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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잡아 먹으라 (행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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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60-70년대에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세우기만 하면 교인들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로 들어오면서 성장의 가속도는 주춤하였고 급기야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오히려 교인의 수는 감소추세로 돌아섰습니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개신교 인구는 14만4천 명(1,6%)이 감소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6,25전쟁 당시 죽은 군인의 숫자인 137,899명보다 많은 수입니다. 반면, 가톨릭 인구는 2백19만5천 명(74,4%), 불교신자가 41만명(3,9%)로 증가했다는 기독교계로서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전체 종교인구가 2백37만3천 명으로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가톨릭의 증가율은 폭발적인 것으로 개신교인의 한 사람인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그럼 이런 결과가 찾아 왔을까요? 그 이유를 개신교 목회자들 스스로 대답하기를 대사회적인 위신추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비친 기독교는 말은 사랑을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너무 이기적이며 사회의 소외계층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데 어떤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여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배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의 편협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지금까지 다가가기를 꺼렸던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장벽역시 발견하게 하시고 이 벽을 넘어서 그동안 다가서지 못했던 사람들에로 나아가서 그들을 복음 안으로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9장32절부터 43절까지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복음 역사를 능력있게 감당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애니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또한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기도로 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자를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사방에 영향력을 끼치는 큰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범위는 유대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세계적인 복음의 일군으로 쓰시기 위해 넓은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편협한 유다이즘을 깨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절은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탈리야 부대의 백부장이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란 백명의 군인을 거느리는 장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군인이면서도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敬天愛人하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훌륭한 자였으나 복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심령에는 참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서 그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에 고넬료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의 종 가운데서 3명을 뽑아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로 보냈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육시 곧 정오가 되어서 베드로 사도가 기도하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가 있을 때였습니다. 예전에는 기도하라고 기도하라고 당부하여도 쿨쿨 잠을 자던 그였지만 이제는 시간에 맞춰 기도하는 사도로 변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침을 안 먹었는지 몹시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프니 기도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래층에서부터 솔솔 풍기는 맛있는 등심구이 냄새는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놀라운 사건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늘이 스르르 열리더니 큰 보자기 같은 것 하나가 네 귀가 줄에 매달려 공주에서 둥실둥실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짐승들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율법으로 먹지 말라고 한 짐승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지 못하는 짐승들을 율법에서 명시하였습니다. 되새김질도 하고 굽도 갈라진 소와 양, 염소 등은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않은 낙타나 사반, 토끼와 같은 짐승들, 반면 굽은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은 못하는 돼지와 같은 짐승들은 먹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물에서 사는 어류들도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오징어도 구약율법에 따르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새 중에도 독수리와 솔개와 매종류와 까마귀, 타조, 갈매기 올빼미, 부엉이, 따오기 황새, 박쥐와 같은 짐승들은 먹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곤충들도 아무 것이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날개가 있고 메뚜기와 같이 깡충깡충 뛰어 다닐 수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이나 배로 밀어 다니는 것, 여러 발을 가진 것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가증하여 먹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검조차도 만지게 되면 부정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육축과 부정하고 속된 것을 엄격하게 분리하여서 어릴 때부터 부정한 것은 멀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앞에 펼쳐진 보자기에는 이와 같이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 우글우글 하였습니다. 뱀이 머리를 들고 혀를 날름날름 거리고 있었고 돼지가 꿀꿀거리며 지네들이 꾸물꾸물, 박쥐가 퍼드득 퍼드득 날개 짓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마 평소에는 담력이 강하고 덩치가 큰 베드로도 순간 깜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보기에도 끔찍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니 베드로는 “주여 절대로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신은 그런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짐승들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하지 않았고 율법에서도 먹기를 금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정통 유대인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음식들은 속되고 더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거부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다시 한번 더 소리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리고 이런 일이 한번 더 있은 후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음식들을 하나님께서는 깨끗케 하셨다고 합니다. 즉 더 이상 속되고 부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은 먹어도 괜찮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부정한 것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이제 어떤 음식은 속되고 어떤 음식은 깨끗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구약시대에는 분명 못 먹는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먹지 못하는 음식들을 명시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별되며 거룩하고 고상하며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아무리 이방인들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음식을 같이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도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들을 이방인들이 먹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궁중음식을 거부한 것도 성경에서 금하는 음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더 이상 구약의 율법들은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음식을 가지고 속되고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속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식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의 구별 없이 아무 것이나 맛있게 먹으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너무 혐오스러운 것을, 몸에 좋지도 않은 것을 굳이 쫓아다니면서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심이 어찌 음식에 관한 문제이겠습니까?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 뱀탕도 먹고 돼지 삼겹살도 가끔씩 섭취하고 오징어 튀김도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자기에 있는 짐승들을 베드로로 하여금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한 것은 이제 이방인 세계로 가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교회로 맞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먹지 못하는 짐승들이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을 그들은 이처럼 속되고 깨끗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자신들은 그들과 구별된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받는 선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과 교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중에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이르기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행10:28,29)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이렇게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며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이런 오랜 전통과 관습은 교회지도자들인 사도들의 마음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은 온 세상 만민을 위한 것이고 세상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하였지만 사도들은 그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유대아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지가 벌써 10정도가 흘렀지만 아직 복음은 이방세계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성도들과 빌립 등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지만 아직 유대인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빨리 복음이 확산되고 이방세계로 뻗어 나가야 되는데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갇힐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하여서 베드로의 마음의 벽을 먼저 부수시고자 한 것입니다. 베드로야말로 초대교회의 지도자중 지도자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정통유대인이요, 지도자인 베드로가 변화되어야 그가 유대교회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에 열심을 내도록 방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지만(행8:40, 행21:8) 하나님께서는 굳이 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베드로를 고넬료의 가정에 초청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종들이 자신을 찾아오고 또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성령이 오순절 날 자신들에게 임했던 것처럼 그들 위에 임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하는 외모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일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게 식사를 한것에 대해서 비판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물로 주셨으니 자신은 하나님을 막을 수 없음을 역설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하나님께서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또 예루살렘교회의 고백처럼 복음은 세상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한국교회, 한국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서 오늘도 복음은 뻗어가야 합니다. 어디에 살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한국사람,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인도사람, 동남아 사람, 중동사람, 아프리카 사람, 유럽사람 등의 민족의 구별이 없습니다.
또 복음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부할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높은 지위의 사람/낮은 사람, 배운 사람/교육받지 못한 사람, 많이 가진 사람/가난한 사람 등 신분 지위고하,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는 것이 복음이요 교회입니다. 나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사람, 성격이 틀린 사람, 직업이 다른 사람, 심지어는 무속인, 전과자, 마약중독자, 에이즈환자 등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지 복음에서 배제될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으며 교회는 이 모든 사람을 하나 되게 합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있는 장벽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문화적인 거리감, 생활방식, 습관과 스타일, 개성, 취미, 취향, 선입관, 편견, 이기심, 의심 등의 벽으로 인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게 하는 것에서 제외하며 복음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을 그어서 어떤 사람을 밖으로 내 몹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영원한 것에 갈급하며 진리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꺼야, 전해도 믿지 않을 꺼야, 괜히 교회만 오염시켜’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믿고 더 교회를 유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 때문에 사람에게 다가서지 못하는지요 “저 사람은 너무 인상이 험악하게 생겼어, 저 애들은 머리도 옷도 너무 튀니 아마 복음을 우습게 여길 걸, 이 사람은 담배를 너무 피우니 입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이 사람은 명문대를 나온 사람인데 내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까? 저 사람은 너무 계산적이고 돈 밖에 모른 사람인데 교회, 예수님 이런 것은 관심없어 해, 아니면 너무 늙었어, 아니면 너무 철딱성이가 없어” 하며 컫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다가서지 못하지는 않는지요?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 후에 승동교회로 이어진 서울 곤당골교회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던 박성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사촌인 이재선과 더불어 승동교회 초대 장로로 피선된 사람으로서 당시 한국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성춘은 신분이 백정이었습니다. 당시 백정은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에서조차 많은 차별과 수모를 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상민 이상의 사람들만 모이고 있었기 때문에 백정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그가 예수를 믿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전염병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났을 때호열자라고 불리는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이 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갈 때 박성춘도 콜레라에 걸렸습니다. 그가 앓아 죽어가고 있을 때 봉출이라는 그의 아들은 곤당골교회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던 미국인 무어 선교사(Samuel F. Moore)는 교인들이 몇 안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비록 백정의 아들이었지만 봉출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콜레라에 걸려서 앓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의료 선교사로 일하면서 주일에는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는 친구 애비슨 박사에게 박성춘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애비슨 박사는 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 박사가 세운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원장인과 동시에 고종의 건강을 검진하는 어의(御醫)라는 높은 직위에 있었습니다. 애비슨 박사는 무어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박성춘을 왕진 갔습니다. 당시로서는 백정 마을에 임금이 하사한 가마를 타고 어의가 찾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비슨은 하루도 아니고 몇 달에 걸쳐 박성춘을 찾아갔고, 이런 지극정성의 결과 박성춘의 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육신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신분차별로 원한과 증오심으로 찌들려있던 박성춘의 마음도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이 길래 자기와 같은 천한 백정을 치료해 주기 위해 어의가 나서서 이렇게 정성을 다할까 궁금해 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회심 후 그는 열정적으로 전도에 나서서 서울, 수원 등지에서 수백 명의 백정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정들의 인권회복 운동인 소위 "형평운동"을 전개하여서 백정의 지위를 일반 평민의 지위로 공식적으로 회복시켰습니다.

가나한 사람, 병든 사람, 세리와 죄인 등 유대인들이 꺼려했던 사람들을 받아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신분의 구별없이 한 천한 인생에게 나아갔던 한 벽안(碧眼)의 선교사를 통해 한국 개화기의 중요한 지도자 한 사람이 탄생했으며, 수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또한 형평운동이라는 개화기 최초의 인권 회복 운동이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분의 벽을 넘어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한 영혼이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수 많은 열매가 맺힌 것처럼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직업, 물질, 외모 할벌, 처한 환경의 벽을 허물고 스스로 저 사람은 안될꺼야라며 그었던 선을 걷어 치우고 모든 사람에게 나아 갈 때 주께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주의 말씀은 오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취향과 선입견, 편견과 스타일을 넘어서라고 합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한다면 깨트려 버리라고 합니다. 어쩌면 아직도 박성춘과 같이 자신과 같은 사람은 교회에 나갈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것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사랑하며 찾아갈 때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렇게 적극성을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니 잡아 먹으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왕성한 식욕을 가져야 합니다. 음식은 골라서 먹을 지언정 복음은 사람을 골라서 전해주고 전해주지 못할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문화가 다르며 언어가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른 이방 족속들에게까지도 나아가서 복음안에서 모든 허물을 헐고 하나가 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으며 주께로 돌아오기를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나 안에 묻어두고 우리 교회 안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내 이웃에게로 내 직장에게로 세계만방에게로 퍼져가도록 먼저 우리 가슴이 열려지게 합시다. 이는 우리가 베드로에게 하셨던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세상 만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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