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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박넝쿨보다 못한 영혼?(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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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립니다. 조종사가 당황한 음성으로 기내 방송을 합니다. “승객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위기 상황입니다. 무게를 줄여야 됩니다. 3명만 뛰어내리면 다른 승객들이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용감한 분들의 결단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세 사람이 나섰습니다. 첫번째로 프랑스인이 이렇게 외치며 뛰어내립니다. “죽음은 예술이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 만세!” 두번째로 미국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치며 뛰어내립니다. “세계 최강국 아메리카 만세!” 세 번째로 한국인이 일어나더니 “대한민국 만세!”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옆에 있던 일본인을 비행기 밖으로 밀쳐버렸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때때로 멀게 느껴지는 나라입니다. 식민 통치를 통해 고통을 주고도 이따금 망언을 해서 속을 뒤집어 놓고, 게다가 우리보다 더 잘 살고 ... 외국 여행을 하다가 때때로 “너 일본인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참 묘하죠.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야 되지만, 기분이 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나서를 보면 이와 비슷한 나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는 B.C. 8세기에  활동했던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에게 마치 한국에게 일본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앗수르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 없었고,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티그리스 강 동편, 현재의 이라크)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거기 가서 선교하라는 겁니다. 요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합니다.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현재의 스페인 지브로울터 부근)로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회개하고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40일 후 심판할 것이라고, 멸망할 것이라고! 놀랍게도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심판 계획을 철회합니다. 이것이 요나서 1장~3장까지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본문 4장을 보면 그 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가 뭐 하고 있습니까? 심통을 부립니다. 원수 나라 백성이 망하면 좋겠는데,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니 기분이 나쁜 겁니다. 그래서 심통을 부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에게 박 넝쿨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이 좋다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품는 것입니다. 자식이 철이 들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이 과연 무얼까요? 한 마디로 ‘선교’입니다. 오늘 제15회 선교축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축복하시는 집회입니다. 이 시간 말씀과 선교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시고, 함께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요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니느웨 성은 "피 성"(나훔3:1 City of Blood)이란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로 그 백성이 아주 잔인했습니다. 고대 유적지의 기록을 보면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피정복지의 백성들을 잡아다 강제로 입을 벌리고 혀를 뽑았다고 합니다. 또 땅에 네 개의 말뚝을 박아 놓고는 사지를 묶은 채 칼로 살점을 뜯어냈다고 합니다.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포악한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백성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망하지 않도록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요나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편에서 봐도 요나의 불순종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켜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하시고 물고기 뱃속에 3일을 가두어 두셔서 다시 회개하고 니느웨에 갔던 겁니다.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왕으로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다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을 철회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요나는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분풀이를 하고 심통을 냈던 것입니다. 1절~3절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건데 뭐하려고 다시 붙잡아 니느웨로 오게 해서 이런 꼴을 보게 하느냐 이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존파를 기억하시죠? 무고한 시민들을 붙잡아다 자기들의 아지트 지하에서 불에
태워 살해한 잔인한 살인범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예수 믿고 찬송 부르며 사형 당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모 교회 집사님들인데 담임목사님께 맨 처음 전도 계획을 알리며 기도 부탁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고백한 내용인데,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유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주변에 가족이나 이웃들 중에도 전도할 사람이 많은데 무슨 그런 잔인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가 싶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마음을 돌리고 지존파 전도에 지원을 해줬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고백에 우리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그런 잔인한 자들도 역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일본도 마찬가지 복음을 전하는 게 선뜻 내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실제로 많은 선교사님들이 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들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신문 방송에 보면 폭탄 테러, 자살 테러 등의 무정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세계를 어지럽히는 말썽꾸러기로 여겨집니다. 또 모습도 이상하잖아요. 특히 여성의 경우 히잡(얼굴에 쓰는 두건)이나 차도르(길게 내려 입는 검은 망토)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편견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은 과격한 교파에 속하는 5%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우리처럼 평범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잘못된 종교에 빠져 무지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일 뿐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대개 문화 차이 때문이라는 겁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입는 한복을 보고 외국인들이 아름답게 느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지만,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너무 몰랐습니다. 그게 요나의 실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아닙니다. 이미 크리스천 된 우리들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요나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라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그에게 시청각교육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6절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십니까? 박넝쿨입니다. 박넝쿨이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자라서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그 지방은 뜨거운 사막 지대이므로 그늘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요나는 너무 기뻐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은 데 대해서는 화를 냈던 요나가 그늘 하나 때문에 그토록 기뻐했다는 사실이 웃깁니다. 7절 보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는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그 벌레가 박 넝쿨을 다 씹어 먹어서 결국 시들어 죽고 그늘도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왔습니다. 여기서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로 불어오는 ‘시로코’라 불리는 뜨거운 바람입니다. 얼마나 센지 모래를 날려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이쯤 되자 요나는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죽기를 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책망합니다. 9절. “ ...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얼마나 한심한지! 하나님이 그에게 직격탄을 날리듯 말씀하십니다. 10절~11절. 이 구절이 요나서의 결론이며 핵심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무슨 말씀입니까? 박넝쿨은 요나가 심지도 기르지도 않은 것인데, 없어졌다고 난리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구원하시는 게 뭐가 이상하냐 이겁니다. 말하자면 박넝쿨이 영혼보다 더 귀하냐  이겁니다. 더욱이 그 성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즉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니까 전 주민을 계산해보면 무려 60만 명인데 말입니다.

  비록 죄악이 가득한 자들이라도 할 수 있는 대로 회개케 해서 구원하시려는 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라 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입술로는 하나님을 자주 부르고 있지만, 정작 그 분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2] 우리가 품을 하나님의 마음 : 선교의 열정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 된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3:16 잘 아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족속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피 흘려 죽은 것은 ‘우리’만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되는데, 그것은 곧 세상 모든 사람들(우리의 원수들과 멀게 느껴지는 무슬림을 포함한)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사실은 우리 자신들도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 했을 겁니다.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의 마음은 품은 사람들이 120여년 전 이 땅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은 우리가 예뻐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잘 대해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885년 최초로 언도우드 선교사, 아펜셀러 부부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 중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총각으로 왔습니다. 몇 년 후 조선 땅에서 결혼했는데, 그 부인은 뒤에 처녀 선교사로 왔던 호르톤(Horton)입니다. 호르톤은 의료선교사였는데 병원으로 출퇴근하는 것조차 위험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양인들에게 대한 악성 루머가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은 아이들을 잡아다 살을 파먹는다고 하더라. 그리고 눈알을 빼서 안경알을 만든다고 하더라.” 어처구니없는 낭설이었습니다. 이런 루머 때문에 아이들은 도망가고, 어른들은 돌을 던지거나 심한 경우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녀 선교사인 호르톤을 언도우드 선교사가 매일 병원까지 조랑말로 출퇴근 시켜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둘이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우며 우리 한국을 위해 큰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선교’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만 사랑을 이야기한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복음전도, 선교인 입니다.

[3] 우리가 실천할 선교의 사명 : 가든지 노배든지!(Go or Send!)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당연히 선교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선교의 당위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세 가지 당위성, 세 가지 이유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① 선교는 빚진 자의 도리 :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자동으로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진 사랑의 빚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 빚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해줘야 듣죠. 우리나라에 왔던 수많은 선교사님들, 그리고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전도자에게 나는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는 빚을 갚는 게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이유가 바로 빚을 졌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그리고 전도자에게 빚을 졌지만 갚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교를 감당하므로 갚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뜻에서 헬라인과 야만인,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등 모든 인간에게 빚을 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선교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선교로 빚을 갚아야 합니다.

  ② 예수님의 지상명령(마28:19~20) :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씀이 무엇입니까? 선교 명령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명령이란 뜻에서 지상명령(至上命令 Great Commission)이라 부릅니다. 모든 교회들이, 모든 크리스천이 마땅히 감당할 과업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유언적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③ 최고 행복의 길 :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소유나 향락을 취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은 재산순일 겁니다. 세상의 지위 순, 향락에 젖은 순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잖아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얼마든지 불행한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그 종점은 허무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하는 가운데 아무리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하고 누려고 결국 헛되다는 겁니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랑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눔’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게 사랑이요 그럴 때 정말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나눌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흐뭇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초등 4년생 아이의 어머니가 아주 지혜로워서 방학 중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단기선교에 참여했습니다. 청년들과 어른들 틈에 껴서 원주민들에게 옷과 약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견학했습니다. 그 아이가 돌아온 후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교 여행이 좋았냐? 그럼 무엇이 가장 좋았냐?”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 볼펜을 벗어서 그곳의 아이에게 걸어줄 때 가장 행복했어요.” 그 아이는 비록 나이 어리지만 행복의 비밀을 깨달았던 겁니다.

  이처럼 선교는 당연한 크리스천의 의무요 특권이며 기쁨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선교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5만여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85%가 선교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1만 4천명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2위 선교대국으로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랑할 게 아닙니다. 모든 교회들과 모든 성도들이 선교에 동참해야 합니다. 거기에 못 미치는 만큼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든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교회는 ‘특등실에서 잠자는 요나’와 같다.” 또 로벗슨 맥퀼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을 크게 생략(Great Ommission)해 버렸다.”
  우리는 이 땅의 교회들이 깨어나도록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모두가 선교할 수 있도록!

자기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 많이 나오고 재미있게 지내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회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크리스천들이 모두 선교지로 가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가고, 어떤 사람은 보내는 역할을 감당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가든지 보내든지! 누구나 동참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내는 선교사’로서 기도하고, 물질을 선교헌금으로 드리고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선교 ... ? 나에게 얼마나 문제가 많은 줄 알아? 내가 얼마나 궁핍한 줄 알아?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해.” 그런데 이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 핑계인지 모릅니다. 사실은 없다고 못 하는 것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마음먹은 대로 행동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합니다. 우선순위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중병에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열일을 제치고 병원에 갑니다. 빚을 내서라도 병원에 갑니다. 당연하죠. 자식이 학교에 가야 되면 어떻게 해서든 보냅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하다가 생각하면,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중요성을 몰라서, 마음이 없어서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 일을 해주십니다. 여러분, 누가 이익이겠습니까? 내가 선교에 순종하면 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거칠 것이 없도록 승리를 주십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이게 바로 공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문제 앞에 벌벌 떨면 평생 문제 구덩이에서 헤매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고, 문제가 방지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게 승리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속에 꼭 새기시고 가든지 보내든지 선교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요나처럼 박 넝쿨 같은 세상 것에 매달려 살다가 헛되게 인생을 마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런 선교의 과업에 충성하다가 존귀한 인생,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인생을 마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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