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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다시 선포하리라 (렘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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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월의 첫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정에, 시월에 좋은 일들, 기쁜 일들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에는 예언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레미야는 고난을 유난히 많이 겪은 예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별명이 ‘고난의 예언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눈물의 예언자’라고도 하지요.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도 예레미야가 성전 총감독인 바스홀이라는 제사장에게 큰 어려움을 겪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스홀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을 채워 성전 문 위층에 하루 낮과 밤을 두었습니다.
여기에서 ‘때렸다’는 것은  신명기의 규정에 의해(신 25:3) 40대를 때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 고랑에 목을 묶여 하루 낮, 하루 밤을 지낸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강아지도 아닌데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전 문 위층에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이런 일을 겪은 다음에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본문 가운데 7절 뒷부분을 보면 예레미야는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했습니다.
8절에서는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8b)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한 심정을 실감 있게 표현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심한 불평을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시작 부분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은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사정을 아뢰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공동번역」은 본문의 제목이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다’로 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세요.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라고 합니다.
여기의 “권유”는 히브리어로 ‘파타트’인데 ‘파타트’는 ‘권유하다’ 말고도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유혹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14장 9절에는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유혹”이라는 말은 같은 ‘파타트’를 번역한 것입니다.

또 ‘속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이 말을  ‘속이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7절 앞부분이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면 지금 예레미야의 마음에 얼마나 심한 불평이 들끓고 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거 좀 지나치지 않나?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참람(僭濫)’이라는 말이 있지요. 성경에도 몇 번 나오는데요, ‘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치다’는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 하나님은 나를 속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예레미야를 보면 참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는 ‘이거 신성모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고, 불평하고 싶은 것 있으면 불평하세요.
항의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항의하세요.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하나님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질문을 귀찮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해서 귀찮아 견딜 수 없다!’ 하시지 않습니다.
요즘은 공공기관 같은데 무엇을 물어보려고 전화를 하면 웬만한 대답은 다 녹음해 놓은 것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대답을 녹음해 놓고 ‘이거 들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항의한다고 ‘이 놈이 감히!’ 하시지 않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 묻지 않고, 불평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괜찮아요!’ 하고, 항의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가만히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속병 납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 말하지 않고 있다가 아예 도망을 가 버리는 일이 많더군요.

물어볼 것 다 묻다보면 위대한 대답을 얻게 됩니다.
크게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대들다시피 하면서 항의성 질문을 수없이 던진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많은 것을 묻다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2b)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10월은 종교개혁 기념일이 들어 있는 달인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과 마르틴 루터를 거치면서 종교개혁의 표어가 되었고 개신교 교리의 등뼈가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묻다가 ‘아,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구나!’ 알게 됩니다(욥42:3).
항의를 거세게 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순종을 더 잘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 다 해서 위대한 답을 얻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믿음의 길, 사명의 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9절 앞부분을 보세요.
예레미야에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말아야하겠다.’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아야하겠다.’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금 점잖지 못한 말로 하면 ‘집어치워버리겠다!’ 이렇게 됩니다.
더 점잖지 못한 말로 하면 ‘때려치워버려야겠다!’ 이렇게 됩니다.
점잖은 말로 하면 ‘사명을 포기해야하겠다.’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려고 했더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8절과 9절을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드립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우리가 뜨거운 음식을 식히지 않고 먹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안에서, 심장에서 타오릅니다.
뼈까지 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레미야는 다시 돌아옵니다.
시편 119편 5절에서 시인은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노래하는데 예레미야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선포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뜨거워진 가슴으로 선포합니다.
시편 39편 3절에서 다윗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져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하고서 여러 가지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까 하나님께 질문, 불평, 항의 심하게 하던 사람이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편이 되는 경우를 말씀드렸는데  예레미야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하나님께 불평하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결국에 가서는 그 것이 변하여 예레미야처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경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1장 2절을 보면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라고 하였는데 요시야 13년이면 기원전 627년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로부터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40년 안팎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 예언을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서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나중 예언한 것이 앞에 나와 있고, 먼저 예언한 것이 뒤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서를 읽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어려움을 주는 일이 있는데 같은 말씀이 되풀이 되는 경우와 예언이 체계적으로 기록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20장에서도 9절에서 ‘고통이 심해 예언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다시 일어서겠다.’ 했으면 그 뒤에는 힘찬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14절 이하에서는 생일을 저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주석은  ‘14절 이하가 왜 여기 들어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언제 있었던 일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뒤 흐름을 볼 때 기원전 605년 전쯤에 있었던 일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예언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20년쯤 지나서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예언활동의 중간쯤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레미야가 중간에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포기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길을 걷다가, 교회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이렇게 주저앉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믿음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명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성도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의 길을 걷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직무를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더 이상 나오고 싶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수험생이 ‘나 이 수능고사 치는 것 포기하고 싶어요.’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나가서는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저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그런 일을 겪은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일게 됩니다.
선교사들 가운데도 선교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길, 사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벼랑길을 걷는 사람이 그 길에서 벗어나면 벼랑으로 떨어지듯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면 파멸입니다.
영혼의 파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소명을 재확인하다.’ 이런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예레미야’ 이런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명의 중간확인,’ 또는 ‘중간부흥’ 이런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들은 사실은 오늘 설교제목의 후보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적어놓고 ‘어느 것을 찍을까?’ 하다가 ‘나는 다시 선포하리라’라는 새 제목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사명의 길, 믿음이 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다시 한 번 뜨거워지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이제부터 더 힘 있게 걸으며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예레미야는 더 심한 고난을 겪습니다.
고관들에게 맞고 여러 날 뚜껑 씌운 웅덩이에 갇히는 일도 겪었습니다.
감옥 뜰에 있는 진창 구덩이에 갇히는 일도 겪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동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피난 가서도 예언활동을 하다가 나일 강가에서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예레미야는 ‘아, 내가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어질 것이다.’ 하면서 꿋꿋하게 예언자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지치거나 낙담한 가운데 있습니까?
예레미야처럼 ‘내가 포기하려고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다시 믿음의 길을 걷겠습니다. 나에게 주신 직분과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겠습니다.’ 하면서 더 힘 있게 걸으며 일하시기 바랍니다.

마라톤 선수들, 중간에 기권하고 싶은 욕망을 안 느껴본 선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겨야 잘 뛸 수 있다고 합니다.

축구 선수들, 경기를 시작하고 20여분쯤 시간이 지나면 아주 힘이 들어지는 고비를 만난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겼을 때 그 다음부터 멋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11절에서 13절까지는 비탄에 잠겼던 예레미야가 확고한 믿음을 갖고 돌이키면서 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찬미’라는 소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찬미를 부르며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오늘은 시월의 첫날입니다.
일 년을 석 달씩 나누어서 1/4분기. 2/4분기, 이렇게 구분하는데 오늘은 2006년 4/4 분기의 첫 날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힘 있게 올해의 남은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행했습니다.
성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제일 기본적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희생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의 첫 순서인 성찬으로의 초대에서 성찬의 의미를 요약해서 말하면서 이것을 제일 먼저 말했습니다.
오늘 받은 성찬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걷게 하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하는 또 한 번의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어려움이 큽니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욱 힘 있게, 멋있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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