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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과 금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 (행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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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두 사도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제 9시는 요즘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후 3시에 해당합니다. 두 사도가 미문이라는 성전 문을 들어가려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걸인이 문 곁에 앉았다가 손을 내밀어 구걸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 사람을 주목하고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엇을 얻을까 기대감을 갖고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걸인에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런 다음, 그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벌떡 일어나 두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이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앉은뱅이인 줄 알고는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때 고침 받은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바로 이 분들이 나를 고쳐주셨어요!” 이에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모인 무리 앞에 나서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깁니까?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주님을 부인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지금 여러분이 잘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날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 수가 남자만 약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하여 ‘은과 금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은과 금’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은 불행하게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이 늘 앉아서만 지냈습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그를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면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가 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인 만큼 자선에 인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해 보여도 그 사람은 매일 같이 짭짤한 수입을 얻었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쓰면,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은 ‘은과 금’이었고 그는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어쩌면 그렇게 모은 돈으로 예루살렘 근처에 집을 사 두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 사람은 매일 같이 자기를 메어 성전 미문까지 데려다 줄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은과 금’을 가지고 앉은뱅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차적으로 ‘은과 금’은 돈을 의미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은으로 만든 세겔을 화폐로 사용했으나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당시 로마 세계에서 통용되던 헬라 화폐인 달란트, 므나, 스타테르, 드라크마, 렙돈과,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드란트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 중에서 앗사리온과 고드란트와 렙돈은 동전이었고, 나머지 화폐는 은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은 재산가치가 가장 높은 귀금속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금속 화폐가 남아 있긴 하지만, 주로 종이로 만든 화폐를 사용하고, 수표나 신용카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슨 종류의 돈이든 ‘은과 금’에 해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은과 금’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은과 금’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쩔쩔 맵니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대접 받는 것이 아니고 돈이 대접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돈을 벌 수 있다면 사기도 치고 탈세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돈이 만능일까요?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전 미문 곁의 앉은뱅이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걷게 만드는 데 있어서 ‘은과 금’은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은과 금’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고 말씀합니다.

억만 금을 낼지라도 지옥 갈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보석 제도가 있어서 비록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더라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는 보석 제도가 없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살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사마리아로 가서 갓 믿은 사마리아 신자들을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저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마술사 시몬이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도 그 같은 능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를 찾아가서 돈을 내밀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에게 이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20-21)

성령의 은사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은과 금’은 언젠가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연단 받은 믿음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돈으로 죽을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만일 돈으로 죽을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갑부들은 백년이고 이백년이고 계속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죽음을 면한 부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시간에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한편, ‘은과 금’은 인간의 지혜와 수단, 방법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념도 ‘은과 금’에 해당합니다. 공산주의는 이 땅에서 불평등을 없애고 만민이 동등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차별과 계급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했지만, 레닌이나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과 같은 당 지도자들을 신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공산주의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와 같습니다. 공산주의는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지금은 실패한 정치 운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저들이 유물론을 신봉하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인류를 구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보다는 낫지만, 자본주의 역시 ‘은과 금’을 의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이 자본주의의 신입니다. 소위 황금만능주의 또는 배금주의(拜金主義)가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은과 금’ 때문에 파국을 향하여 내닫고 있습니다. ‘은과 금’으로 전쟁과 테러를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은과 금’이 전쟁과 테러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도덕적인 타락을 수반합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을 인격체로 보기보다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과학기술 역시 ‘은과 금’에 해당합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을 신뢰합니다. 지금 인류가 안고 있는 공해문제와 식량문제 등을 과학이 해결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유전자를 다루는 기술이 더 발달하면 인류는 노화와 질병, 심지어는 죽음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과연, 과학은 만능일까요? 인류가 과학기술의 혜택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에도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의술이 발달한다고 해서 인간의 수명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암 전문의도 암에 걸려서 죽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철학은 어떨까요?

철학은 우리에게 인생과 사물을 깊이 통찰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철학은 우리를 무한한 지혜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일깨워 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냈다고 발표한 철학자는 지금껏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는 어떨까요? 모든 종교는 각기 나름대로 우주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하게 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고 고상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말해 줍니다. 마호메트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종교들 역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은과 금’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도덕적으로는 유익한 가르침을 주지만, 모든 사람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속수무책입니다. 욕심을 버린다고 지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의범절을 지킨다고 그 사람의 본성이 선하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16장 25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듯이, 세상의 종교들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이요, 또 다른 ‘은과 금’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은과 금’에 속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은과 금’의 한계를 알고 나사렛 예수께로 나아감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권세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했을 때, ‘은과 금’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의 수중에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주머니가 비면 자신감을 잃고 비굴해 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은과 금’이 없었으나 위축되지 않고 걸인을 주목하고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두 사도는 ‘은과 금’으로 견줄 수 없는 위대한 그 무엇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백성들이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였을 때,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이 성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죄 사함을 받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단과 귀신들은 영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들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기도하는 것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그의 일행을 좇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며 여러 날 훼방을 놓았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였더니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마귀에게 얽매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줌으로써 저들을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특권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는 권세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을 버리고 오직 신본주의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은과 금’을 의지해서 살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오늘날과 같이 경제위주의 세상에서 돈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예수님께서는 매우 주리셨습니다.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 때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은 신명기 8장 3절 말씀인데, 모세가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한 설교 가운데 나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광야는 지금 팔레스틴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시나이 반도를 말하는데,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마실 물을 구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낮에는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가 괴롭힙니다. 소수의 베드윈 족이 양이나 염소를 키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200만이 넘는 사람이 머물러 살 수는 없는 곳입니다. 그것도 한 두 달도 아니고 무려 40년 동안이나 생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으나 한 사람도 굶어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으며, 그 많은 백성과 가축 떼가 목말라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 40년을 떡이 없이 만나만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과 금’이 없이도 살았습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백성 중에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광야 길을 행진하다보면 물이 떨어져서 갈증을 겪을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모세에게 가서 목이 마르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마실 물을 달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원망부터 했습니다. 모세에게 몰려와서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대들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또 모세에게 와서 ”당신이 하나님께 구해서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될 것인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지 않고 원망, 불평부터 늘어놓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은과 금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은과 금’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수록 더욱 주님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절망적으로 보일 때일수록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면한 문제를 전화위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믿어야 합니다. ‘은과 금’도 의지하고 동시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편을 택하면 자연히 다른 한편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두 사도가 미문 곁의 앉은뱅이 걸인을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듯이,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들도 동일한 주의 이름의 권세를 힘입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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