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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밥 보다 중요한 것 (마 1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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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심방을 갔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리내 아파트에 사는 어느 주부가 아이를 업고 아래층 사는 이웃에게 자기 아이 못 봤냐고 찾더랍니다. 아이 업고 3 년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그런 엄마가 있습니다.

건망증 경험담을 말하자면 누구나 수북합니다. 저도 가지고 나갈 물건을 신발장 앞에 두고도 그냥 나오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나이 들면서 건망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건망증과 치매는 관련이 없다니 위로가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제자들의 건망증이 나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후 남긴 빵을 미처 챙기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떠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들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지력으로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고 그들에게 걸려들면 쉽게 농락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들과 맞서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적대자들과 맞서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경계심이 강화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배를 타면서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침 예수님 입에서 누룩 이야기가 나오자 겁이 덜꺽 났습니다. 누룩은 빵을 만들 때 쓰는 재료입니다. 빵 재료에 누룩을 넣으면 부풀어 오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앞에 있는 말을 빼먹고 뒤에 누룩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찾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낌새가 아무도 떡을 챙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떡 가져오지 않은 것을 의논했습니다. 제자들은 실수한 것을 깨닫고 당황했습니다.

전도 여행에서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기본입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조직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식량 책임자가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챙겼을 지 모릅니다. 방금 떡 일곱 덩이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이 기적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떡이 남아서 일곱 광주리에 모았습니다. 그 광주리에 챙긴 남은 떡도 상당한 양입니다. 흔해지면 방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그 떡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다 버려두고 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미뤘습니다. 나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챙기겠지 했습니다. 아무도 뒷마무리를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룩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했습니다. 두고 온 떡이 생각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셔서 떡을 찾나보다 했습니다. 제자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 격입니다. 당황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제자들을 보니 한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이리도 둔할 수가 있는가? 밥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밥보다 중요한 일을 챙기며 사셨습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복합적입니다.

첫째, 말귀를 못 알아듣는 둔함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누룩은 빵에 들어가는 누룩의 성질을 빗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란 진리를 왜곡하는 습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비진리는 누룩처럼 번져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지만 영혼을 죽이는 비진리입니다. 이런 비진리는 또 빠르게 퍼집니다. 금방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그러니 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런 자들의 괴변에 넘어가고 맙니다.

이 세상의 악한 것은 모두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달콤합니다. 빠르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올무가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악한 것은 본색을 드러내고 삶을 파괴합니다. 본인과 주변 환경을 오염시킵니다. 그 때는 악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비 진리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한참 생각하신 후 정말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기 전에 예수님이 이들과 논쟁을 벌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보고 날씨의 표적만 알았습니다. 그 너머에 영적인 하늘은 전혀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실 하늘의 표적은 하늘에 나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표적을 하늘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표적은 언제나 땅에 나타납니다. 땅에서는 땅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땅에서 평소에 볼 수 없는 하늘의 표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맹인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농아가 말을 듣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떡 덩이 몇 개로 수천 명이 먹고 남기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땅에서 이런 기적을 보면 이것은 하늘의 표적입니다.

결정적인 하늘의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권세를 이기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보다 놀라운 표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예수님을 두고도 하늘의 표적을 구한 이들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청중의 반응을 살핍니다. 설교를 잘 경청하고 있는가? 설교를 잘 이해하고 있는가? 특히 새신자들이 설교를 어렵게 느낄까봐 주의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쉽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 진리가 단순해 보여도 깊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중의 이해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닐 만치 다녔으면 설교를 90% 이상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듣고 이내 잊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거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의 귀가 열리고, 심령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제자들의 문제는 믿음이 둔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실수는 떡을 챙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건망증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챙겨야 할 줄 알면서 서로 미루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책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떨어져 잊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두고 온 떡이 아깝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는 용납하신다고 봅니다.

문제는 먹을 떡이 없을 때마다 예수님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경험한 제자들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적의 주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떡을 두고 배를 탔습니다. 끼니가 되어 먹으려고 보니까 떡이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또 주님은 오병이어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전에 하신 일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경험했습니다. 오늘 또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다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근거 없는 것을 무작정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을 때는 언제나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본문 9-10 절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저는 삼 주 전에 「영적 순발력」이란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영적 순발력이란 다른 말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행동은 과거의 은혜를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이게 둔하게 나오면 안 됩니다. 믿음은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영적으로 둔한 제자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칠병이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믿음 학습이 될 만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배 위에서 먹을 떡이 없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과거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히 충격적으로 놀랄만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먼 과거가 아닙니다. 바로 얼마 전일입니다. 또 한 번은 하루가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제자들이 어찌 이 놀라운 기적을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이것이 영적 건망증입니다. 생활 속에서 건망증은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 건망증은 심각합니다. 이것은 영혼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적 건망증은 머리가 좋고 나쁨과 상관이 없습니다. 영적 무지와 어두움은 내 책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가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치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고,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찔한 교통사고에서의 구원의 감격은 점점 잊혀갔습니다. 신앙이 바닥난 가운데 사업은 망하고 재산을 날렸습니다. 몸은 병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은혜를 잊을까요? 영적으로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오늘 다시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주일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과거가 아닙니다. 예배하는 오늘 이 시간에 내게 나타난 놀라운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과거의 은혜를, 다른 사람의 은혜를 현재화 시켜 오늘 나의 은혜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교육을 시키셨습니다. 믿음은 반복 학습이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청산하고 나오기 전날 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때 죽음의 사자가 장자를 잡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의 문설주에는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피가 묻은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란 단어는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현재까지 그 때 먹은 음식을 먹으며 그 날 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의식과 이야기 속에 재현합니다. 아이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조상들이 누렸던 은혜를 배웁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편 116:12-14>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다윗을 고백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빚 갚는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반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은혜에 민첩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둔감한 제자들을 한심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11 절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6 절에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셨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들려주고 또 들려주다 보면 귀가 열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12 절에 제자들이 ···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떠나 가셨습니다. 이는 이들의 구원을 포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트집만 잡으려는 이들은 주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록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둡지만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가르치니 결국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태어나면서부터 농아인 아이에게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보통 아이들은 수십 번 단어를 들려주면 익히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소리를 모르는 아이가 입 모양만 보고 따라서 소리라는 것을 내게 하려면 수 만 번 들려주어야 합니다. 처음에 소리라는 것이 있다는 개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농아가 소리의 개념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 학습 속도는 엄청나게 붙습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농아였던 아이가 수화가 아니라 직접 입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부모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뒤늦게라도 깨닫고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말씀을 깨닫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표적만 구하다가 주님을 놓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입니다.

여러분! 밥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깨닫는데 집중하십시오.

밥보다 중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를 꺼내 오늘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은혜를 잊고 저버리는 것을 배은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밥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으로 긴장하는 것입니다. 영적 방심은 은혜를 잊게 만듭니다.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이는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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