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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작마당 (대하 3:1-2, 마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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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타작마당 - 심판의 터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지옥에서 자기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북한 사람 요금 청구서엔 500원이 나오고 한국 사람 전화요금 청구서엔 20,000원이 나왔습니다. 그 이유인즉 지옥과 북한 사이엔 시내 요금이 적용되고 지옥과 한국 사이엔 국제 요금이 적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우리나라가 손바닥만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도 반쪽이 뚝 짤려져 있습니다. 9시 뉴스 다음 일기예보를 보면 남쪽이나 북쪽이나 대개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옵니다. 비도 비슷한 시기엔 비슷한 양으로 남북한에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지난 수십년동안 한결같이 휴전선에서 2km만 북으로 올라가면 흉년입니다. 휴전선에서 2km만 남쪽으로 내려오면 풍년입니다.

농사를 지으며 풍년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버린 북한땅을 하나님이 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열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열매는 맺혀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 연속 설교 그 두 번째 시간 「타작마당」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까지 서론적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봄은 씨를 뿌리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가꾸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내 곡식을 가꾸었던 농부는 가을이 오면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모든 농부에게 가을은 기쁨의 계절이요 은혜의 계절이요 풍성한 복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와도 거둘 열매가 없고 쌓을 곡식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농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가을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계절입니다. 하루에도 저녁이 있고 한해는 반드시 가을이 있듯이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인생의 가을이 있습니다. 역사에도 가을이 있습니다.

역사의 낙엽이 지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을 타작하시는 그 날, 내 생을 쓸어 담고 담아도 하늘 곡간에 쌓을 것이 없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이 땅에서 낭비하다 끝낸 인생들과 하늘 곡간에 소중히 쌓았던 인생, 선악간에 반드시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개인의 타작마당, 한 국가의 타작마당, 공동체의 타작마당, 역사의 타작마당이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조그마한 한반도 땅에서 북쪽과 남쪽이 다르듯이 똑같은 교회공간 똑같은 말씀 듣고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그 열매가 분명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떠할까?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내 인생과 나의 목회가 지금 이 시간 주님의 타작마당에 선다면 나는 어떤 열매를 들고 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열매를 들고 천국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II. 구약의 타작마당 - 예루살렘 성전터

여기 타작마당이란 곡식을 추수하는 정해진 장소를 말합니다. 농부는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냅니다.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기도 하고 썩혀 거름으로 쓰기도 합니다. 모래가 많은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동구 밖에 땅을 다져서 마을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타작마당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넓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하면 그 곳을 타작마당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혹 농사가 많은 집에서는 개인 타작마당이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3장 본문은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그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0-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예언하고 소개해 줍니다만 여기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타작마당에서 타작하시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본문에 타작마당의 의미를 알려주는 구약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왕 시대에 소년 다윗은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죽인 일로 단숨에 백성들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여인들이 노래를 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사울은 못내 견딜 수 없어 다윗을 몇 번이고 죽이려 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마침내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십니다. 왕이 된 후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때 충복으로 알았던 아히도벨이 반란에 가담을 합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이 도망가는 다윗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감람산으로 도망가며 부끄럽고 부끄러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울며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고난의 시절 다윗은 절망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열망했습니다. 신앙은 더욱 순수해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몹시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삶이 지치고 힘들어 운 것이 아니라 성전이 그리워 울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어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어려움과 역경의 세월이 끝나고 유대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게 됩니다. 나라가 통일되고 왕권이 절정에 오르자 다윗의 마음에 교만이 생겼습니다. 하여 다윗은 백성의 수를 계수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라를 다스리자면 인구조사야 필수불가결한 일이지요. 또 인구조사는 광야에서 이미 하나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구조사를 몹시도 싫어하셨을까요? 인구조사를 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조사하게 된 다윗의 마음 깊은 곳, 동기가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어느날 다윗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아 보라. 내 왕국이 얼마나 넓고 큰 왕국이 되었는가. 나는 이 엄청난 왕국을 만들지 않았는가. 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 사람들아 보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다윗,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살았던 다윗, 고난의 시간에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줄로 믿고 하나님 한 분에게 시선을 맞추고 살았던 다윗. 어느새 그 시선을 자기 백성에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넓은 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백성을 의지하고 싶었던 유혹이 생겼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기요 문제요 실수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왕국을 내가 세우고 백성을 내가 낳은 양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이야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이야기요 우리교회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복음의 열정 하나로 시작되고 부흥되고 성장해 왔습니다. 오직 복음을 자랑하고 예수님만을 자랑하던 우리가 언젠가부터 교회의 규모를 자랑하고 급성장을 자랑하고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나 싶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이룬 것인양 자랑합니다.

물론 여전히 복음 전도의 열정이 식지 않고 펄펄 끓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의 가슴에서 전도의 열정이 식었습니다. 전도지 한 장을 돌려도 내가 먼저, "돈은 없지만 건강한 내 몸둥아리 있다." 내 몸으로 뛰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하지 않아도 잘들 돌아간다." 안일주의에 빠집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빈껍데기만 남았구나. 열매가 사라졌구나.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할 때 순수한 신앙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던 성도들 가운데 때로 밥술이나 먹고 집채나 가지게 되자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어려울 때 진실하던 성도가 소위 출세하고 명예를 얻자 교만하고 거만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건 분명히 신앙생활의 위기요 확실히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타락한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선지자 갓을 보내어 세 가지 환란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삼하24:13)


이때 다윗이 울며 회개하고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 일로 온 이스라엘에 삼일동안 재앙이 내리고 칠만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각료들과 더불어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범죄한 것은 이 못난 임금이 아니었습니까? 범죄한 것은 나 다윗이 아니었습니까? 주여 내 나라 백성에게는 제발 재앙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는 천사에게 재앙을 멈추도록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이 타작마당에서 여호와 앞에 단을 쌓아라" 그리하여 다윗은 오르난에게 상당한 값을 주고 타작마당을 삽니다. 제사를 드렸더니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 제물을 살라 받으십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 - 이것이 뭘 의미할까요? 그 곳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언덕이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타작마당에 하나님의 사자가 임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곳은 여호와의 전이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로다" 고백함으로 바로 이곳이 예루살렘 성전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 인간의 죄를 걸머지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몸부림했던 자리가 바로 성전 터, 타작마당, 모리아산 언덕 그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기서 자손만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을 하나님의 성전터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타작마당이 되게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만났고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타작마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 성전이 있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바로 여기가 타작마당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하 3장 1절 2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던 모리아 산과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던 타작마당과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장소가 꼭 같은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작마당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성전은 -
·주님이 피흘려 자신을 바친 자리에 세워집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은 감격에 울고 구원받은 감격에 울며 쌓는 제단위에 세워집니다.
·가장 소중한 것 - 이삭을 바치는 성도들의 희생위에 세워집니다.
·다윗의 헌신과 솔로몬의 지혜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그곳은 하나님의 사람과 지옥백성,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타작마당이 됩니다.

III. 신약의 타작마당 - 그것은 오늘의 교회

여기 타작마당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심판의 자리입니다.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우리가 함께 맛보는 곳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는 곳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타작마당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예배를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타작마당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한소망교회가 타작마당입니다. 여기서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집니다.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하늘 곡간 수확과 열매의 바로메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비를 맞아야 합니다. 여기서 내 심령이 옥토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알곡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는 언제나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 가장 순수한 교회, 가장 영광스런 임재를 맛보는 예배, 주님이 기뻐하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 시간까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몸부림을 하는 겁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타작마당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교회의 정신입니다.

주일은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일주일동안 사는 것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별로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 되면 갈라집니다. 교회 가는 사람과 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이 갈라집니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그래서 주일은 갈라지는 시간,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일 신앙으로 주일 열매, 예배 열매를 잘 맺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이 자리가 하나님이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똑같이 제사하고 가인과 아벨이 갈라졌습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한 시간 떼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한 가지 결단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타작마당되는 교회를 내가 해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해하는 일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니만큼 교회를 언제나 유익하게하는 자리에 서리라. 나는 내 인생과 신앙의 주사위를 예수 편에 던지리라 교회 편에 서리라" 여러분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IV. 심판의 타작마당 - 구원과 심판의 갈래 길

열매를 심판하시는 분, 타작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는 ...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 여기서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자기의 타작마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타작마당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타작마당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타작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교회는 구원의 장소인 동시에 심판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타작마당에서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 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어라" 지금은 가라지도 자라고 곡식도 자랍니다. 그러나 타작마당 주인이 오시면 가라지는 불구덩이에 알곡은 천국 곡간에 모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어머니들이 키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타작 다 끝내놓고 난 다음에도 한 톨 알곡이라도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키에다 북데기를 다 담습니다. 그리고 흔들어요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바람을 일으키고 다시 흔들고 다시 바람을 일으킵니다. 바람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흔들면 흔들수록 알곡은 주인의 가슴으로 자꾸 파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쭉정이는 자꾸 날아가요. 한 번 흔들면 하나 날아가고 바람 한 번 일으키면 두 개 날아가요. 고난을 키 삼아 하나님이 흔들어 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으로 흔드십니다. 세상 유혹이 나를 흔듭니다. 교회생활로 흔듭니다. 시련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험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령의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알곡은 주인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교회 중심자리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품을 떠납니다. 교회 신앙생활에 조그마한 유혹과 시험에 날라가는 쭉정이들 하나님 앞에 버림받습니다.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라" - 아멘.

신앙생활은 타작마당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때로 교회를 섬기기가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가라지를 속히 뽑아 버리고 싶은 열망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 추수 때는 갈라지는 때입니다. 양과 염소가 갈라지고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고 기름 등에 넉넉히 준비한 사람과 등잔만 들고 따라다녔던 껍데기 신앙인들 종교인들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전과 목적을 잘 이룬 사람과 자기 이름 장사하고 산 사람이 갈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종말의 때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경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가난에 굶주리고 있습니까? 경제적 모든 기회를 지금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눈만 뜨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회를 창출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400만명의 경제 상류층이 평균 900억원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도 거지가 많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국가도 갈라집니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선명하게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갈라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는 교회들이 세계도처에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추수 때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은 침체를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자들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겸손히 섬기는 순수한 사역자들과 세속에 오염되어지고 물들은 사역자들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알곡 성도들과 쭉정이 성도들이 나누어지는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추수 때는 갈라지는 때입니다.

열매맺는 계절 가을은 곧 종말을 의미합니다. 어떤 나무가 좋은 열매입니까? 가을에 판가름 나는 거지요. 어떤 사람이 승리한 인생일까요? 죽어봐야 아는 게지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봐야 알 것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인생은 연습이 아닙니다. 시행착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언젠가 영주지방의 기도원에서 전국에 있는 신학생들이 모여서 부흥회를 했는데 몇 시간 설교를 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너무 몸은 지쳐있고 짜증스럽고 불평스러워서 원망을 했습니다. 설교 몇 시간 듣자고 이곳까지 사람을 끌고 내려오느냐고. 그리고 피곤해서 언덕 위에 차를 세워놓고 밑을 내려다 보는데 마침 다음날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는 예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들판에 추수하는 사람들로 가득히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걸음마를 배웠을까요? 어린 아이 하나가 나락단을 하나 품에 안고는 논뚝 길을 걸어가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그러면 다시 일어나서 나락단 하나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비 오기 전날 추수의 날 이제 걸음마 배운 철없는 아이도 추수에 뛰어 들었는데 마지막 종말의 시대에 이토록 귀한 신학생들에게 내일의 일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영광이지. 마지막 추수 때에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영광이지 불평이 웬말이고 원망이 웬말이더란 말인가? 하나님 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감사하며 가겠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습니다. 기도하고 노래 해 놓고 불평이 웬말인가.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언덕 위에서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야 네가 부흥사구나! 네가 위대한 나의 선지자였다.' 아이에게 감사하며 그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이 역사의 타작마당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내가 은혜 받고 좋은 말씀 듣고 기도하여 응답 받고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잎사귀는 맛난 열매를 맺기위해, 건강한 나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뿐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은 열매입니다.

V. 자랑스런 구원

시골에서 자란 저는 타작을 하는 날이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별로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저희 집은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동네 부잣집에서 쌀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장내쌀이라고 불렀습니다. 봄에 열 말 쌀 빚을 먹고 나면 가을 추수 때에 열 다섯 말, 심한 흉년에는 스무 말을 갚아야 했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는 쌀 빚을 갚기위해 쌀을 한 말 두 말 담습니다. 영문을 알길 없었던 저는 실컷 농사지어 놓고 왜 남에게 다 퍼주느냐고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됫박에 되어논 쌀을 엎으며 철없이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그때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누군가 있었다면 아마 처량하고 불쌍했을 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쌍한 인생가을을 맞으시렵니까 아니면 자랑스런 종말을 맞으시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하워드와 라쉬(Rick Howard, Jamie Larsh)의 「부요한 구원 가난한 구원」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 사람들 앞에 저마다의 커다란 짚더미가 있더랍니다. 모든 짚더미에 불이 붙습니다.

· 이 땅에서 큰 부자로 살고 남다른 명예를 누리며 부럽잖은 권세를 누린 어떤 사람의 짚더미는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불이 붙자 부귀영화가 모두 불에 타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재 밖에 없었습니다. 설사 그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요.

·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은 짚더미였지만 잠시 불이 붙는듯 했으나 그의 더미는 금은 보석으로 가득차 있어 심판의 불이 그것들을 사를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긴 보석 -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핍박을 받았던 금과 같은 믿음, 그의 최후의 타작 마당은 부요한 구원, 영광스런 구원이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짚더미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타작마당이라면 무엇이 후회스러울 것 같습니까? 그것은 모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았던 인생일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했어야 하는데...
·더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했는데...
·왜 그 사람과 화평하지 못했을까? 용서하고 살아야 했는데...
·좀 더 나누어 주며 살 수 있었는데...
·좀 더 참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께 더 많이 충성했어야 했는데...

모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한스러움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오늘이 당신 인생의 타작날이라면 당신은 어떤 열매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까요?
(류 영 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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