰고 사자와 같은 용맹, 사슴과 같은 기동력을 가진 용사들이 다윗에게 많이 돌아왔습니다.
  특히 그들이 다윗에게 귀순한 때를 두고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라고 했는데, 이것은 '황무지에 있는 요새'라는 뜻입니다.
  즉 다윗이 유다 부근의 황무지를 피신처로 삼아 방랑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앞서 1절에서도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숨어 있을 때"라고 밝힌 대로입니다.

  즉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는 다윗을 왕으로 봉하자는 다수 여론이 조성된다든지 슬슬 본격적으로 즉위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는, 아까 처음에 언급했던 '정치적 철새'들이 이동할만한 그런 시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커녕 어떤 현실적인 가망성의 낌새조차 아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 받았다는 그것 하나뿐, 그 외에는 남는 것 가진 것 아무 것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니 하루하루를 광야를 방랑하며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이 굴에서 저 굴로 피신하며 사는 신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갓 지파의 용사들은 바로 그런 때에 다윗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19절 이하 22절에 보면 "므낫세 지파" 사람들 중에도 역시 다윗이 매우 약할 때 그를 찾아와 준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얼마나 사기가 떨어져 있었는가 하면, 다윗이 제 발로 블레셋 사람에게로 찾아가서 그 밑에서 부하 노릇하면서 어떻게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블레셋 왕 아기스의 명령 때문에 "사울을 치려 하는" 전쟁, 즉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전쟁에까지 어쩔 수 없기 끌려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진퇴양난에 빠진 다윗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에 "저가 그 주 사울에게로 돌아가리니 우리 머리가 위태할까 하노라"는 의심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즉 다윗이 전투 도중에 블레셋을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도록 만들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 전선에서 후방으로 쫓겨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다윗이 떨어져도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천부장" 출신의 쟁쟁한 인물들을 일곱 명이나 보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나아온 자들은 다윗의 세력이 아직 약할 때 왔으니 만큼 더욱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갓 지파 용사들이 다윗의 휘하에 와서 세운 무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전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요단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 즉 수위가 가장 높아서 도하가 어려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행하여 건너편 "골짜기에 있던 모든 자"들을 공격하여 격퇴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할 때에는 온 열 두 지파에서 앞을 다투어 그의 신하와 부하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아직 다윗의 세력이 형편없이 미약할 때 찾아와서 충성한 자들이야말로 다윗에게 얼마나 큰 힘과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다윗에게 무엇을 바라고 찾아온 자들이 아니라, 사울 대신에 다윗을 장래 이스라엘 왕으로 모시게 된 것 자체를 감사하고 그 다윗을 일찍부터 섬기게 된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며 문자 그대로 자기 몸을 바쳤던 것입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고 일정한 궤도에 오르게 되면 교인은 거의 자동적이라 할 만큼 절로 불어나게 됩니다.
  자체 예배당 건물을 멋있게 잘 지어 놓고 더 이상 어려운 건축헌금 낼 일도 없고, 교회 경상비 때문에 제직으로 섬기는 것이 부담스러울 일이 없는 교회는, 너도나도 모여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용사는, 진짜 일군은, 아직 교회가 약할 때 찾아오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경향교회는 바로 그런 충성된 용사들의 피땀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경향교회는 을지로에서 시작하여 동자동으로, 거기서 또 여의도로 여기저기로 피곤한 이사를 다녔었습니다.
  자체 예배당도 없으면서 신학교 후원이니 선교회니 해서 헌금할 일만 가득했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모여든 성도들이 '생애 최고의 헌금'을 드리고 끝까지 충성한 결과 오늘의 강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며, 그때의 용사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교회의 가장 큰 기둥들이 되어서 이제는 '생애 전부의 것'을 바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향교회는 교회가 자기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교인들을 모으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 것만을 최고의 은혜요 축복인 줄로 알고 이제부터는 그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바쳐드리는' 일군들을 부르고 키우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경향교회는 이 강서 시대 이후에도 결코 '놀고먹는 교회'로 바뀌지 아니하고 오직 '일할 것이 많은 교회'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일할 것이 없어 보이는 교회만 찾아다니는 교인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왕국'이 아니라 아직도 '사울 왕국'에 속한 자들이며, 얻어먹기만을 찾는 교인은 오로지 '영적 구걸인'일 뿐이지 결코 '신앙의 용사'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경향을 통하여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이라는 이 멋진 구호 아래에서 함께 충성하고 함께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으로 뭉쳐진 자들입니다.

  어쨌든 여러 지파에서 여러 경우에 다윗에게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모든 이해관계와 배경 차이를 떠나서 하나로 뭉쳐지게 된 것은 오직 성령의 감화감동하심 이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6절로 18절에 기록하기를 "16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 17다윗이 나가서 맞아 저희에게 일러 가로되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와 연합하려니와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붙이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매 18때에 성신이 삼십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가로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리니 원컨대 평강하소서 당신도 평강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강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드디어 접대하여 세워 군대 장관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또 일단의 무리가 다윗에게로 나아왔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아마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그 귀순하러 온 무리들에 대하여 다윗이 무언가 확신이 서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베냐민 출신들 중에서는 여전히 자기를 속여 사울에게 넘겨주려는 자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유다 출신은 대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다윗과 같은 지파라는 그 정분만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을 맞이하면서 "너희들의 참된 의도를 오직 하나님께서 다 감찰하고 계시니 너희들이 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나와 연합하고자 하면 내가 맞이하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사람의 복잡한 이해관계나 속에 감추어 놓은 복선을 다 버리고, 피차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터놓고 시작하자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의 말을 듣고 그 무리의 대표자 격이었던 아마새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직역하자면 '성령이 아마새에게 옷 입혔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성령께서 그를 옷 입히듯이 완전히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고 계시니 우리 사이에 피차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전적으로 다윗의 편이 되어주고 계시는 것을 자기네들이 알고 있으니,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는 결코 다윗을 속이거나 배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서약한 것입니다.

  다윗 역시 그 말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그를 "접대하여" 영접하고 즉시 "군대 장관"에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피차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출신 배경이나 이해관계 등을 따진다면 한 팀이 되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지만,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가운데 서로의 진실이 나누어지고 그로 인하여 당장 십년지기와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38절에도 보면 이들은 다 "성심으로" 또한 "일심으로" 다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하나로 똘똘 뭉쳐졌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성령의 매는 줄'에 모든 성도들이 묶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각자 성격이 다르고 지식과 능력에 차이가 있고 사는 수준도 달랐던 사람들이었지만 오직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고, 오직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복음 전도의 사명에 힘을 합하여 충성하게 하시는, 이 '성령의 공감대' 안에서 그 다양한 인간들이 '한 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줄이 아닌, 다른 줄 때문에 모이게 된 교회는 제 아무리 '한마음교회'니 '형제교회'니 하고 이름 붙여놓아도 쉽사리 갈라지고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 체면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마음으로, 다른 교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인 교회 안에는 절대로 '참된 평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도 같은 학벌 가진 사람들끼리만 마음이 통하고 동향인들끼리만 함께 몰려다니는 편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있는 교회는 일단 도화선이 될 만한 큰 시험 하나만 발생하면 폭탄처럼 터지고 갈가리 찢겨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를 하나로 묶는 줄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교클럽이나 동호단체 따위를 묶는 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직원 사이에서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우월감이나 열등의식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얼마나 피곤합니까?
  같은 당원이면서도 언제 자기를 배신할지, 자기를 버릴지 모르는 불안과 불신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경쟁과 질투와 권모술수가 서로 오가는 가운데서 겉으로는 동지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일이겠습니까?
  교회가 만약 그런 단체라면 정말 안 세우는 것이 훨씬 낫고 차라리 안 모이는 것이 백번 더 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성령께서 평강으로 지켜주시고 각 성도들을 피차 신의로써 교제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경향교회에 우리가 모이게 된 것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예수 십자가로 감동시켜주신 때문인 것을 기억하면서, 바로 그 성령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가 되고 그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서로의 예배드리는 심령을 합하고 그 성령의 충만하심을 따라서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사명에 손발을 함께 맞추어 나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다윗에게로 모여든 자들은 이처럼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을 따라 모인 자들이었고, 아직 약할 때 자기 힘을 바친 자들이었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뭉쳐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꼭 같이 '영적 시세를 알고'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아는' 마음과 자세로 이 교회에 함께 모이고 함께 세워가야만 합니다.

  윈스턴 처칠도 역시 국회의원 시절에 당을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임기가 바뀌어 그가 또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유세에 나서게 되었는데, 유세장에서 어느 청중 한 사람이 "당적을 바꾼 이유를 밝혀라."하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처칠은 "저번에 있던 당에서 워낙 바보짓을 많이 해서 이제 바보짓 그만 하려고 당을 바꾸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함으로써, 또 한 번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제 바보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인의 회중'에서 행하던 바보짓, 불신앙의 짓들을 당장 그만 두고 이제는 예수당에 입당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을 바꾸어주고, 자신의 생각과 삶 전체를 완전히 변화시켜주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지금부터라도 새 삶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 지상왕국인 교회에 반드시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신자는 바른 교회이기만 하면 그 교회에 일거리가 많다 해도 오히려 더 힘을 바칠 수 있는 기회인 줄 알고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참된 성도들은 오직 성령에 이끌리어 교회 안에서 진정 하나가 되어 함께 예배하며 충성하며 교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차 망하고야말 '사울 왕가를 떠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온 자'들, 장망성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의 적(籍)을 빼내어서 저 천상교회의 본적에 올려놓는 자들이 됨으로써, 바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참된 정통신앙을 따르고 출석교인에서 용사신자로 성장하며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평강을 충만히 누리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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