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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암 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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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교 일학년 시절에 성경을 읽으면서 매우 의아스럽게 여기고 충격을 받았던 말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아모스 5장에 나오는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라는 구절들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여호와의 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뭔가 신자로서는 중요한 날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당신 이름이 들어가는 그 날을 사모하는 자들을 두고 오히려 저주하고 계셨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와 성회를 지키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니, 저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부의 동년배 친구 한 명에게 이 구절을 보여 주면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친구도 "참, 성경에서 이런 말씀은..."하고 말꼬리를 흐리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그 친구나 저나 마치 성경 속에서 무슨 모순되는 말씀을 발견이나 한 듯한 기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대학부의 어느 선배 누님에게 다시 이 성경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은 목사 사모님이 되신 분인데, 그 당시 대학부 내에서도 신앙심 좋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이 선배님께서도 처음에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가 집에 가서 자세히 읽어보고 다시 대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주일에 와서 하시는 말씀이, "앞뒤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것이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 '여호와의 날'이나 절기 그 자체를 나쁘다고 저주하는 말씀이 아닌 것을 알게 될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조언을 받고도, 정말 이 구절이 조금도 무슨 문제나 모순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때 저의 성경 말씀 읽고 깨닫는 수준이 얼마나 얕고 유치했는지 돌이켜 보면 그저 창피하고 쓴 웃음이 날 뿐입니다.
  정말 그 선배의 말대로, 조금 난해해 보이는 성경 구절들이라 해도 그 전후의 문맥을 잘 파악하면서 이해하면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쓰시는 것은 순전히 북조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고 있던 형식적인 신앙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여호와의 날'을 기다린다느니 혹은 '절기와 성회와 제사'들을 지킨다느니 하는 따위의 겉모양 신앙만 남아 있었을 뿐, 내면적으로는 전혀 참된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불신 이방민족도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성이 그처럼 행하는 것을 두고 정말 견디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면적으로만 그럴듯하게 내세우던 신앙생활들이란 것을 두고 그처럼 큰 분노와 무서운 저주를 발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선민이란 이름 가지고도 그처럼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신앙생활을 했듯이, 오늘날 역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무리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비록 외면적으로는 기독교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미워하시고 저주하시는 가짜 기독교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함께 깨닫고자 합니다.

  1. 기복주의 기독교는 실상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대상입니다.

  본문 18절에서 20절 말씀에 "18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요엘 1장 15절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전능자께서 '멸망시키는 날' 특히 이방의 악한 세력을 멸하시는 무서운 날을 묘사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반대로 해방의 날이요 따라서 희망의 날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 등의 외세에 눌려 고통당하고 있던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그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을 "사모"하며 기다린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쁨과 축복의 날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았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북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생활 현실은 그 '여호와의 날'을 기다릴만한 처지가 전혀 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의 날에 심판받을 자들 중에 바로 그들 자신이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도대체 왜 그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고 야단들이냐? 그 날은 너희 자신들에게도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을 가져다 줄 날이 될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에게 어느 정도의 화를 가져다 줄 날이었습니까?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라고 했습니다.
  사자 만난 사람이 그 화를 피하려고 죽어라고 도망쳐서 겨우 벗어났나 하고 헐떡거리고 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또 곰과 맞부딪히게 되는 형국이었습니다.
  즉 '엎친 데 덮친 격'이요 설상가상의 환난이 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사자와 곰에게 쫓기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겨우 자기 집에까지 도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벽에 기대는 순간 바로 그 벽틈에서 나온 뱀에게 물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도무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도록 그 해당자에게 정확히 내려지고야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20절 말씀대로 그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어둡고 빛이 없는 날이 되며 캄캄해서 한 줄기 빛도 없는 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2장 11절 말씀에 보면 바로 그 여호와의 날을 가리켜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고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높아지시는 날'이지 '사람의 제 욕심대로 다 이루어지는 날'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여호와의 날'을 그저 다 자기네들 원하는 대로, 자기네들 좋을 대로 이루어질 소원성취의 날로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여호와의 날'이란 것이 자기네들의 모든 현실 문제를 하루아침에 무조건 해결해줄 무슨 도깨비 방망이 같은 날이 될 것으로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믿으면 구원얻는다.'라는 복음보다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소리에만 더욱 귀가 솔깃해지는 소위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백보좌 심판날에 자기 자신이 심판받지 않기 위하여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보다는 현실생활에서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기독신자가 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을 '기복(祈福)종교'로 오해하고 악용하고 있는 무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상은 한갓 무당 정도로 끌어내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경외하며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는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예수란 이름만 입술로 들먹이면 당연히 복 바가지가 자기 앞에 뚝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당신의 백성'이라고 인정하고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처럼 복 방망이만을 막연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방망이로 임하실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기독교의 탈만 쓰고 있지 실상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무당종교와 꼭 같음을 깨닫고, 먼저 자신의 영혼이 잘 될 때 나머지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범사를 절로 형통케 해주시는 진짜 '축복종교'의 삶을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용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있는 무리입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에 기록하기를 "21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고 기록했습니다.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주요 절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회"란 그런 절기나 안식일에 성전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노래 소리"와 "비파 소리"란 물론 사회에서 대중가요 따위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서 회중찬송을 부르거나 찬양대의 찬양을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번제나 소제"와 "희생의 화목제"는 바로 그런 성회를 모였을 때 하나님께 바쳤던 여러 가지 제사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은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명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예배생활의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라고, 정말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예배 자체를 싫어하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께 어떻게 예배해야 할지를 성경에서 그처럼 상세하게 가르쳐놓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쉽게 오해될 수 있는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던 예배 자체가 참된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다윗 왕조를 배신하고 북조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그 첫 왕이 되었을 떄, 그는 자기 백성들이 남조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에 가고 싶어 하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적 형식만 남조 유다의 여호와 종교와 꼭 같이 베껴낸 새 종교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써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정치적으로 모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의 바로 그와 같은 정치적 예배, 어용종교를 혐오하시면서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하수 같이"란 말은 '강물 같이'라는 뜻입니다.
  공의로운 법이 아무런 제재나 방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실현되어지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허울 좋은 신앙구호와 빛깔만 그럴 듯한 종교행사가 실제로는 순전히 북조 이스라엘의 불법적 독재와 백성들의 압제에 오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목적이 무슨 사회정의 구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는 구절이 사실 이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예배드리는 것보다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훨씬 더 기뻐한다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는 이 문단의 말씀이 '예배생활보다 사회정의 구현이 더 중요하다.'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그 예배라는 것이 진실한 예배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런 예배드린다는 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사회에 불법이 성행하고 있음을 두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가지고 '기독교의 참된 정신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보다도 사회에 뛰어들어 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있다.'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곡해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사회정의 구현은 물론 옳은 일이요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복음도 아니요 최종목표도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옛날 북조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들이 그랬듯이 오늘날 역시 기독교라는 이름을 불법적인 정치에 악용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가장 증오하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인정해 주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북한 공산당이 허락해 주는 봉수교회라는 것이 존재하고 중국 공산당이 지지해 주는 삼자교회라는 것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정말 조금만 지각이 있는 신자라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김정일이 기꺼이 만나 주는 목사, 김정일과 만나고 악수하고 무슨 민족 통일을 위해 기도해 주고 왔다는 것을 감격스러워하고 자랑하는 목사들을 볼 때, 정말 그 정체의 본성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 교회나 목사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명백한 어용교회요 어용목사일 따름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실상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북한 인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정치범들을 학대하는 일을 간접적으로 승인해주고 도와주는 공범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위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는 기독교가 찾아내는 불법이란 것이 사실 어떤 것들입니까?
  그네들이 고발하는 불법이란 것은 그래도 국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래도 현재 전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모국이요 보루인 미국을 두고 무슨 제국주의니 하는 따위의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비판들뿐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이나 미국의 정치라고 비판받을 불법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소위 기독교 사회정의주의자들은 왜 진짜로 극악한 불법과 압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까?
  자유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그처럼 들추어낼 것이 많은 사람들이, 왜 북한의 공산정권이 지하교회 신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탈북자 선교 활동하는 목사를 납치해 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용한 것입니까?
  반미운동에 대해서는 핏대를 올리면서 데모대에 앞장서는 자들이, 왜 공산국가나 이슬람 국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 탄압이나 국제적 테러리스트들의 만행은 조금도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이라고 옹호해주는 것입니까?

  정말 절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압제와 고통을 주고 있는 그 진짜 부정에 대해서는 그처럼 방관 아니 묵인하면서도 입으로는 '사회 정의'를 그처럼 크게 부르짖는 기독교 - 정말 이상한 기독신자요 이상한 목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바로 그처럼 기독교라는 허울을 쓰고 세상의 공법과 정의를 실상은 파괴하고 있는 '어용기독교'야말로 하나님께서 지극히 미워하시고 혐오하시는 대상입니다.
  그런 어용목사들이 설교하는 예배, 그런 정치꾼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정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멸시하시는 성회'인 것을 깨닫고, 실로 우리의 영원한 주권자는 오직 여호와 한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왕국은 오직 교회뿐임을 고백하고 충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종교통합운동의 기독교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결국 저주받을 우상종교입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 "25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악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우선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 사십 년 생활하는 동안에도 성막을 통하여 "희생과 소제물" 등의 제사를 드렸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을 지고 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식굿'은 몰록이라는 우상을 섬기던 산당을 가리키는 말이며, '기윤'이란 어떤 별신의 이름입니다.
  26하반절에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이 그 신앙생활의 순수성을 잃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조상들과 꼭 같은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실상은 완전히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매일같이 고달픈 광야생활 중이었지만 성막과 법궤를 짊어지고 다니기까지 해서라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북조 이스라엘은 훨씬 편한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생활을 하면서도 오히려 우상 산당에서 살며 우상 별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종교생활에도 그 조상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만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순수한 유일신 신앙에서 떠나서 '하나님과 우상을 섞어서' 섬기는 혼합종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종교라고 정곡을 찔러 지적하셨습니다.

  원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스스로 자존하시고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지만, 우상종교는 항상 '사람이 만들어낸' 신을 섬깁니다.
  또한 여호와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있는 것인 반면, 우상종교는 항상 '사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은 사용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우상종교가 섞이기 되면 이미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상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일단 북조 이스라엘의 신앙이란 것이 그처럼 혼합종교가 되었을 때, 그들의 미래에는 그들이 "다메섹 밖" 즉 앗수르 제국 산하의 먼 이국땅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될 저주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그런 멸망의 때가 와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그 우상신을 '짊어지고' 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 꼭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타종교의 이름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기독교라는 이름 가지고도 얼마든지 우상숭배를 할 수 있습니다.
  간판은 기독교라고 달아놓고서도,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대신에 '어떤 신이든지 결국은 다 같은 한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종교통합운동인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니 이미 압도적 다수의 주류가 되어버린 '기독교 안의 우상종교'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신앙생활에도 진리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만이 절대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말 대신에, '성경이 물론 제일 중요한 규범이지만 그 외에도 교회의 전통과 추기경들의 공회와 교황의 가르침도 신앙생활의 규범이 된다.'라고 할 때, 이미 그것은 '사람이 만든' 우상종교가 됩니다.
  '교회중심의 신앙생활' 대신에 '교회가 사람들을 섬기기(serve) 위하여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성막과 법궤를 짊어지고 가는' 신앙이 아니라 '교회 위에 사람이 올라타고 가는' 인본주의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바로 이런 자유주의적이요 인본주의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시키려 하는 움직임이 실로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로교에서도 보수교단과 진보교단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벌써부터 추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소위 '강단교류'라는 것을 시작하고 정기적인 모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토는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합치자.'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리 문제는 따지지 말고 무조건 합치자.'라고 합니다.
  아니, 서로 믿는 진리가 다른데 어떻게 합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 십자가 믿는 교회와 믿지 않는 교회가 이 지상에서 아무리 합쳐본들 나중에는 어차피 구원과 영벌로 갈라질 텐데 왜 굳이 합쳐야만 된다는 소리입니까?
  천당 믿는 목사와 믿지 않는 목사가 이 지상교회에서 아무리 교단을 하나로 만들어본들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한쪽은 '양의 무리' 가운데, 한쪽은 '염소의 무리' 가운데로 쫙 나누실 것이 틀림없는데, 지금 이 세상에서 한 예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짓입니까?
  이처럼 기독교란 명칭을 가지고 오히려 참 하나님 여호와를 떠난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혼합종교를 장려하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제일차 심판의 대상일 뿐인 줄을 깨닫고, 오직 참 복음 안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세워놓으신 한 우주적교회 안에서 진정 하나가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속담에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실상은 기독교를 그렇게 망신시키는 무리들이 바로 기복주의 기독교요 어용기독교요 종교혼합주의 기독교입니다.
  차라리 다른 종교의 이름으로 하든지, 다른 신의 이름을 두고 한다면 오히려 분명하기라도 할 터인데, 이런 가짜 노릇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어엿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노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니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 족속아'라고 크게 진노하시며 무섭게 저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 때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서 13장 11절에 보면 "11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했습니다.
  바로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인데,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기독교를 무당종교로, 어용종교로 전락시키고 혼합우상종교로 변질시키는 이 거짓 선지자들은 겉보기에는 '새끼양'처럼 꼭 같은 기독교로 보이지만 실상은 '용처럼 말하는' 사단의 앞잡이들인 것을 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함께 기다린다고 하는 자들, '절기와 성회'를 우리와 꼭 같이 지키는 자들, 교회 간판을 걸어놓고 겉보기에는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제사'를 드리는 자들 중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짜 기독교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맹렬히 설치면서 할 수만 있다면 택자까지도 미혹하려 하는 것을 깨닫고, 오직 철두철미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성경만을 따르며 교회중심으로만 섬기는 참된 신앙생활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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