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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강해(11) "아멘"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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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11) “아  멘”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간구의 마지막은 ‘아멘’으로 마칩니다. 아멘은 “진실로 그렇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주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앞에 한 말이나 기원에 대해 ‘동의’할 때 사용합니다. “이 말에 동의 합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예배의식이나 기원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사용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찬양합니다”의 의미입니다. 셋째는 앞에 한 기도에 대해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확신의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는 뜻입니다.

동의 : “진실로 그렇습니다”

아멘은 원래 강한 긍정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서 27장에 보면 12개의 저주문이 나옵니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레위인들이 외치면 모든 백성은 이에 대해서 “아멘”(신27:16)합니다.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7-18) 이런 식으로 12가지의 저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으로 대답합니다. 결국 여기의 ‘아멘’은 “동의 합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동의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기도문을 ‘아멘’으로 마치는 것은 계약서를 다 쓰고 사인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라 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오늘 일용할 양식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길 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믿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인을 해 놓고도 지키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지요.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불성실한지 모릅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내어 놓기도 하고, 말을 해놓고도 식언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식언(食言)’은 ‘말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 놓고는 성전을 내려갈 때는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하다가도 성경을 덮고 나면 예전 사람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렇듯 밥 먹듯이 약속을 어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마지막에 이 ‘아멘’이라는 사인을 해도 되는지 회의가 듭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위기는 기도가 진실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대로 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마무리 교훈으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마7:21-24). ‘주여 주여’는 기도할 때 부르짖는 음성입니다. 천국은 기도 많이 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느냐? 기도하는 이유는 잘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곧 행동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지막에 사인처럼 하는 ‘아멘’은 이 기도가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살기를 원한다는 각오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계약이라는 단어를 구약에서는 ‘베리트’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자르다, 쪼개다’는 의미입니다. 고대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염소나 양을 둘로 쪼개서 벌려 놓습니다. 그리고는 이 두 사이를 계약 당사자가 지나갑니다. 이 의미는 계약을 위반한 사람은 이렇게 둘로 쪼갬을 당해도 무방하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계약한다는 것은 지키지 않을 경우의 무서운 결과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이런 계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 쪼갠 고기 사이를 하나님만 지나고 아브라함은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이 약속을 준수할 책임이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계약을 성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계약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 됩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은 자신만 그 사이를 통과하십니다. ‘너희는 잊을 지라도 나는 반드시 기억하고 이 계약을 성취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성실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부지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실로 우리 인간의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가 못 지키니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받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생각할 때 그저 찬양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마무리에 하는 이 마지막 ‘아멘’은 사실은 ‘하나님의 아멘’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리는 데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기억하셨다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기도 노트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다 가끔 과거의 기도 내용들을 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기도들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빛과생명 교회 개척을 하게 된 과정도 하나님의 기억하심 덕분입니다. 젊은 시절에 한국의 어려운 상황과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주권이 임하기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되어 이 민족을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당시 그렇게 기도할 때의 제 마음은 ‘아멘’ 뜻 그대로 이 기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매우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간구해 놓고도 잊어버립니다. 생활에 끌려 이리저리 살다보니 이런 기도들은 이제 추억처럼 잊혀지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매 제가 기도했던 대로 살 수 있는 길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기존 교회 담임목회자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개척교회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교회 비전으로 북한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 고민하며 기도했던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실제적으로 교회 개혁과 북한 선교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근 15년 동안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멘’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데 그때 등장하는 전형적인 표현이 “기억하셨다”는 문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옛 계약이나 맹세나 기도를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멘으로 사인한 그 계약서를 우리는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셨다가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찬양 : “진실로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아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곳은 찬양의 맥락에서 입니다. 시편 41편 13절에서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다음에 “아멘 아멘” 하고 ‘아멘’이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시편 106편 4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빌립보서 4장 20절에서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아멘은 찬양의 응답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에 대해서 “아멘” 하는 것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의 뜻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찬양의 회복입니다. 요즘 보면 우리 삶이 힘들어서 그런지 삶에 감탄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을 바라보거나, 가을을 맞아 밤송이나 온갖 과실들이 영글어 가고, 들판이 황금 들녘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만나는 만남인데도 설레임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류시화 씨가 쓴 『지구별 여행자』란 책에서 인도의 한 요가 성자와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류시화 씨가 어렵게 그 성자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처음 보자 대뜸 하는 말이 “왜 이제 왔어” 였습니다. 전생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좀 늦었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이런 교훈을 줍니다. “이것을 잊지 말게. 삶에서 만나는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야.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태어나는 것이지.”(‘성자와 파파야’ 중 어떤 구루지의 말)

전생이 있느니 없느니를 떠나 이 말을 들을 때 인생의 신비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1:4-5)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우리가 잉태되기 전에도 벌써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날 이 때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부로 만난 사람들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우신 계획하심으로 만났는데도 그 신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장미의 전쟁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무감동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이 사라지면서 세상 만물이나 되어지는 일들이 모두 우연이 되고 건조한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인들의 눈들은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의 눈이어야 합니다. 항상 무엇에 취한 듯한 감동하는 눈이어야 합니다. 보도 블럭 사이를 비집고 나온 들풀을 보면서도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만물을 보며 감탄하지 않는 것은 루부르 박물관에 들어가서 작품을 보면서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6일에 걸쳐서 천지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이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성경은 천지 창조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작품을 보며 감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할렐루야, 아멘이 절로 나와야 하지요.

인류사가 어둠이 가득할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의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3-14) 역사의 최종 승리가 빛의 나라, 곧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멘’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찬양 기도가 부족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찬양을 많이 하십시오. 우리 입에서 ‘아멘’이라는 말이 수시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할 때 근심이 떠납니다. 찬양할 때 미래가 밝아집니다. 찬양할 때 평화가 임하고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시편 119편의 시인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는 새벽기도, 아침기도, 9시 기도, 12시 기도, 오후 3시 기도, 저녁 기도, 마침 기도 등 하루 일곱 번씩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자주는 아니라도 수시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우리 인생을 기쁘고 능력 있게 만듭니다. 주기도문의 ‘모든 나라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어지러운 세상 나라보다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을 갖습니다.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모든 어둠의 권세와 세상의 위력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이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인생이 평화와 안식을 찾습니다.

믿음 : “진실로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세 번째 ‘아멘’의 의미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는 뜻입니다. 아마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축복의 말이나 소원의 기도 다음에 이에 대해서 ‘아멘’으로 즉각 응답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아멘’이 너무 남발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아멘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설교할 때 아멘 소리가 많으면 설교자는 신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멘’을 할 때는 진정으로 동의가 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할 때 하여야 합니다. ‘축원합니다’ 할 때 무조건 ‘아멘’ 하다보니 ‘아멘’의 가치가 떨어지고 무슨 내용에 대해서 ‘아멘’ 한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감동이 있는데도 침묵을 지키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정말 동의가 되고 그런 소원이 있다면 작은 소리라도 ‘아멘’하고 말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그 기도나 축원이 자기 것이 됩니다. 설교나 예배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우리가 한 기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의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계시를 마무리하며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자”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하고 고백합니다. 이 때의 아멘은 ‘주님께서 속히 오시길 원합니다. 속히 오실 것을 믿습니다.’는 고백입니다.

기도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를 하고 아멘으로 마무리하였으면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실 것을 믿는 것이 곧 아멘의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산상수훈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0-31)

주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아멘으로 도장을 찍었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부탁해 놓고 내 부탁을 들어주실까 하고 불안해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내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하면 그 아버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아멘은 마치 계약서의 도장과 같습니다. 한 번 인감 도장을 찍고 나면 그 계약은 성립된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고 능력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아”고 책망하십니다. 신약성서 한글개역판에만 ‘믿음’이라는 단어만 224번이나 등장할 정도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기적을 볼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근심과 염려만 가득할 것입니다. 기도하였으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놀라운 일들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은 ‘믿습니다’하고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아멘의 주님'

우리 주님은 아멘의 주님이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 하나님 앞에서 항상 아멘으로 고백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19-20)

우리 주님은 아멘의 주님, 곧 순종의 주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명령은 항상 ‘믿을 만합니다.’ ‘찬양할 만합니다.’ 그래서 ‘동의할 만하고’, ‘순종할 만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예스’ 곧 ‘아멘’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아멘신앙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축복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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