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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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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눅 5:1~11절)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 가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People are often unreasonable, illogical,
and self-centered;
Forgive them anyway.
If you are kind,
people may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Be kind anyway(…)
If you are honest and frank,
people may cheat you;
Be honest and frank anyway.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someone could destroy overnight;
Build anyway.
If you find serenity and happiness,
they may be jealous;
Be happy anyway.
The good you do today,
people will often forget tomorrow;
Do good anyway.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it may never be enough;
Give the world the best you've got anyway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 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 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 시는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마더 테레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씨의 글입니다. 하지만 누가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최상의 것을 내놓고 베푼다면 세상도 우리에게 언젠가는 최상의 선물을 줄 것이라고 믿어보라는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열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한 '마쓰미 토요토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참사랑은 그 어디에」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 행복이란? 이 세 가지의 사랑 중 어느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세 가지의 사랑이란 이런 종류입니다.

먼저, '만약에의 사랑(IF의 사랑)'이 있습니다.

'마쓰미 토요토미'는 '만약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가령, '만약에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사랑할 것이다.' 라든가 '나에게 그것을 해주면 사랑하겠습니다.'라든가 '만약에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조건을 두고 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끈 달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의 끈들을 끊어 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끈 달린 사랑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도 뭔가를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 'IF'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때문에의 사랑(BECAUSE)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또 '때문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나 건덕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잘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많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해관계에서 오는 그런 사랑을 가리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평생을 살고서도 한다는 소리가 '저 웬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에게 실망했다.'말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랐기에, 무엇을 두고 사랑했기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보고 사랑했기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동기와 목적이 잘못 되었고, 오리엔테이션이 잘못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조건이 없는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코 끈달린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사랑 받을만한 건덕지가 있어서 사랑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히려 기대치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용납하는 사랑을 가리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렇게 살면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이런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성경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사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역설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세 번째 소개한 전형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신앙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물고기를 잡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현제 ‘갈릴리 바다의 별칭’입니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워 졌습니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해당하였는데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따라 새벽에 돌아와 그물을 씻어 정리한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피곤하고 짜증스러운지.... 그 이유는 아마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물 정리가 끝나 갈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배를 강대상 삼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 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뭔가 좀 보답할 뜻인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까지 수고한 밤새도록 허탕 친 바다입니다. 새 번역대로라면 ‘지금까지 애를 쓴’ 그런 바다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군소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순종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어 동료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시작은 낙심과 피곤과 절망과 짜증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승리와 결과에 만족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이 시작과 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 5절에 보면, “잡은 것이 없지마는”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킹제임스 버젼을 보면, “Nevertheless”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으로 삼으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실패했음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말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무식하고 거칠어서 인간적인 면으로는 전혀 성공적인 요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마는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빈손으로, 빈 배로 돌아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빈배나 빈손은 실패를 의미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다시 재도전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의 실패로 인해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소원대로 가득 채워지기만을 바라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 생애에 베드로와 같이 ‘빈 배’와 같은 위기와 실패를 경험하게도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건강문제일 수도 있고, 사업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문제일 수도 있고, 자식문제일 수도 있고, 물질문제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생겨지는 문제일 수도 있고, 오늘과 같은 경제적 위기와 갖가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씻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다시 재도전 하려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공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업도 성공해야 하겠고, 기업도 살려내야 하겠고, 기울어 가는 가정도 바로 일으켜야 하겠고, 정치도 성공해야 하겠고, 심지어 목회도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온갖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성공을 향해서 무섭게 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성공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려가면 실패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올라갈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려갈 때가 문제입니다. 내려갈 때의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 한 번의 그물을 쳐서 성공한 사람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입니다. 그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1,330개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비로써 714개의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가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러 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실패를 했거든요?”였습니다. 과거의 그 많은 실패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대답입니다.

미국대학 교수 가운데 서부극에 나오는 명사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조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서부극의 명사수처럼 조준을 하지 않고도 명중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이 끝날 때쯤 되어서는 그도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명사수가 될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맞추든 못 맞추든 걱정하지 말고 2만 발을 쏘면 자연히 명사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2만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할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안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 앞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자세에 있습니다.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도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까지 순종 하셨습니까? 빌립보 2장엔 '죽기까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고,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 모두가 높아졌습니다. 주님이 쓰신 저 가시관은 오늘날 온 인류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스런 왕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집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두 배에 가득 차는 축복을 방아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실패는 사생아”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쉽게 느낄 수 있는 어려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이고도 절망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수 있고, 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질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열심히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해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임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버려졌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날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위기, 그 실패로 인하여 오늘 낙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씻는다는 자세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비합리적임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상식에 준하기를 합니까? 내 생각, 내 마음에 반절만이라도 든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혀 엉뚱한 얘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과도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말씀인가를 보십시오.

1) 시간적으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지금은 그물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의 특성으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습니다. 물고기가 호수가로 밀려 나오는 밤에 주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낮이었습니다.

2) 장소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장소를 봐도 고기가 잡힐 장소가 아닙니다. 고기 잡는 방법이 낚시가 아닌 그물입니다. 여기서 그물이란 “디크튀아”로써 던지는 투망입니다. 투망이라고 하는 것은 고기가 많이 몰리는 곳에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데나 던진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닙니다. 깊은 곳은 약 60M가 되는데 거기 투망을 던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은 깊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던지라는 거라. 상식이나 경험에도 없는 말씀입니다.

3) 더구나 어려운 것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고기잡이에는 '비전문가’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 40이 넘도록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전문가입니다. 어려서 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어부로 외길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갔을 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베드로 고기도 먹어 보았습니다마는 그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호수라고 해야 할 만큼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호수이기에 제 손바닥 보듯이 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또한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습니다. 목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를까 목수가 어부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합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쓴다.'고 합니다.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한다.'고 합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보세요, 경험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일찍이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나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여러 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미 늦은 때이고, 환경 적으로 모든 여건을 뒤집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주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테도 프레마티수'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당신이 말씀하였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 명령을 합니다.'라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강한 역사를 일으켜서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내 몸과 마음에 명령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로고스'가 아닌 '레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 자체를 말하지만 '레마'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온 '레마'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딤후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모든 말씀의 기록자이며 말씀을 통해 역사 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히4:12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마'의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다는 말은 성경대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에게 접촉하고 내 생활을 변화시키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6절의 "그리한즉"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회개시키고 심령 속에 뜨겁게 역사 하는 살아 있는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 즉각적인 순종이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말씀하는 것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니 지식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제 고집이 너무 강합니다. 제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순종을 배우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가 즐겁게만 순종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것이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불확실함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진정한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도, 그물도, 직업도, 심지어 처자식까지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우선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전에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생활이 보장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한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용기가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적당히 타협할 때가 많고,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순수함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마음 아플 때가 많고, 너무 안일무사하게 행동하다 보니 용기도, 뜨거움도 식어지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 ‘헬렌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한데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합니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는데 행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아는 것은 많습니다마는 용기도 행함도 없는 현실적으로 바뀐 우리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것이 “결단성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주저하다가 세월 다 보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앞날이 불확실하기만 하다고 미적거리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불투명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여기에 베드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자기를 비웠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결국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따르노라면 상상도 못한 엄청난 축복의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을 교훈삼아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종하는 자세를 신앙으로 삼으셔서 생애의 나의 수고보다 몇 배나 가득 차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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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사람으로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몸 된 교회에 달려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출타하신 당회장 목사님 동부인께서 안전하게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도 불확실하기만 하고, 어둡기만 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앞날이 불투명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전진할 수 있는 결단성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생애에 다시 한 번 실패한 빈 그물이 아니라 그물에 고기가 가득차서 넘치는 축복을 경험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게 하옵소서.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게 하옵소서.

실패한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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