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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롬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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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본문- 로마서 12: 1- 10

로마서를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두 부분으로 구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라고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장에서 11장까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여 잘 설명해 주고 나서 결론적으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배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쉽지요? 예배하는 자로 사는 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중요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예배할 때에 사람은 가장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모습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각박하다고 말하지요? 전쟁터라고 말하지요?

경쟁사회에서 긴장감 속에서 살지요. 이 모습은 사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뉴스를 보면 납북가족의 가족들의 모임이라던지, 혹은 남편들이 의문사 당했으면 남편이 의문사 당한 부인들의 모임이라던지, 자녀들이 데모하다가 감옥에 갔으면 데모한 감옥에 간 자녀들의 엄마들의 모임이라던지 그런 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하고, 아주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그런 모습들을 보거든요.

가만히 보면 그 어머니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매섭고 독기가 넘치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주 순진하고, 순수하고, 남 앞에 서면 수줍음을 타고, 그런 분이었는데, 자식을 위해 싸우다 보니까, 남편을 위해서 싸우고, 정부를 향해서 싸우다 보니까 나중에는 투사처럼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분들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예요. 상황이 그들이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하다 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가 우리가 각박하게 만들고, 인색하게 만들고, 인정없이 만드는 상황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자의 자리로 돌아오면 그런 모습들을 다 내려놓고, 순수하고 정말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이 본래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형을 잘 설명해 준 것이 구약의 출애굽기입니다. 애굽을 떠나서 광야생활 40년 하는 동안에 그 광야길의 삶이 우리의 인생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갓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고, 처음에는 밥의 절반은 바깥에 퍼 넘기고, 그러다가 어느 세월에 가면 밥 한 술, 밥 한 톨 떨어뜨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기 시작하고, 청년이 되어서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직장을 갖고, 명예를 얻고, 그러다가 이제 한 생애를 마쳐가는 그 삶의 전과정이 출애굽기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출애굽의 광야생활이 굉장히 험한 일이 많다는 거지요. 우선 광야길에서 물도 별로 없고, 양식도 없는 그런 광야길에서 우리가 가야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때때로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메추라기도 주시고, 반석을 쳐서 물도 주시지만 언제나 풍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이 우리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말할 때 정말 중요한 의미에서의 이 광야생활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생활인 줄 믿습니다.

열두지파가 수백만명의 열두지파가 행군을 하고 있는데, 그냥 되는대로 알아서 건강하고 빠른 사람은 앞에, 늙고 느린 사람은 뒤에 쳐져가는 것이 아니라 세 지파씩 구별을 해서 세 지파는 맨 앞에 서고, 세 지파는 뒤에 서고, 세 지파는 좌에 서고, 세 지파는 우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 중앙에 공간이 비는데, 그 중앙에 법궤가 항상 동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는 법궤가 있었다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법궤가 그들의 삶의 자리 중심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 삶의 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경우가 유럽에 가면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유럽에 가면 사거리의 중심에 높이 서 있습니다. 지금 유럽 어느 도시를 가 보아도 거기에 로타리에는 언제나 교회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교회의 중심, 그 거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교회가 있는 거예요. 광야 생활에 열두지파 중심에 법궤가 위치했던 종교적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집을 정하실 때에도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움직이셔야 됩니다.

가끔씩 속상할 때가 있어요. 집을 사거나 이사를 하는데 교회와 생각을 깊이 안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참 안타까워요. 당신의 삶 중심에 교회가, 하나님의 제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움직일 때도 법궤 위에 떠 있는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움직일 때 움직이고, 머무를 때 멈췄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그말이예요. 내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따라오라고 요구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해서 내 삶이 거기에 맞추어 가는 거예요.

여러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기억하시지요? 그 분은 대통령 재임시보다는 퇴임 후에 더 훌륭하게 삶을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노벨평화상도 받으셨고, 온 인류가 존경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조지아주 출신인데 주일만 되면 비행기를 타고 자기 고향동네로 가는 거예요. 뭐 하러 가시는지 아십니까? 예배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교사로 섬기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통령 직무가 얼마나 어렵고 바쁘신지 아십니까? 우리나라 대통령도 하루 일정을 보면 새벽 5시 기상하여 저녁11시가 넘기 까지 업무에 시달려 왠만한 건강체질이 아니면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은 전세계를 챙겨야 하는 분이니 얼마나 일이 많고 피곤하겠습니까? 주일이면 가까운 교회에 갔다가 얼른 돌아와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주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배드리고, 교사로 봉사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찬양대 자리에서, 교회학교 교사 자리에서 섬기는 일이 참 귀한 일인줄 믿습니다. 혹시 국회의원 되셔도 계속 사명감당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예배생활이라고 하는 게 이런 거구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주는 거예요.

등산 가자면 등산 가고, 낚시 가자면 낚시 가고, 쇼핑 가자면 쇼핑 가고, 극장 가자면 극장 가고, 많은 성도들이 그런 이유로 자리를 비워요.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 예수 빋는 사람들은 술 담배 안 하는 걸 알고 있고,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정직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을 성수해야 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권사님이, 장로님이, 집사님이 무슨 주일날 행사하는 거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결혼식 때문에 왔어. 돌 때문에 왔어.." 그러면 "그래요 잘 오셨네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사람도 가짜구만."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일을 간증한 적이 있지요. 사단장이 새로운 군목이 오셨다고 환영파티를 하였는데, 사단장을 비롯하여 연대장과 참모들, 그리고 새로 오신 군목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장이 군목에게 내가 주는 잔을 받으라고 하며 술을 따라주자 떨리는 손으로 한 잔을 받았지요.

"새로오신 군목님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위하여!.." 하면서 한 잔씩 마셨어요. 그렇게 1차가 끝나자 군목님과 일부 간부는 돌아가고 사단장과 참모들만 남았습니다. 2차가 시작이 된 것이지요. 그때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단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모들이 향해 "야, 이번에 온 목사도 돌팔이가 왔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단장이지만 성직자의 수준과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던 것이지요.

어떤 군목은 외적으로 볼 때 상당히 왜소해 보여 저런 분이 군목생활을 제대로 할려나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그 분은 사단장이 환영파티한다며 술을 따라 주려는 사단장에게 "사단장님, 목사가 왔는데 콜라 한잔은 준비해주셔야 되는거 아닙니까?"하며 오히려 호통에 가까운 항변을 하자 황급히 콜라를 따르면서 분위기를 추슬렀다고 합니다. 1차가 끝나고 참모들과 2차가 시작되었을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야, 이번에 온 목사는 진짜인 거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줄로 믿습니다. 옛날에는 비가 오면 목회자들이 굉장히 걱정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이나 믿음이 약한 분들이 못 오실까봐 그랬던 것인데, 요즘에는 비가 오면 오히려 행복해요. 날씨 좋으면 차 타고 산으로, 들로 도망가 버리니까 비오는 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중심은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어떤 예배가 진짜 예배요, 영적예배라는 거예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요, 진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의 예배는 반드시 예배에 제물이 있어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잡는 것을 보면 무시무시 하지요. 소를 칼로 딱 떼서 잘 못 찌르면 그냥 날뛰니까 한 칼에 숨통을 끊어요. 그래서 피를 그릇에다가 받고, 그리고 숨을 거두고 나면 칼로 쫙쫙 째서 껍질을 벗겨 내고, 그리고 사지를 도끼로 짤라내고, 칼로 내장을 갈라내고, 그리고 정한 물로 깨끗이 씻어서 각을 뜬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단 위에 올려 놓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은 완전히 죽어서 올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제물이예요. 예배가 산예배가 된다고 하는 의미는 예배의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제물이 내가 제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어서 깨끗하게 씻김 받은 사지가 다 잘려서 완전히 씻김 받은 그러한 제물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껍질 벗겨 내고, 사지를 잘라낸다는 것은 우리의 고집과 생각과 더러운 모든 것들을 다 벗겨내고, 잘라내고, 각을 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사지를 잘라내고, 각을 뜬 그 소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것처럼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러한 제물이 될 때 하나님이 그럴 때 열납하신다는 거예요.

신앙생활 오래 해도 아직도 혈기가 살아있고, 고집이 살아있어서 자기 멋대로 해야 교회 다니는 거고, 조금만 의견과 생각이 틀어지면 까짓거 교회가 많은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나오고 안 나오고,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내 중심이요, 내 멋대로 입니까?

예배가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제물이 살아서 판을 치고 다니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각을 떠야 되는데, 껍질을 벗겨야 되는데, 이게 살아서 판을 치고 다니니까 산제사가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나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요, 산제사인가. 아니면 내가 살아서 펄펄 뛰는 예배가 내 중심이 되는, 내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받는 예배가 되는 그러한 잘못된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사신 것이라. 이제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서 주인이 되셔서 그리스도가 주관이 되신 줄 믿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크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우상숭배 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두가지로 구별합니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게 있어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가 어떤 세대입니까? 이혼율 세계1위의 세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들의 이혼율이 40%가 넘고 있습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은 이혼하는 상황입니다. 이제 곧 50%가 될 것이라고 통계청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부분은 또 무엇입니까? 어제 뉴스를 보니 이젠 노래방도 가기가 쉽지않을것 같아요. 노래방 주인이 말하기를, 그냥 노래만 부르러 온 사람은 반갑지 않다는 것입니다.

벽인줄 알았는데 리모컨을 누르니까 문이 돌아가면서 침대방이 하나씩 나옵니다. 노래 같이 해 주는 도우미는 3만원에서 5만원, 침대방에 들어가 서비스 받으면 10만원이랍니다. 문제는 노래방 도우미들이 대부분 20- 30대 젊은 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되시는 분들, 아내들 한 번씩 들여다 보세요. 자나깨나 아내 조심, 자는 아내 다시 보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바울시대에는 너무 성적으로 타락하고, 너무나도 물질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시대입니다. 당연히 타락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부자들은 첩을 당연하게 하나, 둘 거느렸습니다. 부자면 자기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첩이 하나, 둘 있어야 하는 시기에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절대로 처첩은 안 됩니다. 굉장히 당황했잖아요.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부자면 양반이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첩이 하나, 둘 있어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놀랐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것들이 말씀듣고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것이 잘 못된 것인줄 아니까 세상에 그런 풍조, 모습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지 않은 그 많은 세상의 풍조들을 우리는 당연코 거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라고 하신 것이 있어요.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변화는 받으랍니다. 변화, 이 변화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자의 경건한 삶을 이야기 하면 교회 안에서 지금 이 시간 예배하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절반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반쪽 신앙인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과거 청교도들은 살아가는 신앙에 있어서 모든 삶의 자리가 다 경건함이요,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양치는 목동은 목동으로써, 농사짓는 농부는 농부로써, 일하는 근로자는 근로자로써 모두 가 그 자리가 예배자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영어로 Job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Vocation,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신 이 귀한 달란트, 이 귀한 직업, 사업,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는 거예요. 그 직업,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주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주신 직업이나 사업장 있잖아요. 그곳이 바로 전도의 중요한 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보, 전도지 가져다 놓으라고 하면 부담되요 이러면서 싫어하는 손님 있거든요 그래요. 물론 싫어하는 손님들 있지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급니까?

그렇게 심약해 가지고 무슨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십자가의 용사로 살려고 그래요. 하다보면 싫어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지요. 그러나 한 영혼 구원하는 일이기에 담대하게 사업장에 전도지도 갖다놓고 주보도 한 100장 갖다놓고 전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담대히 기도해보세요. "주님, 주보 100장 나누어줄 수 있도록 이번 주간에 손님 100명만 오게 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소명의 자리요, 하나님이 주신 자리인데, 그렇게 못 하고,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회개하시고, 오늘부터 새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변화를 받으라. 달라지라는 거예요. 어제까지 못했으면 오늘부터 하라는 거예요.

이제는 예배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이것이 예배요, 이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완전 죽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에 100% 헌신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복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사업, 여러분의 자녀가 강건하고, 여러분의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로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연약했던 부분을 인정합니다. 부족했던 부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말씀을 듣고 저희들 새로워 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발걸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생각도 새로워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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