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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영혼의 씨앗을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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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마치는 인생

비밀번호가 현대인에게 새로운 스트레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통장의 비밀번호에서부터, 가게 문이나 현관문의 보안장치 비밀번호와 website의 password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은 많은 비밀번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비밀번호가 틀리면, 내 돈인데도 찾을 수가 없고, 현관문의 보안장치가 가동을 안 하고, 기껏 시간 들여 개설해 둔 website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website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website에다 자신의 모든 비밀번호를 다 입력해두기만 하면, 혹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거나 여러 개의 비밀번호가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잘 생각나지 않을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정보에 접근하거나 보안장치가 된 공간에 접근하려면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하거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발견한 비밀번호,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하는 비밀번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바울이 감사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끝을 맺는다"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17절에서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올림픽이나 아카데미와 같은 각종 시상식을 보면, 영예를 차지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책이나 학위논문을 보면, 저자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명단과 "이 책을 누구에게 바친다"는 헌정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내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의 배후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숨은 공로자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는 곧잘 하면서도 영광을 돌리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면, 대단히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큼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죄와 은혜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은 그의 만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느끼고 간증하여 외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하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의 진정한 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지금은 나를 능하게 하시고 그의 일군 삼아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고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다 털어놓은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는데 그것도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과거사로 말하지 않고, "괴수니라"고 현재사로 말한 것은 과거에 죄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자기 직분에 충성된 자라야 능하게 변화된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직분을 맡길 때에 자격이 있어서 맡긴 것이 아니라 그저 충성 되이 여겨서 맡겼고 긍휼을 베풀어서 맡긴 것입니다(고후4:1). 부족하지만 충성된 사람은 점점 능하게 변화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쓰십니다. 재주 있고, 건강하고, 시간도 많고, 재물이 있어도 충성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며 좀 지나면 주신 것도 다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점점 약해지고 무능력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충성된 자에게 직분을 맡기시며 그 직분에 감당할 만한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데 충성된 자에게 주십니다. 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어름 냉수 같아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잠25:13). 우리들도 이제부터 능하게 쓰임 받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멀고 먼 인생의 여정에서 책임은 점점 무거워질 뿐 결코 가벼워지는 법은 없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얻으며 책임감 있는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하루하루 소리 없이 맡은 일에 열중하면서 생활의 달콤함과 성실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불행한 사람은 기회주의에 민감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책임감에 민감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책임감은 사랑의 무게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으므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직분과 책임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리 내다보시며 우리 속에서 그 씨앗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키워주시는 방법은 "인정"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인정을 받으며 먹고 마시며 자라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정해주고 일을 맡길 때 우리는 힘을 다해 일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인으로 성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같이 하십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모든 인간에게는 ‘승인욕구’가 있어서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은 그래야만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3살 때부터 승인욕구를 갖기 시작하고, 차츰 성장해 가면서 자신이 존중받고 싶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80세가 되었던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부탁 받았을 때 극구 사양했지만 그는 결국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환같이 일했습니다. 그를 충성 되이 여겨 크거나 작거나 주님의 일을 맡겨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작아 보여도 큰일을 맡기십니다. 바로 영혼 구원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혼과 함께 소외된 이웃을 살피며 그들에게 머슴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잃은 양 같은 영혼들, 소외된 이웃, 그분들을 맡기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장차 변화될 모습을 보십니다. 미리 내다보시며 우리 속에서 그 씨앗을 보시기 때문에 일을 부탁하십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일꾼을 세우면, 그를 존경하고 협조하면서 그의 수고와 헌신에 대해서 위로와 인정과 칭찬을 보냄으로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지만, 성숙하지 못한 공동체에서는 일꾼을 세워놓고서 전혀 협조를 하지 않고 냉담하게 외면을 하거나 잘 하는 일은 시기하거나 당연시하고, 조금 잘못하는 일은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 처음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도 얼마 못 가서 실의와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가 버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봉사하고 섬기려던 헌신의 정신은 사라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가시만 무성하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일이니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법한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런 사람 알아 주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 열심히 봉사하다가 아무도 협조해 주거나 이해해 주는 사람 없어 지치고 낙심한 이는 없는지요? 누구나 힘들어하고 피곤해 할 때가 있습니다. 냉소적인 방관자나 날카로운 비판자가 아닌, 친절한 협력자와 따뜻한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충성된 마음을 보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영혼구원)을 맡기시는 것은 우리를 충성 되이 여기시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주시면서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사도의 직분, 복음전하는 직분을 주신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사울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청년 때에 그는 무척이나 교회를 핍박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을 그리스도께서 '충성 되이 여겼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가 모든 일에 충성할 그런 사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난 후에 주님이 그를 보실 때 그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 되이 일할 사람으로 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이런 은혜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신 성도님들, 또는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을 충성된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보시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주시겠다는 적극적인 뜻이 담긴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제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아, 이 일은 어느 분께 부탁 드려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이는 그 분이 충성스럽게 일할 가능성을 보는 것도 있지만 그분을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도록 해드려야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충성된 종"으로 보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를 잉태한다는 것의 의미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동정녀 마리아같이 거룩한 모태를 준비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주님은 산모의 인내심을 보기 원하십니다. 첫째는 불신자의 잉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으나 우리의 믿음 속에서는 그분이 앞으로 믿음을 가지고 신자가 될 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분은 우리의 믿음 속에 잉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라고 하신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태신자가 된 분을 우리는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오며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나는 믿음으로 본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주여, 저분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기까지 믿음 속에 품고 있겠으니 해산의 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대상이 첫 번째 태신자입니다. 두 번 째는 신자의 잉태인데 예수님을 이미 믿고 거듭났지만 그러나 마치 새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신앙의 변화, 열심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태신자로 품고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으며 한 때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아주 희생적이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갈 4: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이런 분들이 신앙생활에 뒤로 후퇴하자 바울 사도는 이들을 태신자로 삼았습니다. 다시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마음에 잉태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은혜의 모습,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기도하면서 말합니다. (갈 4: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갈라디아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태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이른바 장기결석교우들 중에 이런 태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회복의 은혜가 바로 태신자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잉태하고 출산하는 기간 내지는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즉, 태신자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일정 기간의 잉태기간입니다. 태신자의 임신기간이로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품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인 중에 죄인으로 행동할 때도 주님은 그를 참고 계셨습니다. 바울사도의 부족함을 참아주셨습니다. 이런 기간에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태신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품고 계시는 그 기간을 인내하셨습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 코드-충만 

더 이상 성장을 멈춘 아이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도무지 충만하지 못한 우리를 주목하시며 가슴 아파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우리의 충만함을 위해 몸 찢고 피 흘려주신 주님이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상황들이 어떠하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충만한 영혼, 내적 충만 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바라는 소망과 기대는 자녀들의 '건강'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충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와 문제는 충만하지 못한 교인들의 증가와 부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내적 성숙 없이 몸만 커지는 아이와 같이 내적 충만 없는 외적성장은 하나님의 코드가 아니며 그것은 중대한 위기입니다. 열매 없는 잎의 무성함, 성숙 없는 성장, 변화 없는 부흥, 방향 없는 속도, 목적 없는 성취는 우리가 전심을 다해 대적하고 싸워야할 이 시대의 골리앗입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충만과 곤고함이 동시에 공존하지 못합니다.

충만하지 않으면 그런 대로, 그럭저럭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곤고함으로 다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방안에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 차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럴 수도 있음에 소망은 있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불을 켜면, 어두움은 서서히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의 곤고함도 그와 같이 순식간에 충만함으로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충만해야 할 것들이 부족하고, 부족해야 할 것들로 충만해지면 그 시간부터 우리의 삶은 극심한 기갈과 황페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이다 병에서 사이다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에 공기로 가득 채워지듯이 우리에게서 충만이 빠져  나가면 그 자리에 온갖 죄성, 독성, 악성, 상처, 쓴 뿌리들로 무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충만함은, 해결되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초월케 하는 힘입니다. 충만함은, 형통케 하는 힘이 아니라, 막힘도 감사케 하는 힘입니다. 충만함이란, 온갖 무성한 잡초들과 쓴 뿌리를 제거함이 아니라, 오히려, 잡초 같은 인생들을 날마다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어 쉬게 하심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잊어버리게 하는 은혜(망각의 은혜) 입니다.

건강함보다 건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듯 충만함보다 이미 주어진 충만을 지키는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다. 충만은 현재이어야 합니다. 어제의 충만도 내 것이 아니며 내일의 충만도 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충만해야 합니다. 어제의 충만함으로 오늘의 문제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습니다.“얼마나 유능한가? 얼마나 유명한가? 얼마나 유식한가? 어느 교회 출신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직분이 무엇인가? 얼마나 소유하고 사는가? 아파트 평수가 어떤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묻습니다.“오늘도 충만한가? 지금도 충만한가?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를 묻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신가요? 지금은 어떠신가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요인

한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여러 가지 요건이 있지만 그 중에 매우 중요한 요건은 그 교회가 가진 지도력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두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한 수레는 앞으로 진행할 수 없습니다. 제 자리에 서 있거나 간다고 해 봐야 맴돌 뿐입니다. 교인들이 바라보는 그룹이 바로 이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보다 앞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목회자요, 당회원이요, 안수집사요, 권사입니다. '저 분이 저 정도 신앙생활 하는데 나는 이 정도면 되지'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중직자의 신앙의 선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미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귀한 직분과 사명을 받아 충성하시는 분들과 또한 앞으로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시는 분들에게 거룩한 영혼의 씨앗을 품고 건강한 출산을 준비하시는 은총이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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