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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살자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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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인물이 출중하거나 명석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쓰시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잣대와 기준으로 보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믿음으로 바라본 사람들이다.

  조용기 목사님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시지만, 그 분의 배경은 별 것 아니다. 당시에 무인가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목사님이 되신 이유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학력이래야 안동 성서 신학원과 서울장로회신학교 별과를 수료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신다는 믿음이 있다. 이처럼 믿음은 꿈을 만들어 내고, 소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꿈과 소망은 결국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11장은, 영웅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믿음의 영웅들은 영원을 소유했다. 과거에 매달리며, 운명에 맡기고 포기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다.

  믿음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때가 차매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이 만들어낸 꿈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1. 믿음은 소망의 근거다(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바라는 것들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말한다. 실상이란 근거를 말한다. 따라서 믿음의 소망의 기초라는 말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절망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절망을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 믿음으로 절망 너머에서, 새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능력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창대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적인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100세로, 그의 몸은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아내도 생리가 이미 끊어졌기에,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들을 얻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창대하게 되었다.

이처럼 믿음은 바랄 수 없지만, 바랄 수 있도록 만들고, 볼 수 없지만,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청년이 있다. 칼슘이 몸 안에서 과대 생성되어 축적됨으로써,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 버리는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8살 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해,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절름발이라고 놀림 당할 정도로, 눈에 띄게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 병의 실체나 심각성을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12살 무렵부터, 몸 안의 석회가 몸밖으로 뚫고 나와,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게 되면서, 통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이후, 줄곤 자리에 누워지내야만 했다. 물론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몸 안의 석회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치료 방법이 없기에,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한다고 단정지었다. 그는 ‘죽음의 악령’과 처절한 사투를 벌렸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지만,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며, 끝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적처럼 나을 수도 있다’는, 한 가닥 희망도 없이, ‘점점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확정된 절망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흔적도 없이 죽어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마침내 자신의 기막힌 인생을 기록하여,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독학으로 영어와 한문 공부를 하는가 하면, 다방면의 독서를 하고, 시도 썼다. 또 컴퓨터도 열심히 익혀, 3년 전부터는 굳어버린 손에 볼펜을 끼고서, 컴퓨터 키보드를 한 자 한 자 눌러가며, 인생을 쓰기 시작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도, 마침내 2년 만에 800매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원고를 다듬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꿈만은 잃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썼다. ‘꿈꿀 수만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니, 아무리 참담한 현실이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놀랍게도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박진석, 시대의 창). 그는 하나님을 영접했기에, 지독한 고난을 욥과 같은 믿음으로, 이길 수 있었다. 이처럼 믿음은 바랄 수 없지만, 바라게 만든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란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의 어리석은 이성으로 판단해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믿음을 가지면 소망이 생긴다. 소망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난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불투명해도, 믿음으로 전진하면, 우리 눈앞에 축복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은 시력을 잃었어도, 크로스비처럼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며, 베토벤처럼 청력을 잃고도, 하늘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한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2. 믿음은 축복이다.

1절 끝에도 ‘증거’가 나오고, 2절에도 ‘증거’라는 단어가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는 다 같이 “증거”라는 말로 번역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다른 단어이다.

  1절의 증거(엘렝코스)는, “죄를 깨닫게 하다, 꾸짖다”는 말에서 왔기에 ‘책망과 확신’을 말한다. 2절의 증거(마르튀레오)는 “증인이 되다,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노아에게 홍수는 보이지 않는 미래였다. 그러나 장차 올 홍수를 믿음으로 보고, 방주를 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비가 올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노아는 믿음의 눈으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모습이 보았기에, 가족을 이끌고 방주를 준비할 수 있었다.

  결국 비가오자 홍수가 나서, 노아의 가족만 빼놓고 모두다 죽고 말았다. 이처럼 믿지 못하면, 책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고위급 회담이 처음 열렸을 때다. 먼저 우리나라 대표단이, 북한의 평양을 방문했다. 그 답례로 북측 대표단이, 우리나라 서울을 오게 되었다. 그들이 탄 자동차가 서울 시내에 들어오고 있었다. 북측의 대표단 가운데 한사람이, 창 밖을 내다보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수고가 많았겠어. 진짜로 수고했겠네.” 우리측 대표가 그 소리를 듣고서,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수고했다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러자 북측 대표는 창 밖을 달리고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전국에 있는 자동차들을 서울로 모두 다 올라오게 했으니,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소?” 우리측 대표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웃으면서 이렇게 받아넘기고 말았다.

  “말도 마세요. 그 정도는 약과지요! 저 높은 빌딩들을 보세요. 전국에 있는 빌딩들을 서울 시내로 옮겨오느라고, 모두가 죽을 고생을 했어요.” 아무리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말해주어도, 믿으려들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믿음은, 아름다운 미래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꿈이었던 놀이동산을 LA근교에 건설했다. 하지만 그것만을 만족할 수 없어서 좀 더 넓고, 좀 더 과학적이고, 좀 더 자연 친화적인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또 다시, 플로리다 디즈니월드를 계획했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디즈니월드가 오픈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디즈니월드 개막식에서 유명 인사 한 분이 축사 중에, 월드 디즈니 씨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어서 단에 오른 미망인이 이런 답사를 했다.

  남편에 대해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한 가지 수정할 것이 있다. 남편이 오늘 이 개막식을 보지 못해 안타깝다고 하셨는데, 사실 남편은 오늘 이 동산이, 열리는 것을 보며 일했다. 그가 보았기에 우리가 오늘 여기 있다. 이처럼 믿음은 비전의 산실이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보게 만드는 능력이요 축복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을 보이지 않는 땅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볼 수 있었고, 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해도, 자신은 보았기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책망의 증거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가면, 믿음의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 베드로는 갑자기 부는 바람으로 인해, 무서워하면서 물에 빠져버렸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의 다급한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를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베드로를 무엇이라고 책망하셨는가?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적은 자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을 보실 때, 칭찬하시겠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책망하시겠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지만, 세상 앞에서 무기력하고, 하나님 앞에서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너무나 안타깝지 않은가? 그러므로 기왕이면, 크고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좋은 믿음, 굳건한 믿음이 되어서,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란다.

3. 믿음은 증거가 있다.

  믿음은 단지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분명히 증거가 2절에 있다. 심증이 아니라, 법적인 증거가 있다. 4절 이하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배들이, 바로 그 증거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아주셨다. 이것이 증거다(4).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너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라는 증거를 받았다(5). 노아가 방주를 믿음으로 지었더니, 그 홍수 심판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을 때,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8). …

  요셉은 믿음으로 자기가 죽은 후, 후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말했다(22). 그것은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믿음대로 되었다.

  갓 태어난 모든 유대 사내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무시무시한 바로의 명령이 있었지만, 모세의 부모는 목숨을 걸고, 아들을 키우기로 작정한다.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아기는 후에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돌았다. 그래서 성이 무너지는 증거를 받았다.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여,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받았다. 이 모든 사람들이 받은 증거는 분명하다. 이처럼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면 무조건 믿으면 되는가? 아니다. 믿음에는 신념과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신념은 자기 자신을 믿고,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래서 3절에, 믿음은 온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이 세상(코스모스)이 아니다.

  시공을 창조하신, 영원한 세계를 말한다(아이온).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말한다.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만물을 붙들고 있다. 이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다. 로고스와 같은 말씀을 의미하면서도, 보다 더 활동적이며 강렬한 ‘흐레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곧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이, 바로 세상을 만든다. 주님의 활동적인 말씀 안에서, 영원한 세상이 빚어지고 있다. 흐레마는 성경에 75번 나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4:4).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눅1:37).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다(눅5:5).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눅8:47).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그들은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뛰어 넘어, 승리할 수 있나요? 믿으면 된다. 믿으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라.

  이 위대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나의 주인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믿고 따르자. 그러면 우리 앞에 놓인,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

  결론이다. 절망 중에 있나요?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아직 절망하지 말라. 절망 중에 찾아와,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하나님 말씀을 예배에 참석하고, 주님 말씀을 듣기 위해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레마가 들려온다.

  그리스도인이 절망하고 쓰러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이 믿음의 생활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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