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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힘을 얻으라 (행 9: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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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실망한 적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그것도 가장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거나 그들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 실망한 마음은 배신감으로 바뀌어 걷잡을 수 없게 변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처는 두고두고 남아서 어떤 비슷한 모습만 보이면 “아하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구나” 하고서는 그냥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됩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신뢰하여야 할 대상을 오히려 불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도 하고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우화에서 보듯이 한 번 두 번 속다보면 나중에는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만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요 소중한 만큼 믿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 몸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변함없이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신뢰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만큼 또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한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아냐?”라고 말들 합니다. 그만큼 세상에서는 서로 속이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가운데 태어난 인생이기에 그렇고 이 세상을 자기의 손아귀에 두고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고 하는 악한 마귀가 거짓의 대명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처음 사단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했던 말부터가 거짓이었고 이 거짓에 속아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서 사람들은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거짓의 왕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게 되었고, 따라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거짓을 말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믿게 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그러면 더 이상 이 거짓에 매이지 않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 안에서 거짓 없이 참된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까? 불행하게도 “아니올시다”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아직 죄의 쓴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들려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붙들어 주며 끊임없이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또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같은 믿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로부터 받는 상처가 더 쓰리고 아픕니다. 그래도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 삶도 참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내가 봐도 내 자신을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그냥 착 까부라지는데 이건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다짐 다짐할 때만 해도 얼마나 든든했습니까? 예수가 잡히시던 때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그러면 그렇지, 역시 베드로야” 하는 탄성이 나올 법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거다. 그러니 그 칼 집어넣도록 해라”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큰 소리도 치고 칼도 휘두르던 베드로가 잠시 후에 안나스의 집 뜰에서 작은 계집 종의 “저도 예수와 한 패다” 말할 때 심지어는 욕설을 퍼붓고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딱 잡아떼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니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아니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앞에서 함께 지내며 배웠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는 배신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요.

이건 정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이야 우리네는 예수 믿는다고 그토록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예수 믿는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를 않습니까? 아니 죽음까지는 아닐지라도 예수 믿다가 그것도 잘 믿으려고 하다가 붙잡혀가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번 중국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소위 삼자 교회라고 해서 중국 공산당이 세운 교회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왜요? 거기서는 예수를 말하지도 않고 예수 부활도 믿지 않고 그저 말만 교회지 전혀 예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소위 처소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처소교회가 세력을 확장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자기들에게 어떤 해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처소교회들을 단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처소교회에 모이는 사람들 중에는 공안원들도 있습니다. 비록 공안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진실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속해 있는 처소교회는 비교적 단속에서 좀 벗어나 있기도 합니다. 같은 성도인 공안원이 미리 단속 정보를 알려주기 때문에 단속이 있다고 하면 슬쩍 피해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모르나요? 알지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른 척 밑에서 눈감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생짜배기 공안원이 어느 날 나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처소교회에 함께 모이겠다고 한다면 그 처소교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정말 잘 생각했다고 우리 같이 잘 믿어보자고 하겠습니까? 아니죠. 우선은 경계의 눈초리로 보지를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앞에서는 말도 행동도 조심하고 예배 처소는 잘 알려주려고도 하지 않고 뭐 그러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사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처음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자기에게 비쳐진 빛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롭게 변화가 되었지만 다마스쿠스에 사는 제자들 중 누구도 그를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아나니아조차도 그에게 가서 안수하여 보게 하라고 하실 때 “그가 어떤 사람인데 그에게 가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잖아요. 그러나 성령께서 저의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심에 따라 순종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사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예수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며 함께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울이 금세 힘을 얻어서는 유대 회당을 찾아가서 거기서 예수를 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유대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마구 죽이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하며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럴수록 사울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사울을 믿어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사울의 전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이 되겠지요. 그것은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사울이 회심했다고 할 때 다마스쿠스에 사는 제자들이 이를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반대편에 있던 유대교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유대교 사람들이야 더욱 얼떨떨할 뿐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가서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변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건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그런 개차반도 없다고 하던 사람이 어느 날 확 변해서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일까 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같은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그저 건성으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은혜를 깨닫고 새롭게 달라진 삶을 살고자 할 때 “참 잘됐다 참 고맙다 그 믿음 변치 말고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자”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그보다는 저 사람 지금은 저러지만 언제 또 변할지 몰라 하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요? 아니 마음만 아프게 만들고 상처만 주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못살게 굴던 남편이, 어느 날 “나도 교회 다니겠다”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정말로 잘 하겠노라”고 할 때 우리들 흔히 뭐라고들 합니까? “정말 고마워요 나도 더 잘할 게요” 라고 하기보다는 “그 말 정말이야?” 하면서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언제 또 변할지 어떻게 알아?” 하면서 그 마음에 못을 박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아무리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그래도 무언가 마음에 찡한 것이 있어서 좀 달라져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어렵게 말을 끄집어내면 그것을 고마워하고 기뻐하고 설사 그 이후에 다시 옛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도 끝까지 믿어주고 그러기에 더 기도하며 격려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몇 조금이나 가나 했네.” 이러고 아주 빗장을 걸어 잠그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다 용서한다고 하면서 다시금 조금 눈에 거슬리는 그런 모습이 보인다 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믿는 내가 바보지.” 하면서 돌아서 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상처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이 얼마나 무서운 고질병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그 예수님의 사람들을 또한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뢰인 것이요 그 신뢰를 바탕으로 참된 사랑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어주십시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무리 속상해도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럴 때 참된 신뢰가 형성되고 거기서 참된 사랑이 나오고 그 참된 사랑 안에서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할 때 상대방 또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그것이 반복된다고 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를 말고 그럴수록 더 믿어주고, 더 감싸주고, 더 붙들어주며,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변화의 대가로 주어지는 핍박입니다.
사울이 진정으로 변화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유대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처음에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불신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윽고는 그 불신이 분노로 바뀌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놈 그냥 둘 수 없다. 죽여 버려야 된다.”고 그들이 작정을 합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유대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예수 믿은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설 때만 하더라도 사울이 최고라고 칭찬이 대단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정반대의 입장으로 바뀌게 되고 나니 이제는 그 칭찬하던 사람들이 반대로 사울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그를 실행에 옮기려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당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놀러 다니고 함께 세상 일로 바쁘던 사람이 어느 날 변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고 나면, 지금까지 그렇게 친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살기 싫다고 할 정도로 못 살게 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에요. 믿음 안에서 조차, 변화되어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어 새로운 모습으로 살고자 할 때 그렇다고 해서 실수가 없습니까? 여전히 실수투성이입니다.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모습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럴 때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하며 격려하기 보다는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등을 돌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냥 등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러느니 그냥 옛날처럼 살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렇게 마음에 큰 고통을 겪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소위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할 때 사실은 상대방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 스스로 더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해서 낙심천만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잘해 보려고 하는데 왜 그게 그렇게도 힘들까?” 하는 생각에 더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대방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주 대못을 쳐대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이 있느냔 말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관용하는 사랑, 용서하고 품어주되 끝까지 그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베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그런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고 해서 변화된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누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누가 나를 망신시키고 고개도 못 들게 만든다고 해도,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 전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더 힘씀으로 상대방의 불신과 핍박이 변하여 신뢰가 되고 협조가 되도록 만들 책임이 또한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이겠다고 덤벼들어도 그래도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기를 계속했던 사울처럼, 우리 역시 그 불신이 변하도록, 그 핍박이 변해서 협조자요 사랑의 반려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는 힘들다 해도 그리고 지금까지의 상처와 불신 때문에 한 번에 믿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힘들게 만들고 어렵게 만든다 해도, 이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를 결코 포기하지 말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함께 진실된 믿음 안에 있도록 이끌기를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를 여전히 주님이 사랑하시고 그런 나를 여전히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그런 나를 여전히 주님이 지켜주시며 새 힘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더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어려울 때 사울을 돕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힘들게 새로운 믿음 안에서 정착해 갈 때, 아니 저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할 때, 그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그러나 사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의 영이 저와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능력을 얻어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사울을 찾아와 저에게 안수하며 기도하여 줌으로 눈을 뜨게 하였던 아나니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마스쿠스의 유대인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피해 나갈 수 있도록 저를 신뢰하게 된 다마스쿠스의 제자들이 사울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사람들이 각 성문을 지키고 있다가 눈에 띄기만 하면 당장 사울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밤중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다마스쿠스 성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마스쿠스를 빠져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이 사울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 그런 사울을 도와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예루살렘 성의 귄위자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게 됩니다. 신도들은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냅니다. 이때 앞장섰었던 사람이 또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계속해서 사울과 동행하며 안디옥까지 가서, 사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돕는 일을 하였고,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제 1차 선교 여행에 나설 때, 사울과 동행하면서 사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격려자가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격려자 바나바가 있었기에 위대한 전도자 사도바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주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이끌어 주셨지만 그 감동하심을 따라 도왔던 바나바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도 이런 돕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해도 나 혼자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물론 주 성령께서 우리를 돕지만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모습이 보일 때조차도, 끝까지 붙들어 주고 이끌어 주어 새로운 삶 변화된 삶에 정착할 수 있도록,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신뢰와 사랑을 더하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주고 사랑으로 끝까지 감싸 안아줄 때 하나님의 일군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신뢰와 사랑으로 감싸 안는 귀한 협력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일군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협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끝없이 우리의 힘을 다 쏟아놓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나도 누가 나를 이렇게 붙들어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끝까지 믿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바랄 때 내가 온전해서만 그런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여전히 우리는 연약합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가도 흔들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더러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 옆에 와서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리고 그 한 마디 위로와 격려의 말 때문에 우리가 다시 설 수 있는 것이요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불신의 눈으로가 아닌 신뢰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사랑으로 붙잡아 주어 귀한 일꾼을 세우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자가 되시기를, 그러한 여러분들로 인해서 좋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끊임없이 세워져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주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리고 복음의 증거자로서 살아가기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상대방이 믿어주지를 않고 작은 실수에도 핀잔이 돌아온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얻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자요 상대방이 실망하기에 더욱 다시는 실망주지 않는 내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이 힘을 얻어 더욱 굳게 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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