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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와 잔칫집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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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시절에 설교학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요리 솜씨가 있는 여인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무 하나 가지고 열두 가지 맛있는 음식을 해내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온갖 재료를 갖다 주어도 한 가지 요리도 제대로 못한다. 목사는 성경 본문 한 곳을 가지고 여러 편의 설교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저도 지금 설교 세미나 강사로 많이 다니는데 그렇게 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4주는 오늘 이 말씀과 똑같은 본문으로, 제가 네번 설교를 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네 번 설교를 다 들어야 본문의 내용을 알게 되어 있으니까 빠지지 마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해 졌습니다. 왜 유명해 졌습니까? 기적이 창출이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유명해 졌습니다. 물을 가지고 아무 화학적 작업이 없이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유명한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기적 창출 가운데서 첫 번째 기적이라고 해서 또 유명해 졌습니다. 또, 예수님과 몇 명의 제자들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은 축하객이었다고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도 지금 우리들과 같이 이웃 마을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잔칫집에 청첩을 받아가지고 축하객으로 가셨다는 휴머니티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낱말이 본문에 하나 나타났습니다. 다른 모든 기적 창출은 ‘이적’, ‘기사’ 혹은 ‘기적’ 이런 말로 표현이 되었는데, 오늘 이 말씀은 ‘표적’이라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이 낱말의 의미는 사건은 사건으로 역사성을 지니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사건보다 그 사건 속에 숨어있는 영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때 ‘표적’이라고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 사건이라면 그게 무슨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게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대중 앞에서 첫 번 표적을 이렇게 발표하셨는데, 그 의미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첫날 말씀의 의미는 교회 성격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잔칫집과 같은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잔칫집 같이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면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은 나사렛 동네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에 가나 마을이라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가나 마을까지 걸어서 두 시간정도 걸립니다. 가나 마을은 나사렛보다도 더 조그만 시골의 산골짜기 마을에 불과한데 그 동네 어느 집의 아들, 딸 결혼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이 결혼식에 청함을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때 제자 몇 사람이 초대 손님이 되어서 결혼식 축하객으로 그 집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 집에 가시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는데, 그날 결혼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제이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데 2,00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그렇습니다.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첫째, 이 잔칫집에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초대를 받아간 것이 친척 관계를 말해줍니다. 마리아도 갔습니다. 둘째,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초대 손님이면 모자라는 것도 모르고 모자란다고 해서 그렇게 애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걱정을 하고 나섭니다. “이거, 야단났다! 손님들은 잔뜩 왔는데 대접할 술이 다 떨어졌으니, 이거 집안 망신 아닌가?” 마리아는 아마도 동생이나 언니쯤 되는 집의 행사였기 때문에 보통 손님과는 달리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서두르게 되고, 그 문제는 급기야 예수님과 의논하기에 이르게 되는 이런 정황으로 봐서 보통 관계가 아닌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었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정확합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성격이 좀 지독하고 특별히 돈에 대해서 아주 구두쇠입니다. 성경에도‘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지라’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낭비를 절대로 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돈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세상이 다 평가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모두 읽어보셨잖아요? 돈을 지독하게 좋아하는 유대인을 세계에 고발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엄청난 낭비성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잔치 문화입니다. 전통적으로 결혼식을 보통 7일정도 합니다. 이때는 그렇게 돈에 대해서 구두쇠이고 그렇게 애착이 많은 사람들도 있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실컷 먹고, 놀고, 춤추고, 아깝지 않게 쓰고 즐기는 문화! 요즘에는 문화가 좀 달라졌겠지만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 살아가는 모든 포인트가 마치 그날을 위해 있는 것처럼 그날을 위해서 준비된 것처럼 아무리 가난하고 못살아도 잔치 하나만은 아주 풍성하게 합니다. 그게 유대인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이 집도 지금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이렇게 잔치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잔칫집에는 두 가지만 있으면 즐겁습니다. 음식이 풍부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면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올수록 즐거운 장소가 됩니다. 지금 이 집은 아주 즐거운 비명이 찾아왔는데 준비한 음식이 모자랄 만큼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술이 다 떨어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요란스러운 잔칫집과 예수님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예수님이 어머니와 또 제자들까지 대동하여 그 집에 참석하셨으며 잠깐 계시다가 식사 한번 하고 가실 것이지 잔치의 파장 시간이 되어서 음식이 모자랄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아니하고 끝까지 계셨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이 표적 사건이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행하여질 만큼 그 잔칫집이 비중이 큰 집인가? 바로 거기에 이 표적, 기독교 예수의 복음의 진리성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그 잔치를 끝까지 참석하고 계신 뜻은 기독교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유대 나라의 종교는 유대교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는 율법주의라는 변질된 신앙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데 필요하지도 아니한 이상한 조건들을 수없이 만들어놓고 인간을 종교의 노예로 전략시켜 버렸습니다. 타락한 종교, 변질된 종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부터 그 종교와 싸움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종교는 마지막으로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있습니다. 금욕주의, 고행주의로 가고 싶어 합니다. 종교가 금욕주의나 고행주의로 떨어지면 정상적인 인간 삶을 배격하는 성격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가들고, 시집가고, 포도주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은 죄악시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지도 아니하시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고,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충성하는 듯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주운동을 했잖아요? 그것은 이 나라에 그것이 너무나도 많은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금주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포도주는 종교적 의미로 많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그렇게 많은 이적 사건 가운데 첫 번 기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즐겁게 마시게 하는 그런 일을 하셨고 마지막 만찬도 포도주로 하신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 선고를 받으신 죄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모독죄’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육신(Incarnation) 사건으로 임하셨다.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있잖아요? 모든 성경은 예수를 ‘나타나는 하나님’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종교인들은 이 나타나는 하나님, 예언된 메시아가 왔는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나님을 죽이는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이 시집가고 장가들고 잔치를 하며 즐겁게 사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깨어질까봐 오늘 포도주까지 만들어서 그 잔치를 연장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잖아요? 우리가 지금 배격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마귀의 역사이지, 세상 자체를 무시하거나 배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이 최고의 솜씨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어놓으시고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느냐 하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그랬습니다. 아들을 내어주는데까지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대통령이 선서를 하고 취임을 할 때 국민들에게 처음 하는 연설은 중요합니다. 그의 정치 철학과 정책이 담겨있어서 “나는 앞으로 이렇게 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다.” 해마다 연초에 연두교서를 대통령이 발표를 하는데 “금년 한해는 우리 국가가 이렇게 국정을 펴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첫 번 이적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망쳐버린 율법주의를 개혁해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잔칫집 초대를 받아 참석하셨는데, 지금 예수님의 인간성 특징은 기쁨에 기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미래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제 후로는 이렇게 앞에 있는 즐거움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힘 있게 가라는 이것이 기독교의 성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밝게 보려는 미래 지향적 종교입니다. 금욕이라든가 고행주의라든가 이런 것은 절대 강조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그러니까 당시 금욕주의자들, 고행주의자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잘한다고 하는 율법을 정해놓고 지키려고 고행스럽게 참고 있었기 때문에 먹는 예수가 미웠던 것입니다. 나를 선별해서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죄 지은 사람과의 거리를 될 수 있는 한 멀리 두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율법주의 사상 때문에 죄인과 함께 다니는 예수가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먹어도 괜찮은 것을 안 먹고 기를 쓰는 사람을 기독교 복음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억지를 부리고 혼자 독신으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잘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 삶을 기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멀리한다는 뜻은 죄를 멀리한다는 의미이지 정상적인 인간의 삶과 그 과정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고 보는 것이 헬라 철학의 이원론 사상이었단 말입니다. 그 사상이 기독교에도 많이 침투해서 그런 관점에서 복음서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잔칫집에 초대를 받아 어머니와 함께 제자 몇 사람과 두 시간 정도 산 고갯길을 걸어서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러 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휴머니티를 발견하고, 그 왁자지껄한 잔칫집의 북새통에 마당 어느 한쪽 구석에 군중들과 함께 앉아서 잔치 음식을 나눈 예수님의 인간성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한동안 세계는 어느 나라나 테레사 수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가 살았던 모습을 방영하면서 매스컴마다 앞을 다투어서 말했습니다. ‘20세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이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했나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무슨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서 세상을 행복하게 했다든지, 그가 무슨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서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힘든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사람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지저분하고 문명의 혜택이 없이 구질구질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냄새나고, 무식하고, 쳐다보기조차 힘든 그 현장에 그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를 훌륭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가 무슨 세계적인 일을 크게 했느냐? 그가 한 일은 이렇습니다. 얼굴이 너무 더러운 아이들을 개울에 데리고 가서 그 아이들의 얼굴에 비누칠을 해서 다 닦아주고 병들어 누워있는 환자들을 끊임없이 돌봐주었습니다. 그게 무슨 세계적인 큰일입니까? 그런데 왜 20세기에 가장 훌륭하게 그를 평가했는가? 그가 그 현장에 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인도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하늘나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 선교를 하며 그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일을 한 것은 뭐죠? 그가 무슨 종합병원을 지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많이 치료한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권 운동을 위해서 노력한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정글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살고 있는 모습대로 자기도 살면서 끝까지 거기서 함께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해 진 겁니다. 독일의 신학생들에게 슈바이처 박사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슈바이처가 나쁘다고 교수가 말했다가 그 교수는 일주일 만에 학교에서 쫓겨난 일이 있습니다. ꡐ이 세상에 가장 참 빛을 전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ꡑ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슈바이처 박사가 있던 자리는 찾아가 볼 수가 없습니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함께 있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신랑, 신부가 시집가고 장가드는 그 현장, 즉 인간 삶에 함께 계신 겁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기 위해서 나도 함께 기뻐해 주고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질서이며 축복이고 이것이 인격적 동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 결혼식 할 때 대통령이 그 어머니와 각료들을 데리고 참석했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아마 그랬다면 그 자리에는 신랑, 신부는 저리 제쳐놓고 대통령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야단을 칠겁니다. 그 집에서는 평생 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살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기쁨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거 아니잖아요? 인간 삶의 결혼 제도가 먹고 마시고 기뻐하는 축제 인생을 예수님은 인정하시는 겁니다.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지금 개혁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 선생의 삶을 보세요. 그는 사람들을 보고 ꡒ항상 기뻐하라ꡓ아니, 사람이 슬플 때도 있지 어떻게 그렇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계속해서 말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독교는 기뻐하는 잔칫집 종교로 축제적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잔칫집과 성격이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열 처녀 비유 중 신랑의 역할을 예수님으로 해석하잖아요? 우리는 교회 올 때마다 신랑을 맞으러 오는 신부와 같은 존재라 하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손에 들고 나갈 등불 빛이 밝으뇨?” 하면서 찬송하면서 신랑을 맞이하는 그런 기분으로 우리가 교회에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러 가는 일은 마치 시집가는 날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가는 날은 면사포 열러 가는 날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는 나쁜 일이 있는데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성경을 봅시다. 4복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수난사입니다. 피난가시고, 주리시고, 박해받으시고, 매 맞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런데 그 기록을 가르쳐서 복음서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 복된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인생관이란 곤고한 삶의 현장에서도 복음 안에 감추어진 비밀한 은혜를 생각하고 노래하고 기뻐하는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잔칫집과 같습니다. 그러한 공동체가 곧 교회이며 그 잔칫날이 안식일이며 초대 손님은 교인들이요 포도주는 영적음식,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이 잔칫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피차 노력하셔야 됩니다. 아이들한테도 이 주일날은 너무 “공부, 공부” 하지 마세요! 아이들이 주일을 기다릴 수 있도록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제가 먼저 있던 교회와 갈보리교회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주일 저녁 예배는 교회에서 모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요즘 문화를 한번 보세요. 아이들과 부모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중․고등학생만 해도 도시락 두개 싸가지고 학교에 가서 밤에 언제 왔는지 갔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무슨 즐거운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생들도 학교 끝나고 뭔가는 또 해야 하잖아요? 피아노 가야지요, 태권도 배우러 가야지요, 음악학원 가야지요… 아이들과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 년 내내 그렇게 살아가니까 유일하게 시간이 있는 주일 저녁마다 교회가 온갖 프로그램을 한다며 교회로 소집을 한다면 이 가족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문화 속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주일만은 잔칫집에 오도록 온 가족이 함께 와서 예배를 드리고 저녁 시간은 온 가족이 모여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같이 오락도 하고, 가족끼리 함께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어디 가기도 하고… 그래야 아이들이 즐겁게 주일을 기다릴 거 아닙니까? 부탁하겠습니다. 여선교회, 남선교회, 각 봉사회는 주일날 회의도 짧게 하세요. 회의가 길수록 시험만 생기고 열매가 없어요. 제가 예일대학 기숙사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그 한인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의 사모님이 화가 나셨어요. 왜 화가 났느냐 하면, 교인 100명도 안 되는 조그만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가 끝나면 집에 갈 것이지 모여서 회의를 하니까 목사님이 그 회의에 참석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예배 끝나고 5~6시간씩 회의를 하니 사모님은 할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모님이 하도 화가 나서 제직회의 하는 곳에 들어가셨어요. 담임 목사님을 보고 “빨리 나와! 빨리 나오란 말이야! 100명도 안 되는 교회에서 나 혼자 결정해도 1시간이면 다하겠다. 뭔 할 일이 많다고 하는 일도 없으면서 모여 앉아서 무슨 얘기가 이렇게 많으냐?” 하시면서 목사님을 데리고 나갔어요. 그러니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 교회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맞다. 날마다 자기 속에 있는 얘기, 시시한 얘기를 하느라고 온통 시간을 끌고 나중에 결정한 거 보면 밥 먹은 거 밖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그런 일을 하면서 무슨 5시간, 6시간씩 계속 회의를 길게 했다. 사모님 말씀이 옳다. 우리가 이 귀중한 시간에 이민 와서 살면서 안건도 없이 피차 말다툼 하면서 몇 시간씩 시간만 끌었다.” 그 후로 해결이 되었어요. 제가 그 사모님을 한번 뵌 적이 있어요. “앞으로 회의 길게 하면 이 교회 떠나요. 뭔 놈의 목회를 회의하는데 다 뺏기고…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지 회의만 길게 해요?” 그것 때문에 해결이 되었어요.

주일날은 즐거워야 합니다. 기뻐야 합니다. 축제 인생, 즐겁게 사는 인생! 예수님이 그것을 축하하시는 겁니다. 가능한 대로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될 수만 있으면 싸우며 살고 가능한대로 불평하며 살고 지극히 외롭게 살자.” 기독교는 이런 금욕주의, 극기주의,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즐거운 겁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고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즐거운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쁜 겁니다. 바울은 기쁜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기뻐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혼자 살고, 돈도 없고, 나그네이고, 핍박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축제 속에 살았습니다. 의로움이 기쁘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기쁘고, 핍박 받을 때 하늘의 상급을 생각하면서 더욱 기쁘고…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해마다 남가주 캘리포니아 은퇴 목사님들이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총회를 했습니다. 20년 이상 제가 도와드리고 왔는데,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들이 남가주 캘리포니아에 얼마나 많아요? 우리가 큰 버스를 대절해서 다 모셔다 드리고, 모셔오고 집사님들이 나오셔서 식사 잘 만들어서 잘 대접했습니다. 저를 가르치신 은사 목사님, 또 제게 세례 주신 목사님도 오시고 모두 선배들로 은퇴하셔서 말년을 보내시는 주의 종들을 해마다 저희가 잘 모시고 대우를 해드렸는데, 때마다 설교는 꼭 저더러 하라고 하십니다. “어른들이 오시는데 왜 설교를 저더러 하라고 하십니까?” “네가 안하고 우리끼리 하면 싸운다! 네가 해라! 네가 하면 말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 은사이신 목사님이 절보고 “이 목사! 목회하기 힘드냐? 괴로우냐?” 물어보세요. “그건 은사님께서 다 경험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말한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께서 넌 목사 안 되면 벌 받아 죽는다고 항상 말씀하셔서 그게 무서워서 할 수 없이 목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평생 불평하면서 목회를 했었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이 목회라는 게 할 짓이냐? 뭔 불평과 불만이 그렇게 많고 그 많은 사람의 비위를 내가 다 맞춰야 되고… 내가 마누라 한 사람 비위 맞추면 되지 이 많은 사람의 비위를 다 맞춰야 되나? 그러나 안하면 벌 받아 죽을 것 같고 그래서 은퇴할 날만 기다렸다. 지금은 은퇴했다.” “그래서 좋으십니까?” “내가 그 말 하려고 너한테 말하는 것이다. 은퇴한 그 이튿날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던 일이 목회였구나! 나는 오늘부터 뭘 하나? 오라는데 하나도 없고 오라는데 없으니까 갈 때도 없고 이거 심심해서 어떻게 사나? 목회가 그렇게 즐겁고 좋았던 것을 내가 평생 불평하면서 살았구나. 나 이 말 아무한테도 안했다. 내가 사랑하는 후배니까 해준다. 목회가 제일 즐거운 줄 알아라.” 그러셨습니다. 맞습니다. 괴로움이 오히려 기쁨이 될 때가 많잖아요? 이런 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세상은 보는 눈의 안경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고, 생각에 따라 즐겁고 괴로움이 생깁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입에 불평, 불만이 붙어 다니는 사람과 하나님이 무슨 역사를 하시죠? 안하십니다. 성경에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인생을 잔칫집같이 즐겁게 만든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창조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잔칫집 인생을 축복하시러 고행주의와 금욕주의에 떨어진 그 사회를 개혁하시고 “내가 참석하겠다.” 나사렛에서 산 고개를 두 시간 걸어서 가나까지 오셔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인간의 즐거운 삶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무엇을 도와줄까?”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내가 만들어주지! 즐겁게 보내라. 신랑, 신부여!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쁨을 누리라.” 교회의 성격은 잔칫집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과 교회가 그러한 주님의 축복 속에 있는 잔칫집의 즐거움이 여러분 인생에 주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의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저희들이 생각하였사오니 이 말씀에 담겨진 인생들의 축제의 일생을 축복하시고 인정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는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속에서 모두의 삶이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발견하는 역설적 삶으로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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