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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주일] 주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 (눅 19: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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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 (눅19:37-46)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초기에 있었던 일 세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 마을에서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외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니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그렇게 외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 부르는 것은 유대교의 신앙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잘못된 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이 로마황제가 세운 헤롯왕이 아닌 스스로의 왕을 세우고 찬양하다가는 로마군대의 가차 없는 탄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요12:12-13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막11:9-10에 따르면 예수님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고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말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란과 독립을 선동하는 구호로 들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에 따를지 모르는 로마 총독의 보복조치를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고 참 평화의 주시라는 것과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이루실 구원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는 일은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만천하에 알려질 그 일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침묵한다고 해서 감추어질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온 나라와 백성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영접하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두 번째 일은 예수님께서 곧 들어가실 예루살렘 성을 눈앞에 내려다보시며 애통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을 보시고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탄식하시며 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탄식 속에는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파괴와 그에 따르는 비극에 대한 생생한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그런데도 그 가까운 장래에 닥칠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또한 이 탄식 속에 서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본문 38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며 외친 일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평화의 주로 오신 이이심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지며 우리 인간들 사이의 평화가 또한 이루어지는 진리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평화를 이루시는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에게도 평화가 이루어지며 하늘 아래 있는 온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짐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것을 바로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평화 대신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파괴를 초래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신 것입니다.

  본문이 전하는 세 번째 일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를 위하여 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제물을 사기 위해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환전상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들은 정상적인 가격보다 비싸게 팔곤 했습니다. 거의 날강도같이 폭리를 취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마치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기 위하여 있어야 할 성전이 더러운 재물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장터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기도소리보다는 짐승들 우는 소리와 장사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막11:15-16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셨는지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성전의 참 주인이심을 만인 앞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참된 신앙을 회복시켜주시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참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메시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와 함께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이루실 참 메시야로서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위풍당당한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참 평화에 관한 일을 바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깨끗한 성전에서 바른 기도와 신앙이 자리 잡은 도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탐욕스런 장사꾼들로 말미암아 어지럽혀진 하나님의 집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이 바른 신앙을 되찾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바라심에 대해 예루살렘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며 가르치신 모든 진리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온갖 놀라운 이적기사들을 잊어버리고 그를 잡아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넘기고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려고 하신 참 평화의 복음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파괴와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가졌었지만 그 하나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의 지나간 옛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깊은 영적,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시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지셨던 그 바람을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갖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울은 지금 이 지구상의 새 예루살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서울에 다 모여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 민족을 21세기의 제사장나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나라의 경제력과 국민의 수를 고려할 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의 기독교선교국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대의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는 한국교회가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 권력의 손에 넘기며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진정한 왕이시고 참되고 유일한 평화의 길임을 잊어버리고 딴 길을 가려하고 있지 않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려다보시며 탄식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한국교회는 아닌지 냉엄하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는 내년이면 창립 120주년을 맞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 역사성 때문에 싫든 좋든 한국교회를 대표하며 상징하도록 요청을 받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모든 것을 이 교회에게는 더욱 간절히 바라실지 모릅니다. 지난 119년 동안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행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시고 참 평화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영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압박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를 증언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참된 승리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외쳐야 할 말들을 돌들이 외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의한, 그를 위한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소리보다 온갖 이익을 탐하는 자들의 소리가 더 큰 교회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살아 숨 쉬는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며 친히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창립 119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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