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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날에 내가 저를 (호 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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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라도 자기가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자기 곁에 다가와주고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처럼 반가운 사람은 다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물론 사람의 그 심정을 모르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특히 당신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당신께로부터 책망을 받아 풀이 죽어 있거나 벌을 받아 낙담 중에 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가 있어야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처럼 낙심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을 우리에게 증거해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 된 신자들이 처져 있거나 약해져 있을 때 그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과연 어떻게 위로해주고 계십니까?

1.연단을 통하여 주시는 위로

본문 14절과 15절에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서 간음한 아내와 같이 우상 숭배함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매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이라는 이방 제국에게 멸망을 당하도록 따끔한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매를 맞고 울고 있는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두실 수도 없으신 성품의 소유자이셨습니다.그래서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가서 말로 위하고”라고 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 얼마나 불변한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거친 들” 즉 ‘광야’혹은 ‘황무지’로 데려갔다는 말은 그들에게 어떤 고통의 연단을 주셨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바벨론 포로생활이 결코 영원한 저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말로 위하고”라는 말은 정확히는 ‘마음에 말하고’란 뜻입니다. 포로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통하여 실로 친근하고도 다정하게 속삭여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위로의 말씀이었습니까?

그것은 우선 “저에게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는” 위로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바로 아간이 범죄하여 죽임을 당한 곳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배신 배은의 결과로 주어진 저주의 대명사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골 골짜기조차 오히려 소망의 문으로 바뀌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였습니다.

원칙대로라면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에게는, 우상을 숭배하느라고 온통 마음이 빼앗겼던 간음한 아내 같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퍼부어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바벨론 포로의 땅, 그 거친 들이야말로 바로 아골 골짜기가 되어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아골 골짜기에서 하나님께 매를 맞고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기만 한다면, 그 골짜기는 결코 영원한 저주의 골짜기가 아니라 놀라운 소망으로 인도해주는 문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통과한 후 기쁨과 감격에 겨워 모든 백성이 그 홍해를 뒤돌아보며 해변에서 찬양했었습니다. 무덤이 될 줄 알았던 곳에서 그들은 실로 기적적인 역전승과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지금 통과하고 있는 '아골 골짜기' 역시 그와 꼭 같은 소망이 있다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일단 그와 같은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기만 하면 뒤에 기다리는 은혜와 축복은 이전보다 훨씬 큰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8절에서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말씀해주시는 사실입니다. 이 뜻은 이전에 내렸던 모든 재앙들을 이제는 깨끗이 거두고 은택을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고난 뒤에 약속된 축복은 더 이상의 재난을 방지해 주시겠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만물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하여 일사불란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아주 멋진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도 한술 더 뜨셔서 그와 같은 축복의 정도는 바로 “이스르엘에 응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가 이방 군대에 멸망당한 곳으로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있어서는 저주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곳을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은, 이전에 받았던 벌을 상응하고 남음이 있도록 더욱 크게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분명히 잘못하고 있을 때조차 그저 잘한다는 칭찬만 해주고 매사에 달래어주는 사탕발림 식으로 자식을 키우시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랬다가는 점점 더 버릇만 나빠지고 결국 자녀다운 자녀, 아니 사람다운 사람조차 못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그런 식으로 망치거나 잃어버리실 분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믿는 자들에게도 그 지은 죄에 따른 벌을 주시지만 그 때문에 받는 고난의 정도라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한 후에 받게 될 축복에 비하면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좋은 말씀의 위로를 바로 그 ‘거친 들’에까지 친히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그 어떤 슬픔과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겨내고 소망을 지킬 수 있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모든 신자들은 바로 이런 체험을 늘 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당할 때는 아파서 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매로 인하여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며 따라서 한 걸음 더 성화되어지는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야단을 맞거나 하여 속된 말로 '삐끼게' 되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앉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속으로 정말 원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의 그런 기분을 이해해주고 곁에 다가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또 실제로 위로해주는 사람은 결국 누구입니까? 바로 그 아이를 징계했던 부모입니다.

자식에게 꾸중을 했던 부모만이 그 아이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자식에게 매를 들었던 부모는 속히 그 아이를 위로해주지 않고서는 스스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바로 그런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2. 죄악을 넘어선 사랑

이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위로를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 번 반복해주고 계십니다. 우선 16절과 17절에 “1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친 들과 아골 골짜기로 방황하는 이 지경이 되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 우상을 사랑하는 영적 간음을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입에서는 다시는 바알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가리켜 “내 남편”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볼 때는 사실상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버리고 떠나서 외간 남자와 간음을 저지르면서 동거하고 살던 여인이 무슨 염치로 자기 본 남편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으며 설사 그렇게 된다 한들 어떻게 그 남편의 얼굴이라도 제대로 마주대할 수 있겠습니까? 바알신이 좋다고 따라다녔던 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던 이스라엘이 도대체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겠으며 더욱이 그 하나님을 남편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면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 편의 완전한 용서와 더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이미 더럽고 추해진 간음한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19절과 20절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내가 네가 장가든다”라는 말씀을, 그거도 세 번씩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순결한 처녀와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며, 무슨 이혼했다가 재혼한다든지 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즉 이 말씀은 ‘내가 너를 용서하고 다시 네 아내로 받아 준다’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치 새 처녀를 맞이하는 새 신랑이 말하는 투로 “내가 네게 장가들어 너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놀라운 사랑의 말씀입니까?

이것은 이 세상의 여느 부부 사이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자기를 떠난 아내를, “그래, 그 남자한테 가서 잘 살아라”하고 깨끗이 보내어주기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마음 넓은 남자라 불릴 것이며, 물론 아주 드문 일입니다. 만약 그처럼 간음했던 아내를 다 용서해주고 다시 같이 사는 정도가 되면 아마 성자 같은 남편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지만, 이런 경우는 더욱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해진 아내를 다시 맞이하면서 마치 ‘처녀에게 새 장가 드는 신랑과 같은 기쁨’으로 맞이해 줄 남편이 과연 이 세상 천지에 어디 단 한 명이라도 실제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으로는 도무지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요 말조차 못 만들어낼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나올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 황송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편에서는 그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는 놀라운 남편 앞에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어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에 말하기를 저희는 이르기를 그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밖에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하나님 - 오직 이 짧고도 진한 부르짖음의 소리만 간신히 발할 수 있을 뿐, 다른 무슨 수식어는 앞에도 뒤에도 붙일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심령은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벅차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이처럼 위로하고 계십니다. 때로 하나님께 꾸중도 듣고 맞기도 하고 풀이 죽어 있거나 낙심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의 확인을 들려주십니다.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놀라운 용서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속삭여주시는 것입니다. 리가 이런 깊고도 넓고도 진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연인에게서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 쪽의 모습만 가지고 따져보면 어림도 없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리의 지은 죄들의 부끄러움, 그 악함, 그 지독함, 그 추함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우리가 백일, 천일을 금식하면서 회개한다 해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주님의 신부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공로를 세운답시고 무슨 선행이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계산을 하고 흥정을 하려는 것은 실로 몰염치와 강퍅함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저와 여러분의 부끄러움과 무능력까지 이미 스스로 다 해결해 놓으시고 우리를 불러주고 계십니다. 그런 걱정은 도무지 할 필요 없다고, 다시 하나님 편으로 돌아올 면목이 없다고 망설일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아니 그런 것은 주님과 다시 결합하는데 아무 계산조차 필요 없는 것이라고, 먼저 주님 편에서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다 해결해놓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주님 편에서 우리 죄를 이미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기에 저와 여러분에게는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으로, 거친 들도 오히려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길’로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만큼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우리가 더 이상 어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얼굴을 들 수 없는 더러움과 감히 그 앞에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할 범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훨씬 더 사랑해주시겠다는 주님의 놀라운 위로,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에게 선포된 이 복음 중의 복음으로 불러주시는 초청에 그저 감사함으로 영접하고 아멘으로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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