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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는 성도다워야 한다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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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코메디 프로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무엇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개그 콘서트에 형님뉴스입니다. 거기서 일룡이가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제가 저에게 맞추어서 페러디를 하면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에게 페러디를 한다면 “집사가 집사다워야 집사지, 성도가 성도다워야 성도지!” 한번 해 봅시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성도답게 살수만 있다면 땅굴을 파서라도 여러분에게 믿음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첫 시간에 들어오셔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선생은 선생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녀는 자녀다워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이 대한민국이 올바른 나라가 된다고 말씀하셔서 참 감명을 받고 지금까지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학생이 학생답기만 하면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다우면 됩니다. 국민은 국민답고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학생답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선생답지 못합니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합니다. 여자가 여자답지 못합니다.
목사가 목사답지 못합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성도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답게 살라는 권면입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면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신 것처럼, 사무엘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전주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마이크는 마이크로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또 이 강대상은 강대상으로 만들어진 목적이 있듯이 모든 만물은 목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르심에 목적을 모르면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삶을 산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분명한 목적을 아는 사람은 한 시간을 살아도 값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어떤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들어오자 대부분사람들은 식사하다 말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평소에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서였습니다.
이 때 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그 식당의 하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하인의 한숨을 듣고는 밖으로 나가 홰 한숨을 내쉬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영광스런 인물인데 반해 나는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서 식당의 마당을 쓸고 있는 신세니, 나 자신이 가엾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자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위로하였습니다.
“친구여! 당신은 식당의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떤 곳에 있든지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매일 땀을 흘리며 장사하고, 영업하고, 또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가 늘 외우며 외쳤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곳에 “나는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참으로 중요한 외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부르심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복을 통하여 최춘선할아버지를 말을 기억합니다. “사명은 각자 각자야!”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에게는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3절 중반절에 보시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누어지기 쉽고 깨기 좋아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붙여주는 강력한 본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저절로 그 몸에서 본드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 되려고 노력하고 먼저 섬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저절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하지 못하면 서로 원망합니다. 서로 분쟁합니다. 서로 나누어지고 찢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과 함께 우리의 의지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 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 되기 싫어하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나누기를 좋아하는 못된 옛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힘쓴다는 것은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하나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이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교회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입니까? 하나 됨에 노력하고 있습니까? 잘 안 되는 것이 진실 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싸우면 술 한 잔 먹으면서 바로 어깨동무합니다. 그리고 뒤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하나를 말하면서도 가장 교회에서 분쟁과 당 짓는 것과 끼리끼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똑같습니다.

교회에서만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온 가족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먼저 부부가 하나된 것을 지켜야 합니다. 요즘 이혼율이 너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4쌍 중에 한쌍이 이혼한다는 말은 아주 먼 옛 이야기가 되었고 지금은 셋 쌍 중에 한 쌍이 아니 요즘 통계를 보면 이제는 두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하고 있다는 서글픈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한국은 이혼율이 세계에서 3위에 입상하는 영애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정말 안 맞는 부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아마 이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우리 마음대로 나누고 있습니다. 쉽게 이혼하고 있습니다.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살면 잘 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머 가운데
그렇습니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또 그 사람과 적응하기 위해서 갈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관이 명관입니다. 옛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됨에 힘쓰기 위해서 행하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겸손과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면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낮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누어지고 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ㅅ”입니다. “ㅈ"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남보다 남편을 낫게 여기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무시하고 깔봅니다.
또한 아내를 존중히 여기고 낫게 여기어야 하는데 “네가 무엇을 안다고?”하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누어지고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합시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높아지고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보십시오. 내가 더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왕처럼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저절로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부인을 왕비처럼 떠받들고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온유는 감싸주는 마음입니다. 온유는 이해해 주는 마음입니다. 또한 온유는 그 사람의 심정으로 바라봐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품으려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너의 사고방식은 너의 사고방식이고, 나의 사고방식은 나의 사고방식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모습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울타리를 치고 서로를 경계하며, 경쟁의 상대로만 받아드리는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잘못했다할지라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납의 적극적인 모습은 먼저 배려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잘 안됩니다. 또한 ‘아마 우리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마음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됨에 사명을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고, 부부가 하나가 되고, 가정이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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