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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 19: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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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Eternal Life)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 과제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기가 싫어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군주와 가인과 재사와 소위 당대의 기득권자들은 이 땅에서 영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히 9 : 27).

본문에는 청년이라고 했고, 마가복음 10장 17절에는 한 사람이라고 했고, 누가복음 18장 18절에는 어떤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에 동일하게 기록된 이 성경은 일반적으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영생 얻는 길을 질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우리는 이 사람을 부자 청년으로 명명하겠습니다.
예수 앞에 나온 이 부자 청년은 종교적 우월감과 도덕적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도 많을 뿐 아니라 종교적 의무감이나 율법적 요구에도 충실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신만만한 청년에게 영생의 조건으로 계명 준수를 명했습니다. 이때 청년은 그것쯤이야 하는 식으로 다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명(율법)의 형식만 알고 있었지 계명(율법)의 온전한 성취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의 조건이 자기 앞에 있는 예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이 구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영생의 조건을 묻는 질문입니다.
'영생의 조건'은

Ⅰ. 새 계명의 생활화에 있습니다.

본문 19장 17절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명"과 '영생'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에 들어가기로 작정된 자는 계명을 지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로 이미 작정된 자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속에는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5절에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성취와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는 율법의 외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6절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혈통적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혈통적 선민 아브라함의 자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해야 합니다. 즉 이 땅에 있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2장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옛 계명과 새 계명이 나오는데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과 새 계명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새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①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② 율법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③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생활화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새 계명은 믿는 자들을 통하여 성취되게 하십니다.
'영생의 조건'은

Ⅱ. 현재의 보장된 소유가 보장된 미래 의 본질을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9장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율법의 형식적 준수가 하나님 앞에 엄청난 공적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청년의 영생에 대한 질문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자신의 삶이 늘 불안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온전"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궁극적인 영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 의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들어야 했습니다.
네가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있으니 영생에 대하여 확신이 없다고 말입니다. 재물을 버려야 하나님만을 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한 지금까지 지켜온 형식적인 율법 준수는 모두가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주는 메시지의 내용은 나를 좇아오려면 너의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자기 포기를 명하셨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자기가 가진 많은 소유가 현재에서 끝나지 아니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청년은 분명히 자신의 많은 소유가 자신의 미래까지 보장을 해 준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유는 그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그에게는 두 절대가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인간에게 두 절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 가치에 둘 때 성경은 이것을 지적합니다.
욥기 22장 24-25절에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역시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근심했다'는 말은 기분이 나쁘도록 슬펐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고통스러웠다는 말입니다. 못마땅해서 찡그리는 얼굴(lowering)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과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 절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본문 19장 23-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23절에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Ⅲ. 영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본문 19장 25-26절에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부자가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놀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부자는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들의 의식구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저주에 해당합니다.
잠언 19장 7절에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고 했습니다. 옛말에도 "빈거뇨시 무상식이요 부주심산에 유원권 "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을 그윽한 사랑의 눈으로 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영생을 얻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존재의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의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구원이 예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32-34절에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28-29절에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교회 일꾼들에게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3장 1절에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선한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저는 선한 일을 바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① 대인관계 =예배 ② 대인관계 = 사람 ③ 대물관계 = 정직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몸 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유형무형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일체의 보은 행위를 말합니다.
디도서 3장 8절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선한 일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7절에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햇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8절에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 6절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0절에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2장 7절에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그리고 14절에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5절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8절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1절에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1장 8절에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 된 것이 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가 의롭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가난한 자는 영생에 들어가는데 부자에 비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운동이라는 맥락에서도 동일합니다. 부자가 교회운동의 효율성 면에서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공통된 생각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회운동에 기여할 가능성이 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가능성일 뿐입니다.
영생에 있어서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는 말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게 만드시고 가난한 자는 자기의 것으로 만족케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교회운동에 사용하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소유에 대한 애착이 부자보다 더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늘 이 시대는 실제로 더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이나 부한 자들이나 기복 신앙으로 흐르는 위험성은 매 일반이지만 가난한 자가 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물질과 소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자만에 빠질 때가 있는가 하면 소유가 본질보다 앞설 때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가 영생인의 표징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이 땅에 살 동안 풍성한 결과로 영생인의 증거를 나타냅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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